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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나도 내심 불안해하고 있는데 그런 소리까지 듣고 나니 가슴이 철렁했다. 이 여자가 진짜... 빈말로 위로라도 해주면 어디 덧나나. 그러나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미애의 이야기를 듣고 나보다 더 걱정하며 울먹거리는 소란이를 다독여 주었다. 적어도 이 아이가 있는 이상 내가 무너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소란이의 어깨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김 권사는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밥을 가져다주는 사람도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도 점점 지쳐갔다. 생각해보니 어제저녁 이후로 아무것도 못 먹고 있었다. 다들 사정은 마찬가지인지라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합창으로 울려 퍼진다. 세면대가 있어 수돗물은 마실 수 있었지만 그걸로 허기가 채워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꼬르륵거리는 소리만 더 크게 만들 뿐이었다. 게다가....
"서...선생님... 저기..."
"응?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아...아뇨... 그게 아니라...."
몸에 힘이 없는지라 나와 소란이는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고 미애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소란이는 내 팔을 베고 누워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그게요... 그러니까..... 히잉...."
상체를 일으키고 난감해 하는 소란이를 쳐다보았다. 녀석은 무언가 내게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말을 꺼내지 못해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영문을 몰라 가만히 있자니 미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한석 씨? 철창 쪽으로 가서 바깥을 보고 계세요."
"망을 보라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고요. 손가락으로 귀도 막고 계세요. 소란이가 부끄러워하지 않게."
"아아..."
그제야 상황을 눈치챘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소란이를 되도록 쳐다보지 않도록 애쓰며 변기 쪽에서 등을 돌린 채 철장 쪽에 가서 섰다. 손가락으로 귀도 틀어막는다. 소리가 어느 정도 차단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이 전혀 들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아마도 소란이가 바지를 벗고 팬티를 내리고 있겠지. 그리고 변기에 걸터앉아..... 으으으. 내가 변태가 된 기분이다. 피어오르는 망상을 황급히 지워버린다. 이내 쏴아아- 하는 물줄기 소리가 들려온다. 어릴 적에 가지고 놀던 물총으로 벽을 맞출 때 나던 그런 소리가 길게 들려온다. 잠시 후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가 나더니 이어서 미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볼일 좀 볼 테니 계속 그러고 있으세요."
"네."
"귀 막으라고 했잖아요."
".....막고 있어요."
귀 막은 사람한테 말을 건 사람은 또 뭔데. 투덜거리고 있노라니 아까와 비슷한 소리가 다시 한 번 더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도 요의가 들었다. 미애가 됐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소란이와 미애가 철창 쪽으로 가서 섰다. 이 좁은 공간에 나 말고도 여자가 둘이나 더 있는데 물건을 꺼내야 한다니... 창피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물건을 꺼내어 조준을 하고 발사. 빈속에 물만 마셔서 그런지 오줌이 한참 나온다. 겨우 방광을 다 비워내고 털어낸 다음 옷을 도로 입었다. 원래 자리로 돌아오니 소란이가 부끄러웠는지 내게 가까이 오지 않고 조금 떨어져 앉았다. 미애를 마주 보고 맞은 편 벽에 기대어 앉았다.
"저들의 특단의 조치라는 게... 이렇게 생으로 굶기는 거였나 보죠?"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대상을 무력화시키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가장 폭력적이면서도 잔인할 만큼 확실한 방법이니까요."
기운이 많이 빠지긴 했지만 미애의 목소리는 제법 강단이 있었다. 어제도 그렇고 이 여자는 이런 상황에도 쉽게 당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화를 내며 발광하는 내 모습이나 줄곧 울고 있는 소란의 태도가 썩 잘한 짓이라고 보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나타날 가장 일반적인 태도이지 않을까. 아무래도 저 여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애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대체 뭐 하는 분입니까? 미애 씨는."
"왜요?"
"그냥 궁금해서요... 뭐... 지금 우리가 딱히 할 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쪽 이야기나 들어보죠."
그러자 미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굶기고 방치하는 걸 얼마나 길게 할지 모르잖아요. 말을 아끼고 체력을 비축해요. 되도록이면 크게 움직이지 말고."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 게 좀 불만이긴 했지만 그녀의 말은 우리 상황을 정확히 보고 내린 올바른 판단이었다. 그녀의 말을 존중했다. 소란이는 바닥에 누워 있었고 난 벽에 기대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불행히도 미애의 말은 상당 부분 들어맞았다. 우리는 그렇게 찾아오는 이도 없어 꼬박 하루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밤새 꼬르륵거리는 배를 달래며 뒤척거려야만 했다. 배가 고프면 잠도 안 온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렇게까지 굶어본 적은 처음이다. 사람의 허기가 이토록 무서운지 몰랐다. 신문지를 조금씩 찢어 질겅질겅 씹으며 버텨냈다.
