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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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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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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상행선 북대구 인근. 검은 차 한 대가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차선 변경과 급가속을 밥 먹듯이 하며 다른 차들을 아주 빠르게 제치고 있었다. 차의 조수석에 타고 있던 리사는 살짝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세요, 언니. 그렇게 밟아대지 말고."
운전석에 앉은 예린은 대답이 없었다. 리사가 한 번 더 말하자 그제야 대답한다.
"저는 정상 속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언니 기분 안 좋으면 앞차에 바짝 붙이는 거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불만 있으면 그냥 말로 하라구요."
예린은 밟고 있던 액셀레이터에서 발을 뗐다. 달리고 있던 차의 속도가 조금 떨어졌다. 속도계의 눈금이 150에서 100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 다시 액셀레이터를 밟는다. 세게는 아니고 살짝 얹어놓다시피 하는 정도로만 밟아 정속을 유지한다. 속도를 떨어뜨리자 조금 전까지 번호판이 보일 정도로 가까웠던 앞차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리사가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그녀는 예린이 화를 내고 있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휴우. 제가 서울 가는 게 그렇게 못마땅해요?"
"저는 그렇게 말한 적 없습니다."
"당연하죠. 언니가 언제 뭔가를 말로 표현한 적이 있었나요?"
리사는 무릎 위에 올려진 서류철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대충 넘기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적힌 각종 수치와 문구 등은 그녀의 머리에서 빠짐없이 기록되고 처리되고 있었다. 그러는 동시에 그녀는 또 다른 이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언니가 이해해 줘요. 오빠 문제잖아요."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말투가 왜 그래요?"
"그저 그분을 걱정하는 것만큼.... 조직도 신경 써 주셨으면 합니다. 요새 특히 송 부장이...."
"알고 있어요. 알았다구요."
리사의 대답에 짜증이 섞여 나오자 예린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손을 뻗어 라디오를 틀었다. 시티폰이 서비스 개시 한 달 만에 10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했다며 연말까지는 백만 명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을 담은 뉴스가 나왔다. 예린이 주파수를 바꾸자 주주클럽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리사가 좋아하는 가수여서 거기에 주파수를 두었다. 그렇게 아무 대화도 없이 라디오의 노래만이 흐르는 차는 서울을 향해 달려갔다.
"언제나 아~ 아아 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있어. 내 경험에 대해 내가 사랑을 했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 언제까지나.."
리사는 보고 있던 서류철을 덮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시각을 차단하고 나자 아주 미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차가 흔들리나 싶었지만, 예린이 속도를 올린 것 같지는 않았다. 리사는 자신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떨려? 내가?'
기분이 이상했다.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서울행을 결정하기까지, 사실 그녀의 마음속에는 확신이 없었다. 한석을 찾으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유진이라는 꼬마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전화로 호기를 부렸지만, 내심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이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린이라면 리사의 이런 속내를 짐작한 걸지도 몰랐다.
리사는 눈을 뜨고 옆자리의 예린을 바라보았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검은색의 정장을 빼어입고, 얼굴엔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는 그녀는 마치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 같았다. 처음 봤을 때도 마치 고양이 같은 움직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십 년이네요."
"어떤 거 말씀입니까?"
"언니랑 저랑 알고 지낸 지요."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십 년 전, 둘 다 작은 꼬맹이이던 시절, 둘은 우연히 만났고 그 날부터 지금까지 함께 했다. 리사는 평소 궁금하던 걸 물어보았다.
"언니는 만약 이 일을 안 했으면 뭐했을 거 같아요?"
"간호사요."
"어머, 언니가요? 원래 그런 쪽으로 하고 싶어 했어요?"
의외로 즉답이 튀어나와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예린은 별거 아니란 투로 말했다.
"저희 고아원에서 일정 나이가 될 때까지 입양부모나 후원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전부 나가야 했습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나간 여자애들은 대부분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간호학교는 기숙사를 제공했거든요."
"아아. 그랬군요."
리사는 간호사 복장을 한 예린을 떠올려보았다. 백의의 천사라고 불리는 직업, 간호사를 하는 예린이라.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의외로 잘 어울렸을 것 같네요."
"글쎄요. 저는 상상이 안 됩니다."
"저는 어렸을 때 병원에 오래 있었다고 했잖아요. 간호사 언니들은 전부 다 예쁜 사람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예린 언니도 잘했을 거예요."
