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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정신을 잃었을까. 뭔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또 들리지 않기를 반복한다. 뺨을 찰싹찰싹 때리는 손길이 느껴진다.
"이봐요. 정신 차려 봐요."
정신 차리라고 두드리는 건 알겠는데, 너무 쎄! 뺨이 아플 지경이다. 거기다 속이 뒤집힐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숙취와도 비슷했지만 머리 아픈 것보단 속이 안 좋은 게 더 심했다. 간신히 눈을 떠보니 예의 그 허스키 보이스 여자와 소란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바짝 마른 입술을 억지로 열어 원하는 것을 요구했다.
"물 좀....."
"선생님!!"
눈물범벅인 소란이 내게 와락 안겨 목을 끌어안는다. 그래, 내가 깨어나 기쁜 건 알겠는데 말이다, 안 그래도 숨쉬기 곤란한데 너까지 그러면 더 그러잖니. 간신히 소란이를 진정시켜 떼어놓았다. 허스키 여자가 손에 물을 담아와 내 입술에 대주었다. 체면 차리지 않고 그걸 벌컥벌컥 들이켰다. 수돗물 냄새가 심하게 낫지만 마시지 않는 것보단 나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아 지독히 어두웠지만 천장 가까운 곳에 나 있는 환풍구를 통해 아주 약한 빛이 조금씩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새벽인 듯했다. 사방이 막혀있고 한쪽 벽은 유치장처럼 창살까지 달려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저 사람들이 징벌실이라 부르는 곳입니다. 일종의 감옥이죠."
끄억거리며 계속 울고 있는 소란이를 대신하여 허스키 여자가 대답했다.
"그렇군요.... 우욱!!"
물이 들어가자 겨우 진정되던 속이 다시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입을 틀어막자 소란이가 날 데리고 한구석에 있는 양변기로 데려갔다. 간신히 바닥에 토하지 않고 그 안에 쏟아낼 수 있었다. 꽥꽥거리며 한참 속을 게워내고 나서야 비로소 몸이 좀 좋아졌다. 그 목사 새끼는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처음에 끌려올 때는 맞아서 기절한 건데, 두 번째 기절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원 목사가 그저 내 목과 머리를 손으로 짚었을 뿐인데, 아득한 기분이 들면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입으로는 게거품까지 내뿜으면서....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허스키 보이스 여자가 내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원 목사는 특별한 장치가 달린 반지를 손에 끼고 있습니다."
"무슨 무협지에서 나오는 사파 장로인가요?"
"그 안에는 아마 알코올 합성용액 같은 게 들어있어서, 그걸 목 뒤로 주사한 모양입니다. 속이 많이 안 좋죠? 이쪽으로 앉아보세요."
허스키 여자가 날 앉혀놓고 얼굴과 동공을 확인한다. 입을 벌려보라고도 하고 목 뒤를 자세히 살피기도 한다.
"혹시 의사세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간단한 지식이 있다고 해두죠."
그녀는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은 장미애. 그녀도 가족 중 한 명이 여기에 있다고 했다. 다만 그녀는 우리처럼 끌려온 건 아니고 자기 발로 왔다고 했다. 자기 발로 온 사람이 왜 갇혀 있냐고 했더니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당신처럼 나서다가 한 번 찍혔다고 대답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소개했다.
"저는 최한석입니다. 그리고 여긴..."
"알아요. 한석 씨가 기절해 있는 동안 이미 이야기 많이 나누었습니다. 소란이가 당신을 많이 걱정했어요."
소란이는 내 곁에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쉬지 않고 떨리고 있는 아이의 작은 손을 꼬옥 잡아준다. 두려움에 빠진 이 아이가 기댈 곳은 이제 나 하나뿐이다. 미애는 한쪽 벽에 기대앉으며 말했다.
"그러게 제가 가만있으라고 했잖아요. 저도 처음에는 못 참겠다는 생각에 대들고 그랬는데... 별로 뒤끝이 안 좋더군요. 차라리 맞고 끝나면 다행인데, 그런 식으로 저들의 쇼에 농락당하는 게 보통이에요. 게다가 그들은 약을 쓰는 게 굉장히 능숙해요."
"그랬나요.... 몰랐습니다."
"한석 씨에게는 주입한 건 아마 단순 마취약일 테지만 즉효에 가까워요. 증상 중에 몸이 경직되고 발작 같은 걸 일으키는 게 있죠. 그들은 그걸 가지고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칭하면서 선전합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굽히고 들어오면 그때 가서 안수기도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죠."
"끝까지 개기면요?"
"여전히 사탄에 물들었다고 하면서 좀 더 격렬한 안수기도를 시작합니다."
"격렬한 안수기도?"
"기도를 빙자한 집단폭행이죠. 아마도 살면 다행이고, 죽으면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묻힐 거예요."
등줄기가 오싹했다. 사이비인 줄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소품과 무대연출까지 완벽한 사이비일 줄은 몰랐다.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하아. 아주 계획적이군요. 후우."
