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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눈을 떴다.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환한 빛이 천장의 무늬를 비추고 있다. 가장 첫 번째로 든 생각은 이곳이 어디인가였다. 그리고 그다음은,
"살아 있군요."
듣기 싫은 날카로운 목소리.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보기 싫은 여자가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이 여자가 싫다. 굉장히 꺼림칙하고... 기분 나쁘다. 얼굴이 못 생겨서 그런가? 목소리 때문인가? 처음 보는 사람을 이렇게나 싫어하게 되다니... 내가 이렇게 성격이 나쁜 인간인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도무지 이유는 모르겠다. 싫은 건 싫은 거다. 내게 기회만 허락된다면 저 여자를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아, 뭐야. 이거 왜 이러지? 내가 이렇게 성격이 더러웠나?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요. 전부 고정해두었고 바늘도 꽂혀있으니."
몸이 무거워서 못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팔다리는 가죽끈 같은 것으로 침대에 고정되어 있었고 목도 침대에 묶여 있었다. 왼팔에는 링거도 하나 꽂혀 있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고작해서 목을 가누는 정도가 전부였다. 몸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외국 책에 보면 자다가 외계인에게 납치되는 사람들 이야기도 나오고 그러는데... 뭐, 그런 거랑 비슷한 건가?
"저한테 왜 이러시죠?"
질문을 받은 여자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손에 들고 있던 성경책을 덮는다. 두꺼워 보이는 표지가 텁- 소리를 내며 닫힌다.
"몰라서 묻나요? 당신이 한 짓을 생각해보라구요. 하아아..."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대체 뭘 했다고 저러지? 그녀의 표정은 대단히 심각했다. 저 표정만 보자면 마치 내가 사람이라도 하나 죽인 듯한 표정인데? 깊은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잠시 후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당신을 탓할 순 없겠군요. 아무리 마귀 들린 자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로 흉악한 인간인 줄 몰랐던 제 불찰입니다. 그런 당신과 그 아이를 한곳에 두는 게 아니었는데.... 아멘."
묶여있는 몸만큼이나 가슴도 답답하다. 이 여자는 어째서 엄한 사람을 잡아다 놓고 이상한 소리만 지껄이고 있는 걸까. 사람보고 마귀라니, 미친 여자인가? 게다가 아멘이라니. 점점 더 알 수가 없다.
"이봐요. 마귀라뇨? 그리고 아이라니?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겁니까?"
여자의 목소리는 사람의 신경을 묘하게 긁는 구석이 있었다. 목소리도 기분 나쁘지만, 그녀 말의 내용은 어쩐지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더러워진다. 마귀? 아이? 이게 무슨 테트리스 게임하다가 다른 블록 잔뜩 쌓아놔서 이제는 긴 거 나와야 하는데 그건 안 나오고 ㄹ자 모양만 죽어라 나오는 상황이지? 한마디로 답이 없다.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본다.
"여기가 어디죠? 당신은 대체 누구구요? 왜 엄한 사람을 붙잡아 놓고 이 난리입니까! 이거 당장 못 풀어요?!"
어쩐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몸 하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애써 팔과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들썩거려 보았지만, 일어나기는커녕 침대가 꿈쩍도 하질 않는다. 증말 단단하게도 묶어 놓았군, 그래. 한숨을 푹푹 쉬며 여자에게 이걸 당장 풀으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여자는 풀기는커녕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이죠?"
"짓이라뇨. 당신이 누구길래 엄한 사람 이렇게 잡아다 놓고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구요!"
여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위아래로 훑어본다.
"아아. 잠시만요. 사람을 불러오겠어요."
