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07화 (207/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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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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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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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 다가온 거나 철창을 살피는 행동에서 알아차린 걸까? 그렇지만 예린이 그녀 앞에서 선보인 행동은 무척 제한적이었다. 겨우 그것만 보고도 철창 안의 여자는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속해있는 분인가요?"

예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다시 물었다.

"한석 씨가.... 어떤 세력의 비호라도 받고 있는 모양이죠?"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요. 빨리 데리고 나가세요.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팔과 다리에 각각 골절이 있어요. 전체적으로 많이 맞기도 했고 무엇보다 머리의 출혈이 잘 멎지 않아요. 급하게 일단 뼈를 바로 잡아 두긴 했지만, 의사에게 빨리 보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부목도 필요하구요."

예린이 보기에 그렇게 말하는 그쪽도 보통은 아닌 듯했다. 이윽고 자물쇠가 풀리고 철창문이 열렸다. 예린은 한석의 곁으로 가서 맥을 짚어보았다. 숨은 쉬고 있지만, 맥박이 불규칙했다. 몸 이곳저곳의 상태 역시 심각했다. 예린은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자기만큼 아파할 사람을 떠올렸다.

'이건 구해가도 리사에게 욕을 잔뜩 먹겠군...'

예린은 내심 혀를 찼다. 한석의 팔을 들어 자신의 어깨로 받쳐 든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돕는다. 예린은 그녀에게 권했다.

"함께 나가시죠."

그러자 여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남겠습니다. 무엇보다 잡아야 할 놈이 있고... 그리고 구해야 할 아이가 있죠. 같이 나가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기회를 놓칠 것 같군요. 그러니 부디 이 사람을 무사히...."

여자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징벌실 안이 조금 밝아졌다.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실루엣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던 서로의 얼굴을 지척에서 확인하게 된다. 빛이 얼굴에 닿는 순간, 두 사람은 비명 아닌 비명을 내고 말았다.

"앗... 너...너는...!"

"당신은.....으음...."

예린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어떤 싸움에 있어서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 그녀였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자기도 모르게 그러고 말았다. 2년 전, 리사가 열심히 끈을 대던 부산지검에 갓 부임했던 햇병아리 검사. 이름이 뭐였더라. 꽃 이름이었는데.... 예린은 언뜻 생각나지 않아 주저하고 있는데 그쪽은 이미 예린의 이름을 떠올린 모양이다.

"성예린. 김리사의 전속 부하....네가 여기에 어쩐 일이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송화의 말투가 바뀌었다. 예의 바른 그녀지만 여태까지 "깡패 새끼"들에게 좋게 말한 적이 없다. 허스키한 목소리를 들으며 예린의 기억이 잊고 있던 이름을 떠올랐다. 그래, 맞다. 채송화였다. 그러나 꽃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녀는 결코 꽃처럼 유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강직하기 이를 데 없어서 부산지검의 다른 검사들은 거의 다 포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만큼은 그게 되질 않았다. 돈이 먹히지 않는 건 물론이요, 여자 검사이다 보니 향응을 제공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리사가 그녀의 가족 관계를 직접 조사하여 부모님의 집까지 알아내 후한 선물을 보냈지만, 송화는 그걸 짊어지고 와서 리사 앞에 내동댕이치고 돌아간 적도 있을 정도다.

"채 검사님이야말로 여긴 어쩐 일입니까. 설마 이 교회의 신도는 아니시겠고."

예린으로서는 몹시 드물게 다소 비꼬는 투를 담아 이야기해 보지만 먹힐 상대가 아니다. 송화는 팔짱을 끼고 예린의 어깨에 기대어 서 있는 한석을 턱으로 가리킨다.

"내가 먼저 물었어. 그렇다면 저 자식도 백당의 똘마니냐?"

여지없이 취조하는 말투로군. 예린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어쩐지 대답을 하고 만다.

"아닙니다."

"그래. 아니겠지. 똘마니 정도일 리가 없어. 무려 성예린이 직접 나서서 문을 따고 들어와 데려갈 정도의 인물이라면... 김 회장의 숨겨진 자식이나 리사의 남편이라도 된단 말이야?"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리사의 애인쯤 되는가 보군."

"........."

