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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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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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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린은 차에 올라탔다. 늘 리사를 태우고 다니던 차다. 그렇지만 리사는 타지 않는다. 예린은 리사를 기다리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더이상 리사를 보고 있으면서 평정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녹산공단을 뒤로하고 한참을 달려 한적한 바닷가에 도착했다. 낚시꾼 하나 보이지 않는 황량한 방파제였다. 항구는 멀리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다로 응시한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김 회장은 리사의 아버지인 동시에 자신도 아버지처럼 여기던 분이었다. 그분이 그렇게 황망하게 가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분을 해친 사람은 자신이 큰형님처럼 모시던 자였다. 말년에 병구가 권력에 눈이 멀어버릴 거라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병구는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었다. 그런 그가 딸처럼, 조카처럼 아끼던 사람이 리사다. 그런 그녀가 병구를 처치했다. 예린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가톨릭이었지만, 그녀가 읽었던 책 중에는 불교에 대한 것도 있었다. 책에서 보았던 무간지옥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다. 두 눈을 질끈 감아보지만, 그렇다고 그곳과 자신이 무관하다고 소리 지를 수 없었다.
자신의 유일무이한 벗이자 동반자라고 생각했던 리사가 이런 참혹한 사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조직의 안위를 먼저 챙기고 있다. 게다가 인편으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한석도 한 번 죽었다 살아난 이후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분명히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 예린이었기에 한석의 소식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송화를 탓하고픈 마음도 한껏 들었지만, 사지에 직접 들어가 임무를 수행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그녀였다. 감사를 전하지 못할망정 비난할 자격은 되지 못한다. 여지껏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고 생각한 조직이 과연 무엇인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한 번 품기 시작한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그대로 떠날 수도 있다. 그녀의 고향은 저 바다 너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가고 싶지만, 그런 동시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떠나버리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바람이 찼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뭔가 만져졌다. 꺼내보니 접힌 종이였다. 펼쳐본다. 너무도 익숙한 필체로 어떤 주소와 네 자리 숫자가 적혀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던 예린은 자기도 모르게 웃기 시작했다. 웃다 보니 눈물이 약간 흘렀다. 선글라스를 올려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한참을 달려 어떤 외딴곳에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A4 용지에 매직으로 써놓은 글자가 간판이랍시고 붙어있었다.
『부경연합회산하 뇌과학재활연구소』
건물은 원래 있는 것을 개보수하여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규모는 제법 되지만 겉모습만 보면 폐허나 다름없었다. 아직 제대로 된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탓이다. 건물에 딸린 마당에는 풀이 무성했고, 입구의 철제 대문은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예린은 자기 허리 높이까지 올라오는 풀밭을 보면서 이걸 정리하려면 품깨나 들겠다고 생각했다. 출입문은 잠겨 있었다. 디지털 도어락의 커버를 열고 아까 종이에서 본 번호를 누르자 자동문이 열렸다. 내부는 황량했다. 바닥은 먼지가 자욱했고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인조 대리석이 깔려있는 복도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복도를 따라 걷고 있노라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착하지. 오늘은 이 약만 먹으면 돼."
"싫어! 써!"
"오늘은 안 쓴 약이야."
"거짓말! 지난번에도 쓴 약이었잖아!"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몸을 돌린다. 어떤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입구에 문이 달려있지 않았다. 예린은 문 한쪽에 기대어 섰다. 방은 햇빛이 잘 들어오는 큰 창이 달려있었고 내부도 널찍했다. 마치 유아용 시설처럼 바닥과 벽에는 푹신한 매트가 덧대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각종 장난감이 가득했고 방 가운데에는 침대가 놓여있었다. 침대 위에는 한 남자가 앉아있었고, 그 앞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키가 크고 여자는 작았기에 둘의 눈높이는 비슷했다. 발걸음에 소리조차 내지 않는 건 예린의 몸에 익은 습관이었다. 인기척을 내지 않는 것도 기본이다. 그렇기에 방에 있는 두 남녀는 입구에 예린이 나타난 것도 모르고 한참 동안 승강이를 벌였다.
"약 먹으면 레고 가지고 놀게 해줄게."
"어제 다 만들었어."
"새것 사줄게."
"피이. 저번에도 사준다고 해놓고 안 사줬으면서."
"그건 예산이 아직 안 나와서... 어휴. 진짜."
약을 먹지 않겠다고 떼 쓰는 이는 최한석이었다. 그에게 약을 먹으라고 권하는 사람은 윤가희였다. 키나 덩치로 볼 때 한석이 가희의 두 배 정도가 되었지만, 그는 지금 정신연령이 퇴보했기 때문에 사고수준은 가희의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가희가 보통 사람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재원이기는 하지만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도 못한 편이었다. 그런 그녀이다 보니 한석을 달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보다 못한 예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먹도록 권해볼까요."
