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11화 (21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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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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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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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시라?"

"....몸매도...좋....고....."

"으아아아악!!"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껄껄 웃는 원 목사와 달리 바텐더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들어 한석의 뺨이라도 쳐볼까 했지만, 괜히 외부자극을 주어 실험에 오류가 생기도록 할 필요는 없었다. 씩씩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데 꺼져가는 목소리로 들려오는 한석의 말에서 뭔가를 캐치해낸다.

"...리사느....는...처녀...였어....나에게... 하루...동안...연인이...."

바텐더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뭐냐. 그러면 네가 리사랑 잤다는 거냐?"

".....내...방....침대....에서....."

"뭐라고? 으하하하하. 리사랑 잤다고?"

그제야 허리를 펴고 껄껄 웃는 그를 보며 원 목사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뭐가 그리 웃기신가요?"

"하하하. 아아, 그게 말입니다. 역시 제가 제대로 된 놈을 주워왔군요."

한석은 리사와 있었던 놀이동산의 일을 두서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그 모습을 힐끔거리며 바텐더가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예전에 부산에 잠시 있을 때 보았던 아주 귀여운 아가씨가 있거든요. 아주 그냥 톡 쏘고 앙칼진 면모가 귀엽기도 하거니와 마치 공주처럼 대접받고 있기에 무너뜨리고 싶은 욕구가 물씬 들게 하는, 아주 그런 핫한 아가씨였는데 이놈이 이미 따먹은 모양이군요. 푸하하."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죠. 흐음. 그래서 무려 예린이 들어와서 그 난리를 친 모양입니다. 하하하. 이거 생각보다 대어를 낚았군요."

"아! 안 그래도 아까 교회에서의 소란에 대해서..."

원 목사가 항의를 하려 하자 바텐더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목사님. 미리 조언을 하는데 빨리 여길 뜨시는 게 좋겠습니다. 리사 고년은 제가 부산 지역에 풀었던 약이 마음에 안 든다고 절 잡아 죽이려던 년입니다. 어제 쳐들어왔던 예린이라는 년는 그년의 그림자나 마찬가지구요. 간신히 협상을 거쳐서 죽은 걸로 치고 그 마수를 벗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그렇게 물러났으니 아마 조만간 여기를 대대적으로 치고도 남을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원 목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들이... 이 성전에....감히 어떻게?"

"기도를 열심히 올려서 막을 수 있으면 예배당에서 기도만 하고 계시던가요. 불신자인 전 장비를 챙겨 여길 뜨겠습니다. 일단은 기도원에 가 있어 보고 사태를 좀 지켜보시죠."

원 목사는 자신이 하늘에 드리는 기도의 힘을 과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폭이 쳐들어온다는데 그걸 신이 막아주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바텐더에게 감사를 표하고 서둘러 실험실을 떠났다. 바텐더 역시 인터폰으로 하수인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연구결과와 약품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방을 떠나기 직전 아직도 리사와의 추억에 대해 더듬거리며 늘어놓고 있는 한석의 뺨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이것도 챙길까?"

한석은 대답이 없었다. 바텐더는 수하를 불러 한석을 차에 실으라고 명령했다. 짐 덩어리로 취급된 한석은 바텐더의 각종 물건들과 함께 트럭에 실렸다. 바텐더는 원 목사에게 따로 인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교회를 떠났다. 바텐더가 떠나고 불과 세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교회는 뜻밖의 방문객을 맞이하게 된다.

싸이렌 소리가 요란하다. 송화는 옆에 있는 수사관에게 일러 경광등을 모두 끄도록 했다. 이내 소리는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회전하는 붉은 불빛들이 어지러이 흩어진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이 지금처럼 생각나는 때가 없다. 한숨을 내쉰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때 송화에 품 안에 있는 휴대전화의 벨이 울렸다. 받아드니 아는 목소리였다.

"리사입니다."

"........어쩐 일이야."

