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02화 (20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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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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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예전에 숙제하러 놀러 갔던 소란의 집을 기억해냈다. 이 지름길을 따라가면 된다. 선영의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그곳은 시내 변두리에 있는 소규모의 상가건물이었다. 1층 끝자락에 양 씨 세탁소가 있고 거기 2층이 소란이네 집이었다.

"안녕하세요?"

김이 무럭무럭 나오는 다리미를 들고 있던 양 씨가 갑자기 가게로 우르르 들어오는 네 명의 여자를 보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가장 앞에 있는 유진을 알아보고 인사를 받아주었다.

"넌... 우리 딸 친구 맞지? 전에 왔었던...."

"네. 제가 전화도 드렸었는데...."

"그래. 맞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동갑내기를 보고 나니 딸 생각이 더 난 까닭이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소란이라면 지금 집에 없다. 그리고... 언제 들어올지도 모른다."

"어디 갔는데요?"

"그걸 내가 어찌 아누."

양 씨는 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내뱉듯이 대답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하고 있던 유진의 표정도 점점 날카롭게 변했다.

"아저씨."

"바빠 죽겠는데 왜 자꾸 불러싸?"

"잠깐만요. 지금 아저씨 딸이 며칠째 집에도 안 들어오고 연락도 없는데 일이 손에 잡히세요? 게다가 지금은...."

"나는 모른데두!!"

그는 소리를 빽 질러 유진의 말을 끊고 다리던 옷감을 걷어 올려 거칠게 털어냈다. 옷걸이를 하나 가져다가 옷을 걸며 궁시렁거렸다.

"그 년이 배달 갔다가 옷은 어따 팔아먹었는지 소식도 없고.... 그것 때문에 돈 물어주게 생겼는데 그깟 딸년 하나 없어진 게 대수야?"

"하! 이 아저씨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뭐라구? 보자 보자? 이 콩알만 한 녀석이..."

유진의 건방진 말투에 양 씨가 발끈하여 나서려고 하였지만 유진의 우측 뒤에 서 있는 예린의 기세를 보고 다시 움츠러들었다. 양 씨보다도 키가 큰 데다가 어쩐지 이 가게를 꽉 채우는 어떤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예린을 보며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그럼 아저씨는 됐구요, 어머님은요? 소란이 어머님은 계실 거 아니에요?"

"없다. 그 딴 년은 내 알 바 아냐!"

"뭐라구요?"

"예수쟁이들 말하는 거에 정신 팔려서 냅다 집 나간 년이 무슨 놈의 에미야, 에미는. 분명 보나마나 지 딸래미도 델꾸 갔겠지. 그 기도에 미친년이...."

이후로도 유진이 양 씨를 어르고 달래며 말을 붙여 보았지만 장사 방해하지 말고 당장 나가라는 고함만 돌아올 뿐이었다.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뒤를 지키고 서 있는 예린만 아니었다면 주먹이라도 휘둘렀을 테다. 유진이 한숨을 푹푹 쉬며 밖으로 나왔다.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곳, 먼저 가게에서 나갔던 리사가 어떤 꼬맹이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유진이 뭔가 싶어 다가가니 꼬맹이가 유진을 보고 아는 척했다.

"어! 누나 친구다!'

이제 국민학교 3~4학년쯤 되었을까 싶은 남자아이였다. 유진은 그제야 예전에 소란이네 놀러 왔을 때 본 기억이 떠올랐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수혁이였나, 수민이였나.. 암튼 그랬다. 그 아이 앞에 리사가 쭈그리고 앉아 눈을 마주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저기 저 세탁소 장남이라고?"

"네. 누나는 장녀구요, 제가 장남이래요."

"그래. 장하구나. 나는 누나 친구의 친구거든? 혹시 누나 끝으로 본 게 언제야?"

리사의 말투는 봄날의 낮처럼 부드럽고 차분했다. 아이는 전혀 경계하지 않고 쾌히 대답했다.

"음... 그게 두치와 뿌꾸 할 때니까 금요일이요."

"금요일?"

"네. 학교 갔다오니까 누나가 간식 해주고 가게 배달 간다고 나갔거든요. 그다음부터는 못 봤어요."

마리와 유진은 시선을 교환했다. 한석이 보이지 않게 된 시점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 후로는 연락 없고?"

"연락이요?"

"음... 그러니까, 누나 전화라든가 편지... 뭐 그런 거 없었냐구."

"누나 전화는 아니구... 엄마한테 전화 온 적 있어요."

"엄마?"

순간 유진은 방금 양 씨 아저씨가 외치던 말이 떠올랐다. 예수쟁이에게 홀린 에미 어쩌구 저쩌구 했었다.

"엄마가 누나 데리고 있으니까 저희들 보고도 나중에 꼭 오라고 했어요. 아빠 몰래요."