그녀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짓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내가 이봐요를 열심히 외쳤지만 아주 그냥 사뿐히 즈려 생까시고 그대로 달려나간다. 하아. 이게 뭐야, 대체. 주인님이 이르시길 오늘도 늦게 오면 진짜로 죽여버린다고 했었는데... 하아.... 한숨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람. 여긴 대체 어디고 저 여자는 또 누구야?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몸에 대한 제어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대신 움직일 수 있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 방안을 둘러본다. 내 왼편에는 내가 누워 있는 것과 같은 병원 침대가 놓여 있었고 누군가 누워있었다. 산소마스크 같은 걸 쓰고 있어서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얇은 이불을 덮고 있었는데 드러나는 체형으로 보아 이제 중학생쯤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였다. 오른쪽을 돌아본다. 벽에 붙어있는 십자가 외에 특징적인 건 별로 없다. 책장 같은 것이 하나 있고 잡다구레한 물건들이 쌓여있었다. 이곳은 병원인 걸까? 그러나 병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너저분했다. 창고 같은 용도도 겸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아... 이번에도 지각하면 진짜 혼나는데..."
명희, 아니, 주인님이 명하신 사항은 자기 퇴근 시간인 여덟 시 반까지 병원 앞에 정확히 도착함은 물론 자기가 좋아하는 구두를 들고 오는 것까지 포함이다. 뭐 하나라도 빠졌다가는 곧바로 쪼인트는 물론 기분이 좋지 않으면 뻐킹머신인지 뭔지를 꺼내 들고 난동을 피워댈 것이다. 그런 급박한 처지에 처한 내가, 대체 이런 곳에 왜 처박혀 있는 걸까. 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라서 나름 준비도 해야 할 텐데...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자신을 김 권사라고 이야기한 여자는 바텐더라고 하는 남자를 불러왔다. 얼굴이 쭈글쭈글한 이 남자는 얼굴이나 피부를 보면 영락없는 노인인데도 말투나 목소리를 들어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이제 겨우 삼십 대 중초반 정도? 그런데도 얼굴이 왜 저렇지? 어렸을 때 한약을 잘못 먹었나? 암튼 두 사람은 나를 앞에 두고 한참을 관찰했다. 이름이나 나이 등을 물어본다. 소중한 개인정보를 내어줄 수 없다는 생각에 버텨볼까 했는데 대답을 잘하면 풀어주겠다고 하기에 선선히 알려주었다. 두 사람은 대답을 들으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부담스럽다.
"흐음.. 만약 이게 꾸미고 있는 거라면 이 녀석이 상당히 연기력이 좋은 편이라는 건데요."
바텐더는 내 눈꺼풀을 까뒤집어 보며 중얼거렸다. 여자는 그의 뒤에서 말했다.
"그래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마귀의 계략일지도 몰라요."
"하하. 마귀라..."
"이제 다 말했으니 풀어주시는 건가요? 제가 여기 잡혀 온 지 얼마나 지났죠?"
"잡혀왔다라.... 자네는 어제 뭐 했나?"
"네? 어제요? 그야.... 학교 갔다가 밥 먹고 집에 와 잤는데요."
.......아닌가? 아니, 내가 어제 뭐 했더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술 먹고 길에서 뻗거나 그런 건 아닌데 이런 곳에 어떻게 실려온 것일까. 처음에는 예전에 신입생 환영회 때 딱 한 번 그랬듯이 술 먹고 뻗어서 있다가 누군가에 의해 실려온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럼 좋아. 자네는 지금이 몇 월달로 알고 있지?"
"에?"
뜬금없이 날짜를 물어보다니. 그런 건 나한테 묻지 말고 달력을 보란 말야, 달력을. 그러나 방을 둘러보아도 황량한 이 창고에는 그런 게 없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12월달... 아닌가요? 다다음주 수요일이 크리스마스고.....?"
바텐더의 눈빛이 번뜩였다. 대답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주저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차림새가 전혀 겨울에 입을 만한 복장들이 아니었다. 김 권사라는 여자의 검은 옷도 그렇고 바텐더가 입고 있는 가운도 그렇고... 전혀 두꺼운 옷이 아니었다. 내가 입고 있는 이 환자복 비슷한 것도 마찬가지...
"자..잠깐만요. 지금 12월 달 아닌가요?"
"하하. 몇 년도?"
"에, 그거야 96년도....."
내 표정이 얼마나 얼빠진 표정이었을지 안 봐도 훤했다. 뭐 이리 당연한 걸 물어보는 걸까, 이 사람들은? 그런데 내 대답을 들은 바텐더는 허리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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