어떻게 번호를 알았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녀의 부모님 댁에 값비싼 한우세트와 돈 봉투를 보냈던 전력이 있는 리사라면 자기 개인 전화번호 정도는 쉽게 손에 넣고도 남을 인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송화는 리사의 전화를 받는 게 참 곤욕이었다. 리사에게 무어라 말할 면목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냥요."

"참나...."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리사의 말투가 더 얄밉다. 차라리 자기보고 헛수고했다고 말하거나 자신을 비난한다면 맞서서 고함이라도 쳐볼 텐데 이렇게 나와버리니 그도 여의치 않다. 리사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종로 피카디리 앞에 시노벨이라는 카페가 있어요. 할 일도 없고 심심하기도 해서 여기서 잡지책 보고 있는데... 커피가 맛있네요. 그래서 검사님 생각이 나서 전화드렸어요."

"내가 종로에 차 막힐 테니 오지 말라고 했잖아."

"버스 타고 왔는 걸요?"

단 1mm도 밀리지 않는 리사의 말솜씨에 송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사는 "할 일도 없고"에 묘한 강세를 두어 말했다. 송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누군가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알았어. 내가 그쪽으로 가지. 일단 여기 처리 좀 하고."

"네. 기다릴게요."

종료 버튼을 눌러 통화는 끝낸다.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사람을 제지하는 수사관을 불러 길을 열도록 한다. 검은 옷을 두르고 안광을 형형하게 뿜어내는 김 권사가 송화의 앞에 와 섰다.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송화의 귀를 후벼판다.

"당신이 책임자라면서요?"

"그렇습니다."

"어디서 많이 뵌 분 같군요.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저도 아주 역겨운 기억은 날 것 같은데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군요."

모를 리 없는데도 전혀 모르는 사람 대하듯 하는 두 사람이 그렇게 맞서서 눈빛을 충돌시킨다. 김 권사는 사방에 퍼져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경찰차와 전경 버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책임자라고 하시니 여쭙겠습니다. 귀하께서는 저희 교단의 성스러운 영역에 무단으로 침입하셨는데 대체 무슨 이유에서죠?"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낯을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송화가 대답했다.

"한 용감하고 정의로운 시민이 목숨을 걸고 전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에서 불법행위가 이뤄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제보가 들어왔거든요. 귀 교단의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침범할 생각은 아니지만, 고통받는 국민들이 있는데 공권력이 그걸 모른 체할 수는 있나요."

"하!"

김 권사는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요. 들어와서 그렇게 들쑤셔 보니 불법행위가 있던가요? 정말로 있던가요? 참되고 복된 신앙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성령에 몸을 맡긴 순수한 신도들 말고, 또 뭐가 있던가요!"

"......"

"당신들이 우리의 신앙을 모독하고 구둣발로 짓밟아도 될 만큼 이곳이 호락호락한 줄 아십니까? 교단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라도 당신이 저지른 이 무도한 일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고 말겠습니다. 아무 죄 없는 선량한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막 대해도 될 만큼! 이 세계가 썩고 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히군요! 이런 세계를 위해서 우리가 그토록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니요!"

김 권사의 적반하장격인 언사를 참아내 가며 송화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역시 아침에 바로 쳤어야 한다. 몹시 후회했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예린에게 구출되고 나서 리사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돌아온 후 경찰병력 출동을 위한 절차를 밟는 동안 놈들의 발자취는 깨끗이 지워졌다. 거의 수사방해라고도 할 만한 윗선에서의 싫은 소리와 부당한 지시를 모두 떨쳐내고 거의 그녀 독단으로 결정하다시피 한 투입이었다. 그나마 가장 빠른 시간에 치고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회에는 어떤 불법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텐더의 실험실이나 약은 물론 그에 관련된 모든 사람이 사라졌다. 심지어 어젯밤 예린과 극렬하게 싸웠던 조직원들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다. 소기의 성과는커녕 일말의 의혹도 캐내지 못한 작금의 상황은 수색영장도 갖춰오지 못한 송화에게 있어 최대의 위기였다. 김 권사의 힐난은 이어졌다.

