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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27화 (227/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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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어안이 벙벙한 내가 두 사람을 올려다보자 김 권사도 쓴웃음을 짓는 게 보였다. 그녀는 손을 모으고 말했다.

"마귀가 빠져나가면서 이 분의 기억도 가져간 걸까요."

"크하하하하. 모르죠, 저야, 그쪽으로는, 푸하하하하. 이거 걸작일세."

바텐더는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한참 웃어대다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자, 저기 옆에 말야. 저기 있는 여자애 보이나?"

"네?"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누워서 볼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거의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배와 가슴 근처의 하얀 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고 거기에는 온갖 센서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얼굴에는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옆에 놓인 오실로스코프 같은 기기에서 어떤 트렌드 마크가 표시되는 걸로 보아 아마도 저게 심장박동을 나타내는 건가 싶었다. 몹시 불쌍한 아이였다. .... 어라? 내가 왜 이 아이를 불쌍하다고 하고 있지?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아이였고 누구인지도 모르겠는데도 어쩐지 낯이 익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좀 더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바텐더의 목소리 때문에 그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어떤 미친놈이 저 아이의 목을 졸라서 말야, 뇌로 가는 산소가 결핍이 되었어. 일시적인 코마 상태에 빠졌지. 재빠르게 소생 절차를 밟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여긴 설비도 부족하고 사람을 고치는 약품 따위는 없는 곳이라 어렵더라고. 그래서 일단은 저런 식으로 살려두긴 했는데 말야.... 어때, 자네가 의사라면 뇌사 판정을 내릴 텐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 아이가 살아날 가능성이 있긴 해. 약 영쩜 영영영영, 일! 퍼센트. 아마도 여기 있는 사람들이 휴거 맞이해서 하늘로 다 올라가고 그다음 세상이 오면 살아날까 말까 한데 말야. 어때. 저러고도 사람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응? 자네 생각은 어때?"

내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그의 표정이 어쩐지 역겹다. 애당초 남자가 내 얼굴 가까이에 얼굴 들이대는 것부터가 불쾌한 데다가 이 사람 말대로라면 저 아이의 생명이 걸린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왜 표정이 그따위인가 싶었다. 그는 이죽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생각을 말해보라니까. 자네 의견을 받아들여서 계속 살릴지 말지를 결정하겠어. 참고로 저 상태로 계속 살리려면 이런 설비가 계속 필요한데.. 여기니까 그나마 저 정도 갖추고 있지 밖에서 저 정도로 해주려면 못해도 한 달에 이삼백만 원은 우습게 들걸?"

".....그런 이야기를 저한테 하시는 이유가 뭐죠?"

그러자 바텐더는 허리를 펴며 말했다. 두 손을 펴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그냥 자네라면 아주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않을까 싶어서 말야. 그냥 한번 물어본 거라고."

바텐더는 김 권사와 이야기를 좀 더 나누더니 방을 나갔다. 김 권사도 내게 마귀를 이겨내길 바란다 어찌한다 하고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나도 나갈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문밖에 서 있는 커다란 남자 둘이서 나를 제지했다. 한 명만 있어도 나를 제압하고도 남을 것처럼 생긴 사람이 둘씩이나 버티고 있기에 그냥 잠자코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주인님에게 연락을 미처 못 드리는 게 안타깝기는 했지만, 이 알 수 없는 상황에 빠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나가고 나니 창고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는 있었다. 슬리퍼를 꿰어신고 제일 먼저 창가로 다가간다. 손바닥만 한쪽 창으로 내다본 바깥은 콘크리트 가득한 도시의 풍경이었다. 삭막한 그 모습이 어쩐지 낯설어 이곳이 어디쯤인지 가늠조차 되질 않는다. 고개를 흔들고 옆 병상에 있는 소녀에게 다가간다. 발치에 놓인 이불을 끌어다가 몸을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기온이 막 낮아서 춥거나 하진 않았지만, 벌거벗은 몸을 두고 보고 있기가 딱해서 그랬다.

삐-익-, 삐-익, 삐-익.

낮고 규칙적인 기계 신호음이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바텐더의 말에 따르면 이 아이는 말 그대로 몸만 살아있을 뿐이다. 사람의 사고를 관장하는 뇌는 이미 손상되었다고 한다. 대체 이 어린아이를 이렇게 심하게 다치게 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꽤 잔인한 사람인 모양이다. 여자아이의 목에는 시퍼런 손자국이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있어 몹시 섬뜩했다. 명백한 살의.... 그것이 저절로 느껴지는 흔적이었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서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몸을 찬찬히 관찰한다. 얇은 이불 바깥으로 드러난 가느다란 팔과 다리에 멍 자국이 꽤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무릎은 심하게 까지고 멍들어 있었다. 팔뚝에도 그런 흔적이 꽤 보였다. 불행한 상상이지만 이 아이가 성적으로 심한 짓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겨우 십 대 초중반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인데 말이다......

의자 하나를 끌어다가 침대 옆에 두고 걸터앉는다. 사실 지금 내 몸도 구석구석이 쑤시고 머리도 아프다. 뒤통수는 누가 쥐어뜯어 먹은 것처럼 욱신거렸고 허리와 배에서도 은은한 통증이 반복되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가 드러눕고 싶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 아이의 곁을 떠나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자꾸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웬 중년 여자가 쟁반을 받쳐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창고에 들어서던 그녀는 내 모습을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다가와 쟁반을 침대에 올려두었다. 쟁반에는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죽이 한 그릇 놓여있었다.

"제 거인가요?"

"그렇습니다. 드시죠."

며칠 굶은 것처럼 뱃속이 엄청나게 허기졌기에 마다하지 않고 그릇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적당히 식은 다음에는 그냥 들이부어 마셔버렸다. 허겁지겁 먹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좀 안정된다. 식사를 가져온 중년 여자는 여자아이의 침대 곁에 서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처연했다. 아는 아이인가?

"혹시 이름을 아세요? 그 아이의?"

그러자 여자가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몹시 독특한 빛을 담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명백하게 날 미워하는 느낌이 있었다. 조금 무서웠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양....소란이라고 합니다. 제 여식이죠."

조금 놀랐다. 딸이라니.

"정말 따님인가요? 그 아이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바로 물어보았다. 죽 그릇은 이미 바닥까지 핥아 먹었기에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 질문을 들은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정말이군요. 마귀가 떠나가면서 기억을 잃었다는 게...."

"네?"

아까 김 권사인가 김 강사인가도 나한테 마귀마귀 거리더니 이 아줌마도 똑같다. 내가 어리둥절해 있으려니 그녀는 내게 다가와 자세를 낮추고 시선을 맞춘다.

"기도하겠습니다."

"네? 에에...."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손을 모으고 눈을 감기에 나도 엉겁결에 따라 했다. 눈을 감고 있자니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자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또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신 독생자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용서하신 것처럼 저희도 이 자를 용서하려 합니다. 부디 이 자의 죄는 죄가 아니옵고 진실한 믿음을 접하지 못한 더 큰 죄를 바로 보지 못함이 더 큰 죄라 하겠나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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