예린은 리사의 말이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고 지적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입을 다물었다. 대화 도중에 예린이 말을 삼가는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리사도 더이상 캐묻지 않고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차는 경상도를 벗어나 충청도로 들어섰고, 한참 후에는 경기도를 지나게 되었다.
주말이라 서울로 진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빌라에 도착하자 유진과 마리가 나와 맞이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네 사람은 한석의 집으로 들어갔다. 열쇠 두는 곳을 마리가 알고 있었기에 잠겨 있어도 상관없었다. 예린은 방 안을 살피곤 한석의 부재가 적어도 사흘은 되었다고 단언했다. 네 사람은 차에 올라타고 곧장 선영의 집으로 향했다.
벨을 눌러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리사는 유진에게 열쇠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지만, 유진은 넘버락 도어를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옆에 있던 마리가 번호를 모르냐고 재촉하자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보고 있던 리사가 한숨을 쉬며 예린에게 지시했다. 예린은 키패드 위를 유심히 살피더니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천장의 조명을 가렸다. 얼굴을 키패드에 바싹 대고 한참을 살핀다. 뭘 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해 통 궁금한 유진이 옆에 있는 마리에게 속삭였다.
"지금 뭐 하는 거죠?"
그러나 마리도 전혀 알지 못하기에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잠시 후, 예린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1, 2, 3, 그리고 0."
"네?"
예린의 선글라스 낀 얼굴이 유진 쪽을 향했다.
"자주 눌린 번호가 1,2,3,0 이더군요. 이걸로 뭔가 여기 집주인에게 의미 있는 숫자가 조합되는지 생각해 보세요. 집전화번호라던가 아니면 누군가의 생일이거나...."
그러자 유진의 표정이 환해졌다.
"제 생일이요. 2월 13일."
예린은 0213을 눌렀다. 띠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유진이는 집전화번호로 하고 있는 자기 집 넘버락 번호를 빨리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까지 따고 들어간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들은 어떤 소득도 얻지 못했다. 예린은 방을 둘러보고 이미 오래전부터 방이 비어있었다고 말했다. 어깨를 늘어뜨린 유진을 필두로 그들은 오피스텔 건물을 나왔다. 리사는 유진에게 물었다.
"이분이 어디서 일한다고 했죠?"
"저희 집 가게요... 근데 이미 전화로 물어봤는데 엄마도 어디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대요. 연락이 통 없어서...."
"흐음."
리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같이 도로에 세워 둔 차를 향해 걸어가다가 리사 혼자 걸음을 멈추더니 건물 뒤쪽으로 난 길을 가리켰다.
"저건 어디로 통하는 길이죠?"
"저건 옆 동네로 가는 지름길인데... 어두워서 사람들이 잘 안 다녀요."
유진의 설명을 들은 그녀는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그 길로 쑥 들어갔다. 서울에 올라온 이후 리사와 예린의 딱딱한 태도에서 내내 불편함을 느낀 유진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노란빛을 내는 보안등이 하나 있었고 그 아래에서 리사가 우뚝 선 채로 무언가 들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왜 그러세요?"
"이거..... 혹시 전에 본 적 있나요?"
"네?"
리사가 내민 건 상당히 때가 꼬질꼬질한 검붉은 천이었다. 유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게 뭐냐고 반문하려다가 황급히 그걸 낚아챈다. 그건 원래부터 검붉은 천이 아니었다. 피가 잔뜩 묻고 굳어서 그렇게 된 거였고 원래의 무늬는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이건.... 제가 아저씨한테 사줬던...."
마리와 예린이 뒤따라서 골목에 들어왔다. 리사는 예린에게 바닥에서 주운 비닐을 보여주었다. 예린은 받아든 비닐을 펼쳐서 확인해 보았다.
"세탁소 비닐이군요. 배달한 옷 포장할 때 씌우는..."
예린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유진은 다시 그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몇 군데 찢기긴 했지만, 워낙 커다란 비닐이었던 지라 표면에 인쇄된 글귀를 알아보는데 지장은 없었다.
[신속, 정확, 깨끗!
컴퓨터 세탁, 드라이 크리닝 전문
양 씨 세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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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와 예린은 해결사인 동시에 사냥개 속성도 가지고 있답니다..... 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