"독재정권에도 종교시설은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대체 뭐라고 신성한 종교의 자유를 침범할 생...."

더는 못 참겠다. 지끈거리는 머리는 송화로 하여금 분노를 제어하기 어렵게 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김 권사의 멱살을 와락 움켜쥐며 소리쳤다.

"자유! 그래, 니들 자유! 맘껏 보장해줄 테니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봐. 단! 니들이 말하는 그 종교의 자유로 인해 희생당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그때는 너희 모두 아작을 내줄테니! 명심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외쳐보지만, 송화는 가슴 한켠이 무거웠다. 자기가 정말 법대로 집행하여 자기 말대로 할 수 있을까.

"......놓으시죠."

멱살을 잡힌 상태에서도 김 권사는 차분했다. 주변의 수사관들이 송화를 한사코 뜯어말렸다. 불법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덮친다고 이만한 수사력을 집중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게 무위가 되었다. 송화가 직접 잠입까지 해서 증거를 수집하겠다고 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녀의 헛된 공염불 주장이 되고 만다. 송화는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통한의 외침이었다.

"모두 철수한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주변과는 달리 송화와 김 권사는 그 후에도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눈싸움은 한치의 밀림도 없이 팽팽하게 이루어졌다. 다른 이들이 모두 떠나고 직속 부하가 그녀에게 함께 떠나기를 종용할 때까지 송화는 그렇게 서 있었다. 부하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차에 올라탄 그녀는 차창을 통해 김 권사를 바라보았다. 장승처럼 땅에 못 박힌 듯 꼿꼿이 선 그녀의 표정에는 승자의 여유가 가득했다. 이를 갈며 주먹으로 시트를 내려치던 송화는 부하에게 지시했다.

"나는 피카디리 앞에서 세워줘. 만날 사람이 있어."

"네? 바로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부장님이 아마도 기다...."

"부장이고 나발이고! 일단 날 내려줘. 청에는 내가 알아서 돌아간다."

"아, 예..."

운전을 하고 있던 수사관은 송화의 눈치를 살폈다. 송화가 평소에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열혈 검사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잠입수사를 하고 돌아온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더 거칠어져 있었다. 오늘의 출동도 그녀의 독단과 아집이 이끌어낸 무리한 수사였다. 게다가 수확까지 없으니 이제 그녀가 돌아가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시말서를 쓰는 일이 될 테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그래."

차에서 내린 송화는 리사가 말한 카페를 찾았다. 길가에 있는 가게라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안쪽 자리에 앉아있는 리사가 보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송화가 자리로 다가가자 리사와 일행이 이쪽을 본다.

"어머, 오셨군요?"

"아, 안녕하세요오...."

송화는 인상을 찌푸렸다. 리사와는 할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 낯선 아이와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잡지책을 덮고 있는 리사를 향해 턱짓으로 옆에 있는 일행을 가리켰다.

"그 애는 누구야?"

"저... 애... 아닌데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하는 목소리인지라 송화가 알아듣기에는 퍽 쉽지 않았다. 그나마 이쪽을 보면서 이야기하긴 하지만 시선은 꼼지락거리는 손에 내려가 있었다. 리사가 웃으며 일행을 소개했다.

"여긴 제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닥터 윤, 윤가희 씨라고 해요. 생긴 건 이래도 저보다 언니랍니다."

"뭐?"

"올해로... 스물 여섯이구요.... 그리고 의학박사고..."

순간적으로 송화는 자기 눈과 귀를 의심했다. 끽해야 리사의 막내동생이나 조카뻘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얼굴로? 하아. 리사. 나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야."

"알고 있어요. 그리고 농담도 아니구요. 이 분은 채 검사님께 빌려드리려고 모시고 온 거예요."

"빌려줘?"

역시... 사람 장사를 하는 백당의 실권자다운 소리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빌려주다니. 꽤 심한 망발 같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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