방 안의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워낙 인기척이 없던 탓에 예린의 등장을 이제서야 알아챈 까닭이다. 가희는 이쪽을 돌아보고 반색했다.
"오셨군요!"
마치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는 투였다. 물론 예린과 가희가 초면이 아니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다. 예린은 가희의 그런 태도가 이해되지 않아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기뻐하는 가회와 달리 한석은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더니 이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예린은 당황했고, 가희는 혀를 찼다. 가희가 아무리 달래어봐도 한석의 울음은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예린이 가희에게 왜 그런지 물었다. 가희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꽤 오래 한석을 달래며 애를 먹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예린의 옷을 가리켰다.
"아, 그게... 아무래도 사고 당시에 그 사람들 복장이 그래서 그런지, 검은 옷만 보면 저렇게 울어버리고 패닉에 빠져요. 십자 무늬를 봐도 그렇고요. 절 도와주시려면 옷을 갈아입으셔야겠네요."
"갈아입을 옷은 어디 있죠?"
"저쪽 방이요. 탈의실이라고 붙어있어요."
예린은 방에서 나와 가희가 가리킨 쪽을 향했다. 문득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본다. 조직 생활을 하기 시작한 이래 늘 이 차림이었다. 평상복이라고 입을 때도 줄곧 검은색만 입곤 했다. 쉽게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 옷차림이나 꾸미기에 관심이 많은 리사가 마리나 예린을 상대로 이것저것 권할 때에 마리는 그나마 언니가 권하는 옷을 입을 때도 있었지만, 예린은 단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다.
예린은 방을 나와 가희가 말한 곳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대형 옷장이 하나 있었고 벽에는 전신거울이 붙어있었다. 옷장을 연 예린은 당황했다. 가희에게 다시 돌아가 다른 옷은 없냐고 물어보았지만, 이제 울음이 잦아들던 한석이 방에 나타난 검은 옷의 예린을 보고 다시 기절할 듯이 놀라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가희는 혼이 빠질 정도로 정신없어했고, 예린은 두 번 다시 물어볼 생각조차 못 하게 되었다.
탈의실로 돌아온 예린은 걸려있는 옷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옷을 누가 준비해두었을까 잠깐 생각해봤지만, 다른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시설과 가희를 준비하고, 그 위치를 적은 쪽지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보통 여자들보다 훨씬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예린의 몸에 딱 맞는 옷을 준비해두었다.
"리사..."
예린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그리운 이름을 불렀다.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워낙 철두철미한 그녀의 곁을 떠나기란 그리도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표면적으로 조직에서 리사가 그녀를 해고한 모양새였지만, 이런 시설을 준비하고 그녀에게 이곳의 위치며 비밀번호를 알려준 까닭은 그녀를 이곳에 보낸 것이나 진배 없었다.
예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 선글라스도 벗었다. 예린은 곧 속옷만 걸친 몸이 되었다. 벽에 걸린 전신 거울을 통해 자신을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짧은 커트머리부터 시작해서 군살 없는 허리와 다리. 흔한 여자들과는 달리 몸 전체가 단단한 근육질이다. 이곳저곳에는 며칠 전부터 이어진 싸움의 여파로 온갖 멍이 시퍼렇게 들어있었다. 날카로운 물건에 베인 곳도 여러 군데. 여자로서의 매력을 굳이 찾는다면 스포츠 브래지어로 압박된 가슴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예린은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뱉었다. 각오를 다졌다.
옷장 안에 놓인 하얀색 타이츠부터 신기 시작했다. 나일론 폴리우레탄 재질의 고탄력 타이츠가 길게 뻗은 예린의 다리를 단단하게 감싼다. 마치 티셔츠를 벗듯이 스포츠 브래지어도 벗어버렸다. 옷장 안에는 순백의 하프 컵 브래지어도 놓여있었다. 브래지어의 팔걸이에 팔을 끼우고 손을 등 뒤로 돌려 후크를 채운다. 전체적으로 눌려 압박되어 있던 가슴이 아까와는 다른 형태가 된다. 작다고 할 수 없는 크기였던지라 몰드로 하반구를 모아주자 위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모양이 되었다. 예린은 자신의 차림이 약간 어색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치마를 꺼내어 입었다. 무릎 정도의 평범한 길이였지만 늘 바지만 착용하던 예린이었던지라 아래쪽이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타이츠를 입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치마를 다시 벗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예린은 이제 옷장 안에 걸려있는 하얀색 상의를 입기 시작했다.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기 시작하자 풍만한 가슴이 조금씩 가려지기 시작했다. 상의는 약간 타이트했다. 가슴 부분의 단추 사이가 약간 벌어진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예린은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색의 간호사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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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업로드했는데, 왜 후기에 아무 말도 안 썼냐면... 부끄러워서 그랬습니다. 부끄러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