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17화 (217/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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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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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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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아악-

양동이에 담긴 물이 단번에 뿌려진다. 그것을 흠뻑 뒤집어쓴 병구는 몸을 꿈틀거려 보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단단히 결박시키고 있는 밧줄이 풀리지는 않았다. 그저 의자가 몇 번 들썩이고 말았을 뿐이다.

"목이 많이 마르시면 더 드릴 수도 있어요."

건조한 말투가 들리는 방향으로 병구의 시선이 향한다. 맞아서 부풀어 오른 눈덩이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뜨는 건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간신히 시력을 집중시킨다. 푸른 조명 아래에서 더 새하얗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리사를 향해 그는 살짝 웃었다. 아니, 비웃었다.

"네 아비는... 목이 마르진 않을 게야. 영원히 말이지."

그러나 리사의 표정은 아까부터 심하게 굳은 채로 전혀 변하지 않았다. 마치 무기질로 된 물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의 얼굴은 딱딱해져 있었다. 오로지 입과 주변의 근육만 움직이는 게 기이할 정도다.

"수장시켰다는 말인가요?"

"뭐, 바닷물도 물이니까 말야. 마시기 좀 짜서 그렇지."

병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야구방망이 하나가 그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병구의 몸이 약 반 미터 가량 떴다가 의자와 함께 뒤로 나뒹굴었다. 리사가 방망이를 들고 씩씩거리고 있는 예린을 돌아보며 질책했다.

"언니! 좀 가만히 있어봐요. 그렇게 감정적으로 움직이지 말구요."

태호가 얼른 달려가 병구의 의자를 도로 세워놓았다. 병구를 살펴보더니 다시 물을 뿌린다. 바로 깨어나질 않는다. 이번에 깨어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예린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리사를 향해 말했다.

"리사... 넌 어떻게 이 상황에서도 그럴 수 있어. 아버님이... 아버님이..... 그렇게 되셨는데...."

리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병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답이 없는 그녀를 향해 예린이 악을 썼다.

"우리를 키워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그분의....시신도 지금 찾을 수 없는데 넌 어떻게 그러니. 네가 아무리 의연한 아이라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같은 경우에도 어떻게...."

"언니."

"게다가 송화의 연락을 받고도... 넌 어떻게... 그냥 있을 수 있지? 정말... 네가 좋아하던 사람 아니었어? 그런 거 아니었냐고? 도대체..."

"언니!"

리사가 강한 어조로 예린의 말을 끊는다. 고개를 돌려 예린을 바라본다.

"지금 같은 경우이기에, 저는 더 그래야만 해요."

"....."

"언니가 제 몫까지 더 슬퍼해 주세요."

예린은 고개를 떨구었다. 부산에 다시 내려온지 일주일. 너무도 힘든 나날이었다. 연이은 항쟁으로 육체적으로도 그렇지만 아버지의 비보는 물론 서울에서 들려온 소식까지 그녀를 너무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언니는, 날 대신할 수 있어요. 슬퍼하세요."

리사의 말이 끝나자 예린은 별안간 들고 있는 야구방망이로 벽을 후려쳤다. 벽이 흔들거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몇 번이고 두드린다. 돌가루가 휘날리다 결국 야구 방망이가 부러지고 만다. 부러진 방망이를 들여다보고 있던 예린은 짐승과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손에 들린 부분을 병구에게 집어던졌다. 머리에 적중한 방망이 손잡이 부분이 바닥에 떨어질 때쯤 예린은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정신을 마악 차리려던 병구는 도로 기절했다.

태호는 뻘쭘하게 서 있다가 리사의 눈짓을 받고 병구를 흔들어 깨웠다. 예린이 리사와 거의 항상 붙어 다니고 아주 친밀한 사이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막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지는 몰랐다. 만신창이가 된 병구를 정신 차리게 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했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슬퍼하는 예린의 노기가 무섭기도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똑바로 눈을 뜨고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리사의 메마른 표정이 더 무서운 까닭이었다.

간신히 다시 정신을 차린 병구를 향해 리사가 조용한 어조로, 그러나 아주 분명하게 다그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버티며 대답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병구였지만 밤을 새워 취조하는 리사에게는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토해내고 말았다. 그런 정보 중에는 그가 가지고 있던 약의 입수와 유통 경로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걸 다... 알아서 어쩔 셈이냐... 넌, 약은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글쎄요. 공익사업이라도 시작해 볼까요?"

병구는 침을 퉤 뱉었다. 리사에게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충분한 경멸의 표시였다.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구나, 아가야."