예린은 부정을 하지 않은 자기 자신을 저주했다. 그녀는 말수가 적은 편이라 긍정의 뜻으로 주로 침묵하는 편이다. 그런 말버릇이 이럴 때는 참 좋지 않다. 송화의 표정이 상당히 일그러졌다. 그녀도 한석에게 꽤 마음을 기울이고 있던 터라 마음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는 걸 예린으로서는 알지 못했다. 한참 말이 없던 송화는 손을 내저었다.

"조심해서 데리고 나가."

고작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그게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송화로서는 리사든 예린이든 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불법적인 일을 드러내놓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잡아넣을 명분이 부족했다. 게다가 이미 오래전부터 지역을 기반으로 탄탄하게 다져진 인적 네트워크는 백당에 대한 수사 같은 건 엄두도 나지 않게 만들었다. 그들과 관련 있는 곳에 대한 내사를 시작하기라도 하면 윗선에서 먼저 반대하거나 막아서는 게 보통이었다.

게다가 당시 부산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바텐더에 대해 수집한 그녀의 자료 중 상당 부분도 백당에 흘러들어 갔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송화는 바텐더의 은신에 백당이 기여를 했다고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몹시 미워하게 되었지만, 이 역시 증거가 부족했다. 심증은 가득했지만, 물증이 없었다.

예린이 한석을 업는 것을 도우며 혀를 찼다. 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처지에 넌더리를 냈다. 잠입수사는 정말 괜한 짓인 모양이다. 다음부터는 그냥 수사관들이 잡아온 놈들이나 취조하고 말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검사님은 여기서 괜찮으시겠습니까?"

철창을 나가기 직전 예린이 그녀에게 물었다. 송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살짝 뻐기는 말투로 대답했다.

"네놈들이 숨겨놓은 바텐더가 여기 있다는 거, 다 알고 들어왔어. 내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고. 그 새끼를 잡아 족쳐 보일 테니 기대하라고."

송화는 이런 말을 하면 예린이 당황하거나 최소한 움찔거릴 줄 알았다. 그러나 예린의 반응은 송화가 예상한 것과 달랐다. 예린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의견에 긍정했다.

"역시 그놈은 바텐더가 맞았군요. 들어오다가 우연히 봤습니다. 살아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얼굴이 많이 상했기에... 긴가민가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번에 잡으면 꼭 처단해주시길."

송화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추측은 뭔가 어긋난다. 아까 낮에 본 바텐더와 원 목사의 밀접한 관계를 떠올려 본다. 정말 그녀의 의심대로 백당이 바텐더와 연관이 있고, 바텐더가 교회에 선이 닿아있다면 예린이 이렇게 몰래 들어와 한석을 구해갈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녀는 늘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 판단에 오류가 있다는 의심이 들 때는 가차 없이 수정을 가하기도 한다. 송화는 한 손을 들어 예린의 앞을 막았다.

"잠깐 기다려. 그렇다면 너희는 바텐더와 관계가 없단 말이야?"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리사 아가씨는 놈을 잡아 없애려고 노력했으니까요."

"없애다니."

"놈이 저희 지역에 끼친 피해를 생각한다면.... 그런 처분이 없는 게 이상하지요."

송화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너희 나름대로 펼치는 애향심이라는 건가? 아니면 나와바리 관리?"

"좋을 대로 생각해 주십시요."

"근데 그놈이 여기에 있다는 건... 어떻게 된 거야. 놓친 거야?"

예린은 대답을 주저했다. 자신들의 내분에 대해 드러내도 좋은 걸까. 송화는 분명히 부외자인 동시에 자신들의 활동에 있어서 가장 큰 제약을 가할 수 있는 사람 중에 하나다. 그런 그녀에게 말해도 되려나. 예린이 대답을 못 하고 있으니 송화가 혼자서 판단을 내렸다.

"놓쳤군. 어찌 되었든 좋아. 그놈이 비록 나쁜 놈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사로운 처벌은 용납할 수 없어. 바텐더를 반드시 잡아 법의 심판을 받게 만들 테니 그렇게 알아둬."

"모쪼록 그래 주시길..."