"한숨쉬기는 일러요. 이제 앞으로 당신을 회유하려 들 거예요. 당신의 선택은 두 가지가 있어요. 끝까지 저들과 맞서느라 이렇게 갇혀서 체력을 점점 소비하든가 아니면 순응하여 귀신이 퇴치된 사람 역을 하는 거죠."
미애의 설명은 차분하면서도 명료했다.
"선생님이라고 했죠? 고학력자를 대할수록 저들의 수법은 더 악랄하고 교묘해집니다. 마음의 준비를 해두세요."
"알겠습니다만... 미애 씨는 어떻게 그런 걸 잘 알고 계신 거죠? 혹시 저들하고 한패라거나...."
그러자 그녀는 빙긋 웃었다.
"한패면 한패라고 이야기를 하겠어요? 옛말에 이런 말이 있죠.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요."
많이 들어본 인용구인데 어째 내가 아는 말과 조금 달랐다.
"에..... 백전백승이 아니구요?"
그러자 미애가 두 손을 내저었다.
"전혀요. 사람들이 그렇게 틀리게 많이 알고 있죠. 병법을 쓴 손자의 원래 성향을 생각해보면 백전백승 같은 허황된 표현은 못 쓸 거예요. 그가 항상 이야기한 것은 되도록 전쟁을 피하고 설령 맞붙게 되거든 철저한 승리보다는 전쟁에서 패하지 않고 자신을 보존하면서도 상대를 격퇴하는 방법을 논했죠. 그러니 백전백승이 아니라 백전불태가 맞아요. 원문이 실린 손자병법 모공편에 따르면..."
신이 나서 이야기하려던 미애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헛기침을 했다.
"지금은 별로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겠군요. 암튼 저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나름 연구를 하고 들어왔습니다만 그쪽은 전혀 아닌 모양이군요."
그럴 상황은 아니긴 하지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병법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여자라니. 참 보기 드문 여자다.
"아아. 제가 아니라 미애 씨가 더 선생님 같으세요. 그리고 사실 전 진짜 선생님은 아니고 대학생입니다. 여기 얘네 학교에서 교생 실습중 이었어요. 이 아이가 잡혀 오는 걸 보고 덤비다가 같이 끌려왔어요."
"그 이야기도 들었어요. 일단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면 전부 선생님이죠. 뭐."
내가 미애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소란이 울음을 거의 그쳤다. 녀석의 단발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토닥여 주었다. 미애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더니 내게 물었다.
"혹시 학교 말고도 정기적으로 연락하거나 만남을 갖고 있는 상대가 있나요?"
"그건 왜요?"
"한석 씨의 부재를 빨리 알아채고 신변의 이상을 감지할만한 사람이 누구냐는 거죠. 아까 소란이한테 들으니 애인이 있으시다고...."
끄악. 소란이, 넌 대체 남 일에 대해 어디까지 이야기한 거니. 소란이를 살짝 흘겨보고 미애에게 답했다.
"저기, 도움을 많이 주신 건 알겠는데 애인 이야기까지 미애 씨한테 해야 하는지는 몰랐는데요."
"내가 한석 씨 애인에 입후보하려는 게 아니라 여기에 있는 걸 밖에서 누군가 빨리 알아차려 주면 좋다는 뜻으로 한 말이에요."
애인이라고 하니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은 아무래도 선영이였다. 소란이도 선영을 내 애인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는 게 이미 며칠째다. 어디로 간지도 모르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그녀가 여기 있는 날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아아. 미안해요. 직업상 따져 묻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직업상?"
"암튼, 일단은 푹 쉬고 계세요. 내일 아침이 되면 저들이 다시 찾아올 거예요."
미애는 바닥에 눕더니 신문지 한 장을 끌어다 덮었다. 우리 셋이 있는 곳은 나무판자로 마루를 깔아놓은 서너 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한쪽에 낡아빠진 양변기 한 대와 세면대가 있었고 창문은 전혀 없었다. 한쪽 벽면이 트여있기는 하지만 창살로 되어있는 통에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소란이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선생님, 일단 쉬세요. 미애 언니 말대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러자."
이불 같은 사치품은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한쪽에 신문지가 조금 쌓여있었다. 혹시나 해서 들여다보았지만 몇 달된 신문이라 하등 도움이 되질 않았다. 손목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몸도 말이 아니거니와 쏟아지는 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미애처럼 신문을 끌어다 덮고 바닥에 누웠다. 소란이가 내 곁에 눕더니 날 마주 보았다. 불안에 가득한 그 눈이 못 견디게 안타깝다. 팔을 뻗어 녀석을 불러들였다.
"소란아. 이리와."
내가 품을 열자 소란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 품에 안겨왔다. 말 그대로 어미를 잃은 아기새의 몸짓이었다. 다시 흐느끼기 시작하는 녀석의 등을 어루만져주며 얼핏 잠이 들었다. 소란이는 계속 내게 미안하다고 했고 난 괜찮다고 해주었다. 정말로 제발 괜찮기를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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