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08화 (208/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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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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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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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가 연신 한석의 이름을 부르며 애써보지만 그들의 등 뒤에 붙는 인원은 점점 불어나갔다. 그나마 좁은 복도여서 예린의 무용에 힘입어 접근을 차단하고는 있는 게 고작이다.

"쿨럭...쿨럭... 이게 또 무슨 난리예요... 사람... 잘 자고 있는데..."

"이 와중에 자요?! 내가 미쳐!"

간신히 흘러나온 한석의 목소리에 송화가 반가움을 표했다. 말은 거칠게 했지만, 목소리에 기쁨이 묻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한석은 주변을 살피다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뒤에 .... 예린 씨?"

"그래요. 리사가 보냈다는군요. 빨리 이 엿 같은 교회를 벗어나자구요. 힘을 좀 내봐요!"

"쿨럭...쿨럭... 으윽.. 발이...."

"왼발 안 좋은 거 알고 있어요. 그러니 나한테 기대서...."

"하아. 이거 면목없네요. 이렇게 폐를 끼쳐서야...."

뒤에서 들려오는 악다구니와 소란 속에서도 한석은 태연하게 말을 꺼내고 있었다. 송화는 조바심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신경 굵은 한석은 농담까지 하고 있었다.

"바람 핀 거... 리사한테 들키면 혼나려나...."

송화는 얼굴이 빨개졌다. 어둠 속이라 가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 리사의 연인이 맞다면, 자신이 리사에게 미안한 꼴이 된다. 강제로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다고는 하나 어찌 되었던 지금 송화는 한석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 말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지레 혼자 설레서 더욱 그렇다.

"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송화는 정말 궁금해졌다. 이 남자는 대체 간덩이가 부은 건지 아니면 원래 사태파악이 잘 안 되는 건지 말이다. 한석은 송화의 말은 신경도 쓰지 않고 중얼거렸다.

"리사가.... 쿨하긴... 한데요... 은근히 뒤끝은 또 있어 가지구요.....송화 씨 이야기는 ... 비밀로 할게요...."

송화는 조금 뜨끔했다. 역시 그녀의 짐작이 맞았다. 그녀가 지금 부축하고 있는 남자는 분명 리사의 남자가 맞다. 부산 지하경제를 쥐락펴락 하고 있는 백당 김 회장의 장녀. 김리사. 송화가 부산지검에 처음으로 배치를 받고 근무를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나간 술자리는 다름 아닌 리사가 마련한 자리였다.

"조폭이 사는 술을 마신다구요? 선배들은 제정신이에요?"

자리를 박차고 나온 송화를 따라 나온 선배를 향해 그녀는 소리를 질러댔다. 기수 따지기를 하늘같이 여기는 검찰 조직에서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그녀가 워낙 열이 받았기 때문에 눈에 뵈는 게 없는 참이었다. 선배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타이르듯이 말했다.

"다 좋은 게 좋은 거야.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거지만 이쪽에서 원활하게 일을 하려면 이런 유대는 필수야. 네가 부산 바닥이 돌아가는 모양을 제대로 읽고 싶다면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알아둬."

"아는 건 조사하면 다 나오는 거죠. 꼭 이렇게 술자리에서 나란히 앉아 놈들이 찔러주는 봉투를 받아 챙겨야 아는 건 아니잖아요."

"네가 사회를 알면 얼마나 알고, 조직을 겪었으면 얼마나 겪었어? 정 돌아가고 싶다면 돌아가라. 저기 앉아계시는 부장 검사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다면 말야."

송화는 어쩔 수 없이 분을 삭이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생긋 웃는 얼굴로 부장 검사와 나란히 앉아 술을 기울이고 있는 리사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저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진면목을 언젠가는 밝혀내리라 다짐을 했다. 리사의 뒤에 마치 한 고조의 뒤를 지키는 번쾌처럼 버티고 서 있는 예린의 모습도 눈에 담아두었다. 그랬던 그녀인데... 지금 예린이 길을 뚫고 있는 가운데 리사의 남자가 분명한 놈을 부축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쓸데없는 소리 할 기운 있으면 좀 더 걸어봐요! 출구가 바로 저기란 말이에요!"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도록 더 크게 소리를 질러 한석을 재촉한다. 그러나, 아뿔싸.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오니 이미 그곳에는 바텐더를 위시하여 한 몸짓 하는 녀석들이 도열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바텐더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샘플이 제 발로 걸어나갈 리는 없고.... 아니, 이게 누구야. 부산의 그 무시무시한 예린 씨 아닌가. 여기까지는 어인 행차지?"

예린도 송화의 곁으로 와 섰다. 손에 들린 단도는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가만히 들어 올리자 주위의 자들이 움찔하여 제대로 덤비질 못한다. 그 상태에서 주변을 스윽 둘러본다. 이미 포위망은 완성되어 있었고 그들이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출구가 바로 저기인데도 거기까지 가도록 이들이 결코 놔두지 않을 것이다. 예린은 바텐더를 째려보며 외쳤다.