아까 소변 사건 이후 내게 떨어져 있던 소란이가 밤이 되자 다시 내 곁으로 왔다. 소란이를 품에 안고 다시 밤을 보냈다. 그렇게 철창 안에서의 두 번째 아침을 맞이했다. 지독하리만큼 잔인한 허기가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저야 버틸 수 있다 쳐도.... 미애 씨나 소란이가 걱정이네요."
어제 김 권사가 왔던 시각이 되면 또 오지 않을까 싶어서 철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철창은 커다란 방의 한쪽 구석에 있었고 철창 너머에는 또 커다란 문이 있었다. 어제, 아직 기운이 있을 때는 그 문을 향해 소리도 질러보고 신문지를 뭉쳐 던져보기도 했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 있는 철창의 문은 꼼짝달싹 하지 않을 정도로 견고했고 다른 출구는 전혀 없었다.
"저도......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아이가 걱정이네요."
미애의 목소리도 기운이 없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소란이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같은 얼굴을 하고 소란이를 돌아본다. 소란은 어제저녁부터 거의 미동도 하지 않고 몸을 말고 바닥에 누워있었다. 열이나 다른 징후는 없었고 그저 탈진 비슷한 상태였다. 설마 오늘 하루 더 굶기는 건가 싶었는데 다행히도 아침 아홉 시가 되자 문이 열리고 김 권사가 나타났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중년 여자와 함께였다. 그녀를 본 소란이가 몸을 비척비척 일으키더니 철창까지 기어갔다.
"어..엄마...."
새로 나타난 중년 여자를 쏘아보았다. 소란의 반응을 보니 그녀는 소란의 어머니임이 분명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특별히 안타깝다거나 슬퍼서 찡그린 게 아니었다. 지금 자기 딸이 탈진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는데도 그녀의 표정은 못마땅함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철창으로 조금 다가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딸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질책하는 목소리였다.
"소란아. 꼴이 이게 뭐니."
"엄마아..."
"그러게 진작에 엄마가 말한 대로 주님의 품 안에서 미래를 예비했어야지."
다시 또 울컥해진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그쪽을 쏘아보려는데 미애가 날 보고 고개를 흔드는 게 보였다. 그녀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안 돼. 움직이지 마. 어제처럼 또 그러지 말라고.' 난 주먹을 꽉 쥐고 뒤통수를 벽에다 기댔다. 소란이는 엄마에게 다가가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엄마.. 밤마다 소희가 엄마 찾아요. 수혁이랑 수민이도 말은 안 하지만 엄마 보고 싶어 한다고요."
"너희 아빠가 반대만 안 했어도 다 같이 지낼 수 있잖아. 네 아빠 탓이야."
"그게.... 그게.. 왜 아빠 탓이에요! 엄마가 말하는 건 여기 와서 다 있으란 거잖아요. 그럼 애들 학교는 어떻게 가고 아빠 세탁소는 어떻게 하라구요!"
"그깟 게 다 무슨 소용이니. 조금 있으면 세상이 바뀌는데."
"바뀔 땐 바뀌더라도 지금 당장은 열심히 살아야죠!"
"그래서 엄마가 너희들 몫까지 열심히 기도하고 있어. 일단 너라도 나랑 같이 가자."
그녀는 이미 눈빛이 이 세상에 머물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철창을 통해 손을 내밀었지만 소란은 그 손을 무슨 낯선 사람의 손이라도 본 것처럼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시...싫어. 엄마... 제발 정신 좀 차려요....흐...흑....흑....."
결국 꾹 눌러왔던 소란의 슬픔이 폭발하고 말았다. 가냘프게 떨리는 녀석의 등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보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고 엉엉 울고 있는 소란을 그냥 둘 수 없었다. 녀석에게 다가가 안아준다. 소란은 내 품에 와락 안기더니 내 셔츠를 눈물로 적시면서 펑펑 울었다. 소란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소란이 어머님. 학부모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누구....?"
"아, 지금 소란이 반 부담임 하고 있고, K대 부속고에서 교생실습 중인 최한석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네요."
"당신은 그저께 교회 집회에서 마귀 들렸던 남자....?"
"아, 그게 교회였나요? 웬 미친놈이 맨 앞에 나와 헛소리를 지껄이니까 사람들이 하나같이 좋아서 꺼뻑 뒤집어지던데? 전 또 미친 연놈들이 하도 많아서 정신병원인 줄 알았는데 잘못 알았나 봅니다?"
김 권사에 비해 이 아줌마는 놀리는 맛이 확실히 있었다. 얼굴이 금세 붉그락푸르락 하더니 철창을 쥐고 소리쳤다.
"감히 성스러운 교회를 욕되게 하더니! 역시 목사님 말대로 마귀 들린 놈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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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연재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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