송화에게 고개를 숙이던 예린은 순간적으로 몸을 경직시켰다.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나는 바람에 너무 놀라서였을까. 송화와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주변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 이미 징벌실 문 너머에 인기척이 여럿 느껴진다. 한 놈... 두 놈....세 놈.... 적어도 네놈 이상이다. 예린은 속으로 혀를 찼다. 업고 있던 한석을 한쪽 벽에 기대어 앉게 한다.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가 안쓰러웠지만, 그렇다고 그를 업고 싸울 수는 없다. 예린의 동작에서 무언가를 읽었는지 송화도 철창에서 나왔다. 예린은 송화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고 이르고는 문 옆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송화는 커다란 고양이를 연상했다. 발걸음 소리는 물론 움직이는 기척조차 지워버리는 예린의 동작에서 범상치 않은 실력을 읽어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예린이 문 옆에 몸을 숙이고 있으려니 이윽고 문이 열린다.

"웬 놈이.....으악!"

징벌실 안으로 들어서던 한 놈은 예린이 휘두른 단도에 목을 베였다.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쓰러진 앞사람의 비극을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뒤에 있는 놈의 눈깔에도 칼날을 꽂는다.

"끄아아아아악!!!"

송화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비록 나쁜 놈들이긴 하지만 예린의 손에는 자비가 일절 없었다. 예린의 날랜 손놀림은 결코 쉬지 않았다. 철저하게 망가진 한석의 상태를 보고 분노한 탓이다. 물론 수적으로 밀리는 입장에서 철저하게 상대를 밟아 덤비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예린은 지금 몹시 화가 나 있었다. 그녀의 육식동물 같은 움직임이 어둠 속에서 무용을 뽐낸다. 달빛만이 흘러들어오고 있는 어두운 방 안에서 피 냄새가 진동을 한다. 세 놈이 그렇게 순식간에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끄악.. .내 눈!! 내 눈!!! 으아아악!!"

목을 베인 놈은 절명했지만, 눈을 찔린 놈은 그렇지 않았다. 깊게 찔리지 않은 탓이다. 예린의 실수가 아니었다. 일부러 노렸다. 패닉에 빠진 놈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방향을 못 찾고 허우적대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남은 놈들은 함부로 이 방에 들어올 생각을 못 하게 되었다. 예린은 밖에 있는 적들이 주저하는 기색을 확인하고는 재빠르게 송화에게 돌아갔다.

"한석 씨를 부축해주세요.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난 바텐더를 잡아야 돼. 여기 있겠어."

"그러면 한석 씨를 모시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송화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예린이 거듭 재촉하지는 않았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한석의 모양새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너희 백당은 나한테 빚진 거야. 행여라도 내가 여기서 바텐더를 못 잡으면 나중에라도 너희가 바텐더를 잡아서 내 앞에 데려다 놔. 안 그러면 니들을 대신 잡아넣겠어."

"좋습니다. 리사 아가씨께 그대로 말씀 전해드리지요."

상황을 보고 있던 예린이 징벌실 입구의 나무 문을 잡아 뜯었다. 우악스러운 그녀의 힘에 감탄할 새도 없이 송화는 허둥지둥 한석을 부축했다. 그의 왼쪽 발목이 여의치 않다는 걸 기억해낸다. 그쪽에 서서 한석을 힘겹게 들어올려 부축했다. 신음을 흘리고 있는 그의 사정을 보아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비록 키가 많이 차이 났지만 어떻게든 일으켜 세워 함께 선다.

"갑니다!"

예린은 문짝을 들고 고대 전쟁의 실드맨처럼 혹은 미식축구의 최전방 공격수처럼 문을 방패 삼아 강력하게 밀고 나간다. 예상치 못한 돌진에 허를 찔린 상대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한석을 부축한 송화가 뒤따라 나왔다.

"이쪽으로! 빨리!"

문짝을 용케 피한 놈을 향해 발길질을 날리며 예린이 외쳤다.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외침과는 달리 송화의 속도는 좀처럼 나질 않는다. 자기 키보다 큰 남자를 부축해서 끌고 가는 건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마른기침을 해대며 다리를 느리게 움직이는 걸로 보아 정신은 차린 모양이지만 이미 다리 한쪽을 쓰기 곤란한 한석인지라 빠르게 달릴 수가 없었다.

"한석 씨! 정신 차려요! 한석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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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요즘 개인적으로 바빠 업데이트가 늦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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