"엄마가? 누나를?"

"네. 근데 아빠 몰래 가는 건 좀 그래서 물어봤더니 막 화를 내셔서 안 가기로 했어요. 나중에 누나 오면 같이 엄마 보러 갈려구요."

"그래. 착하구나. 수혁이라고 했던가? 나중에 또 놀러 올 테니까 그때는 누나랑 다 같이 놀자."

리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어 아이에게 쥐여주었다. 아이는 뛸 듯이 기뻐하며 골목 끝으로 달려갔다. 리사가 허리를 펴고 일어나더니 예린을 불렀다.

"언니."

"네."

"조사 가능하겠죠?"

"아마도요. 하루 안에는..."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유진이 나섰다.

"저기...."

"왜 그러죠, 유진 학생?"

리사와 예린의 시선을 동시에 받게 되자 유진은 다소 움츠러들었지만 자신의 발언을 포기하진 않았다.

"전에 아저씨랑 종로에서 데이트할 때 본 교회가 있어요. 거기에 소란이가 들어가는 것도 봤구요."

리사의 눈이 빛났다. 여태까지 모은 정보 중에서 가장 쓸모있는 정보였다. 리사가 예린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녀는 곧장 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리사는 옆에 멀뚱히 서 있던 마리와 유진의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유진 학생, 그 교회가 어디인지 기억하죠? 안내할 수 있겠어요?"

"그렇긴 한데.... 거긴 왜요?"

"긍까네. 우리 지금 선배님 찾는 거 아닌가?"

뭘 모르는 마리와 유진의 질문에 리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변해주었다.

"오빠는 혼자 없어진 게 아냐. 아마 저 세탁소 딸래미이자 여기 유진 학생의 친구라는 소란 양과 함께 없어진 거라고. 아마도 오빠 성격상 뭔가에 휘말린 거겠지. 평소 착실했다며? 그 학생. 그런 학생이 집에 연락도 없고 소중하게 살피던 동생들에게 직접 연락도 못 할 정도라면 분명 어딘가 따로 빼돌려져 있는 게 분명해."

"그러면 설마 그 교회가....?"

"혹시나 싶긴 하지만 부산에서도 그런 사례가 종종 있었지. 종교든 피라미드든... 일단은 사람을 붙들어 놓고 믿게 하는 게 중요하니까. 사람 장사, 그게 가장 큰 장사거든."

"사람 장사?"

유진은 그 말이 굉장히 낯설게 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다. 그러나 리사는 조합을 너무도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타이밍을 놓친 유진은 따로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시키는 대로 조수석에 올라탔다. 예린에게 방향을 알려주며 길 안내를 했다. 차가 출발하여 시내 쪽을 향한다.

"그런데, 유진 학생?"

차가 달리고 있는데 유진의 등 뒤에서 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올라온 이후, 아까 어린아이와 이야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차가웠던 리사의 말투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아까.... 데이트라고 하지 않았었나요? 응?"

".....그런데요?"

유진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뜨끔한 기색을 감추고 최대한 당당하게 답했다. 등 뒤라서 리사의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생긋"거리며 웃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종로에서 대체 뭘 했기에 데이트라고 하는 거죠?"

"아저씨랑 단둘이서 영화보고, 쇼핑도 하고, 밥 먹고... 그랬어요. 왜요?"

"아아, 난 또 뭐라고."

리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심드렁한 그녀의 반응에 유진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 건 왜 묻죠? 남이야 데이트를 하든 말든...."

"뭐, 그거야 저도 데이트를 했었으니까 말이죠. 오빠랑... 근데 일단 유진 학생이 한 건 데이트가 아닌 것 같은데요?"

"뭐라구요?"

"유진이 학생이 한 건, 음... 뭐랄까. 그래요. 그건 그냥 애보기죠. 데이트가 아니라."

"이봐요!"

유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유진의 예상대로 리사는 생긋거리며 웃고 있었다. 어쩐지 저런 표정이 익숙하면서도 기분이 나빴다. 유진은 화내고 싶은 걸 꾹 참고 물어보았다.

"남자랑 여자가 만나서 영화보고 밥 먹은 게 데이트가 아니면 뭔데요?"

"으음."

리사는 고개를 가만히 저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한다.

"남자랑. 여자랑. 그리고. 밤까지 있어야, 아니.. 함께 아침을 맞이해야 그게 진짜 데이트죠."

그게 뭘 뜻하는지 알고 있는 유진은 기가 막혔다.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유진은 소리를 빽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전에 예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했습니다."

차가 멈췄다. 모두 창밖을 내다보았다. 길 건너편에 거대한 교회가 있었다. 입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재림예수대비말세찬양교회.』

다 같이 그걸 보고 있는데 마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말세를 찬양한다꼬? 진짜 말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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