"지은 죄가 많아서 말야. 기도 좀 하러 왔는데 어째 반응이 좀 거칠군."

"암... 많으시겠지. 나처럼 선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니까 그렇게 벌을 받는 거라고. 송 부장님 아니었으면... 어휴. 아주 그냥 큰일 날 뻔 했지. 허허허."

"네가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송 부장이 살려준 건가?"

"글쎄에."

"지금도 송 부장에게 계속 약을 공급한 건가?"

"내가 그거에 꼭 대답을 해야 돼?"

"오랜만에 만났는데 즐겁게 대화라도 해보자구. 이리 와, 바텐더."

예린은 칼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을 까닥거리며 도발해 보았지만, 바텐더는 빙긋 웃으며 도리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년을 생포해. 하도 뻣뻣한 년이라 약 빨고 나면 어떤 노래를 부를지 기대되는군. 나머지 두 연놈은 어차피 약에 쩔은 놈들이니까 대충 버리도록 하고."

열댓 명의 인원이 바텐더의 손짓에 따라 와하고 함성을 지르며 동시에 덮쳐들었다. 송화는 어떤 놈에게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갔고 한석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나마 예린이 칼을 휘두르며 몸을 보호하고 있기에 다들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부아아아앙-

교회 정문에서 이쪽을 향해 한 검은 승용차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문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제지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차가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켜고 곧장 이쪽을 향해 달려든다. 다들 손바닥을 들어 눈부심을 가리고자 할 때, 예린은 가만히 눈을 감고 주변에 있는 두 놈의 허벅지를 베어버렸다. 비명소리와 조금 전 보았던 광경을 머릿속에 담고 예린은 그대로 몸을 날렸다.

끼이이이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정지했으나 달려오던 기세가 있어 승용차는 그대로 교회 정문의 유리문을 박살 낸다. 혼비백산한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동안 예린은 한석을 찾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그가 있었다. 송화가 한 놈에게 붙들려 있었고 그런 그녀를 붙잡고 있는 상대에게 한석이 덤벼들고 있었다.

"꺄아아악! 이거 놔!!"

송화의 비명에 뒤이어 한석이 고함을 질렀다.

"놔 줘!"

조금 전까지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던 한석이었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송화를 붙들고 있는 놈의 팔뚝에 한사코 매달린다. 그리고 입을 벌려 팔뚝을 크게 물었다.

"으아아악! 이 미친놈이!!"

송화를 붙들고 있던 놈은 비명을 지르며 한석을 밀어냈다. 덕분에 송화가 떨쳐 나와 승용차 쪽으로 밀려났다. 승용차의 바퀴가 역회전하기 시작했다. 예린은 자동차를 향해 뛰어가며 송화의 목덜미를 낚아챈다. 송화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한석이는!!"

"일단 여길 빠져나갑니다!!"

한석은 머리통과 등을 두들겨 맞고 있으면서도 물고 있는 것을 놓지 않았다. 물린 놈과 한데 엉켜 뒹구느라 차에서 도리어 멀어져 가고 있었다. 예린은 그를 구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나마 그녀가 차로 가는 최단거리상에 송화가 있기에 그녀를 끌고 가서 열려있는 차창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덤비려는 놈을 향해 발길질을 날리며 외쳤다.

"리사! 차 빼!"

아마도 브레이크를 밟은 채로 엔진을 가속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바닥과 마찰을 일으키며 공회전을 하고 있던 바퀴가 튀어 나가듯이 차를 뒤로 밀어낸다. 예린은 그대로 뛰어가서 차의 지붕에 올라탔다. 송화의 상반신이 조수석 창문에 쑤셔 박혀 있고 예린을 지붕에 태운 채로 차가 교회를 빠져나갔다. 아까 차가 달려들기 직전에 현관 옆 복도로 몸을 피해있던 바텐더는 주변의 비교적 멀쩡한 놈들을 향해 외쳤다.

"쫓아!"

졸개들이 허둥지둥 달려가는 걸 보며 그는 혀를 찼다. 이제 여기 오래 있기도 글렀다고 생각했다. 마치 전쟁이라도 치른 듯 엉망이 되어버린 교회 현관을 돌아보며 빠르게 눈을 굴렸다. 그러다 바닥에 마치 피에 젖은 걸레처럼 널브러진 한석을 발견했다. 바텐더의 명석한 두뇌가 빠르게 돌아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때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예린이 여기까지 나타났다. 그녀는 애써 두 사람을 보호하여 데리고 나가려고 했었다. 비록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한 년 만 실어가고 한 놈은 두고 갔다. 바텐더는 생각했다. 이 한 놈을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옆에 있는 녀석에게 지시했다.

"저놈을 실험실로 끌고 가. 써볼 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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