"그게 뭐죠, 아저씨?"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기에 병구는 리사나 마리에게 가끔씩 아가라고 불렀고 리사는 그에게 아저씨라고 불렀다. 마리는 아제라고 불렀다. 지금의 처지가 이렇게 되었기에 그 친밀한 호칭은 을씨년스러운 것으로 바뀌고 만다. 병구는 한쪽 뺨이 부어 발음이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이미 더럽혀졌어.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더럽고 치사한 세계에 몸을 담고 있는 거야. 그런데, 뭐... 약은 안 하겠다? 미성년자는 손 안 대겠다? 이래저래 불법적인 건 안 하겠다? 형님이 그런 소리를 하실 때에는 말이지... 아... 이 분이 이 일 하는 게 오래되다 보니 마음이 많이 약해져서 그런가 보다 싶었지. 그런데 널 보고 있으면... 하하... 오냐오냐 귀엽다고 해줄 때, 그때 알려줄 걸 그랬구나 싶다. 그 어린 것이 똑똑한 머리와 이상한 감이라는 거 믿고 조직 일에 하나하나 참견하기 시작할 때, 그때 알려주지 않아서 네가 이런 착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야."

".....제가 무슨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건데요."

"네가 깨끗하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착각 말이다."

"......."

"거의 모든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너니까... 우리 조직이 연간 사고파는 애들이 몇 명인지는 알고 있겠지? 나와바리에서 어떤 애들이 기어들어올 때는 어떤 절차를 거쳐서 살릴 놈은 살리고 밟을 놈은 밟는지도 잘 알고 있겠지? 어떤 새끼들에게 돈을 거두어들이고 또 어떤 새끼들에게 돈을 뿌리면서 우리의 자리를 유지하는지! 네가 모르지는 않겠지! 말해봐라, 내 질문에 답해보라고!"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병구의 외침은 절절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싸움에서 패하고 이런 꼴이 되긴 했지만, 그 역시 백당의 한 사람이었다. 백당이라는 이름이 있기도 전에 김 회장과 함께 있었던 창립 멤버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평생 모든 것을 바친 조직이, 그가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계집아이에게 넘어가는 꼴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몫을 자신이 직접 챙기기로 결심했다. 리사가 남자 문제로 갈팡질팡하는 것을 보며 결국 여자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는 시기를 조율했다. 리사가 대규모 인원을 서울로 빼가는 것을 보고 그는 자신의 추종세력을 모아 김 회장을 쳤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 어느 정도 연금을 하며 자신에게 협조를 하라고 다그치면서 리사가 돌아오거든 협상의 재료로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리사는 너무 빠르게 부산으로 돌아와 버렸다. 어떠한 협상의 의지도 내보이지 않은 채 병구의 외곽부터 차근차근 짓밟으며 조여들어 왔다. 리사를 맞을 준비도, 대처도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를 맞닥뜨린 병구는 최후의 통첩으로 김 회장의 목숨을 걸었다. 그러나 리사의 반응은 싸늘했다. 리사는 병구가 그런 배짱이 못 된다고 조롱했지만, 병구는 정말로 그렇게 하고 말았다. 김 회장을 담은 여행용 대형 가방은 서낙동강 푸른 물속에 사라졌다.

녹산공단에서 최종적으로 맞붙게 된 둘은 서로를 향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병구는 제 아비를 죽게 만들고 조직을 위태롭게 만든 사람으로 리사를 가리켰고 리사는 구시대의 잔재라며 병구의 축출을 주장했다. 그렇게 맞붙은 양 진영은 잠시 후 휴전 아닌 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귀신의 형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악에 받친 예린이 날뛰었고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동생들이 앞다투어 몸으로 찍어눌러야만 했던 것이다.

병구 쪽에 붙었던 조직원들은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슬금슬금 리사에게 되돌아가고 있었다. 병구의 패색은 짙어져 갔다. 결국 그는 모든 수하를 잃고 리사에게 사로잡혔다. 예린과 태호가 그런 병구를 취조하는 리사를 보조했다. 그러나 예린은 분을 못 이겨 나가버렸고 태호만 남아 리사와 함께 끝까지 병구를 취조했다.

"그 질문은...."

병구의 악에 받친 소리가 끝나고도 리사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겨우 말문을 연 그녀는 몹시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굳이 아저씨가 제게 묻지 않으셔도, 저도 늘 제 자신에게 해오고 있던 질문이랍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얼 하며 살아가야 할지... 그런 고민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어요. 이제 더 이상 저를 볼 일이 없는 아저씨께서..... 굳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를...더 이상 볼 일이 없다라....하하하하."

병구의 마지막 웃음은 처연했다. 리사가 태호에게 눈짓을 했다. 항상 리사와 함께 해오는 예린과는 달리 그는 리사의 눈짓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리사는 말로 해야만 했다.

"아저씨를, 끝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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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일이 많이 연재가 지연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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