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29화 (22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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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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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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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되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일색. 착 달라붙은 슈트가 예린의 잘 빠진 몸매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몸매 과시용이 아니라 침투에 가장 적합하고 어둠에 녹아들기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예린이 리사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리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왜 그러시죠?"

"아뇨. 뭐... 그냥 기분 탓이겠죠."

둘 사이에 무거운 공기가 흐른다. 리사가 말하는 '기분 탓'이라는 말이 참 낯설다. 그녀는 언제나 명확한 자기주장을 가지고 그에 따른 계획을 세우며 한 번 내린 결단에 대해 후회하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의사결정에 이용하는 건 언제나 빠른 상황 판단과 자신의 '감'이었다. 그것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어긋난 적도 없고 그녀는 물론 그녀가 속한 조직을 위태롭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기분 탓이라는 소릴 하고 있다. 리사를 향한 예린의 시선은 그나마 선글라스가 가려주고 있었지만, 분명 날카로운 날을 세우고 있다.

"하아. 언니.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다 알고 있으니까."

아무리 다른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다고는 하나 곁에 있는 예린의 시선 하나 눈치채지 못할 리사가 아니었다. 사실 이번 서울행부터, 그리고 그 이전에 한석과 리사의 사이를 반대해오던 예린이다. 부산에서 단둘이 있으면서 예린은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저도 그분이 싫은 건 아닙니다만... 지금 리사 아가씨를 보면 우선순위를 놓치고 있는 분 같습니다."

자신을 항상 지켜보고 있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예린의 충고가, 리사로서는 뼈 아팠다.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녀의 안에서 외치고 있는 소리는 지금 바로 한석을 찾으라고 말하고 있다. 어쩐지 서늘한 기분. 또 어쩐지 두려운 기분. 그리고 약간씩 느껴지는 불쾌한 예감이 그녀로 하여금 조금씩 낭떠러지로 밀어 넣고 있는 걸 느끼고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멈출 수 없다. 한석을 놓칠 수 없다. 리사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고 바로 떴다. 붉은색 십자가가 하늘을 찌를 것처럼 솟아올라 있고 그 아래로는 푸른 색의 네온사인으로 표시된 큼지막한 글씨가 보인다. "재림예수대비말세찬양교회"

"가 보세요. 저는 태호 씨랑 전화 좀 하고 있을 테니까요."

예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리사는 한숨을 내쉬며 차로 돌아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부산에서는 지시를 내려달라고 아우성이지만 머릿속이 엉켜있는 그녀로서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뭐야, 진짜.... 하아...."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힌다. 얼마 보지도 않았고 잘 알지도 못하는데도 자신의 마음을 이리도 휘젓는 남자. 한석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얼빠진 얼굴. 같이 놀이동산에 갔을 때의 얼굴. 자신이 유혹했을 때 어쩔 줄 몰라하던 얼굴.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얼굴은 본의 아니게 리사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고 우물쭈물해 하며 전봇대 뒤에서 나오던 표정이다. 거기에서 리사의 가슴은 콱 막힌다.

"하아...."

목이 멘다. 마리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자신들의 특이체질을 알게 되고 두 사람은 그런 약속을 했었다. 두 사람이 같이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을 함께 사랑하겠노라고. 지금 생각해보니 어쩜 그렇게 치기 어린 약속을 할 수 있었을까. 신기하다. 어처구니없다. 과연 가능이나 할까.

물론 지금의 리사가 그 약속을 잊은 건 아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나누고 자시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녀는 확신이 없다. 마리와 한석에게는 비밀이지만 그녀는 사실 서울에 있는 동안 마리가 한석과 가까워지는 걸 은연중에 방해하기도 했다. 심술도 부려보았다. 떠나기 직전에는 욕심을 부려 한석을 먼저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부산에 몸이 묶일 수밖에 없고 마리는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 거리의 차이가 마음의 거리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석이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된 것이 어찌 보면 리사는 고마울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런 생각은..... 지나쳐.'

그 귀엽고 똘망똘망하게 생긴 유진이라는 아이의 전화를 받으며 그녀는 부산에 산적한 문제를 당장 한쪽으로 밀어버렸다. 전화를 끊자마자 예린을 불러 서울행을 서둘렀다. 부산에 다시 리사의 공백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대해 예린은 무척이나 유감스러워했지만, 한석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리사의 엄포에 그녀는 말없이 따라왔다. 서울에 올라오고 나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유진과 마리를 만날 수 있었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한석을 찾기 위해 그녀의 모든 감각이 동원되었다. 찾아낸 증거와 그녀의 감을 바탕으로 여기까지 왔다.

'분명 저 교회에 뭔가 있어...'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곳이 아니다. 교회치고 이상하리만큼 경비가 삼엄하다. 어쩐지 주변을 맴돌고 있는 제3의 세력도 감지된다. 여러 가지 시선이 얽힌 가운데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넘치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몹시 위태롭게 보인다. 낮에 이곳을 찾아내고도 유진과 마리를 돌려보낸 까닭은 그런 원인 모를 불안감 때문이다. 가능하면 그녀도 안으로 들어가 분위기를 파악하고 싶었지만, 저런 경비를 뚫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신체적 능력은 부족하다. 그녀의 수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예린을 들여보낸 것이 그나마 그녀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판단이었다.

삐이이이익-!

밤하늘을 날카롭게 찢는 호각소리. 교회건물에서 갑자기 불이 환해진다. 리사는 혀를 차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조수석의 창문을 내린다. 사이드 브레이커를 당긴 상태에서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엔진을 RPM을 미리 올려둔다. 잠시 후, 교회 담장 한 군데에서 검은색 그림자가 쑤욱 올라오더니 차의 대각선 앞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이동한다. 리사는 사이드를 풀고 곧장 차를 출발시킨다. 달리는 차의 조수석 창문을 통해 예린의 몸이 날아들어온다. 리사는 속도를 전혀 떨어뜨리지 않은 상태로 차를 유턴하여 도로를 질주한다. 교회 쪽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리는 소리와 단번에 거리를 벌린다.

"찾았어요?!"

"네. 그런데...."

뿌아아아앙-

신호도 아닌 곳에서 좌회전을 급하게 틀어 도로에서 골목으로 빠져나간다. 반대편 차선에서 오던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불만을 표시하지만 리사는 그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예린의 대답 말미에 나온 "그런데"였다.

"그런데라뇨! 찾았으면 데리고 나왔어야죠!"

난폭한 운전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예린은 손잡이를 꽉 붙들고 있었다. 등 뒤에서 하이빔을 켜며 쫓아오는 차는 아무래도 조금 전 난폭운전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쫓아오는 일반 시민 같지는 않다. 리사는 골목길과 도로를 무법천지로 질주하며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시끄러운 경적 소리와 행인들의 비명 소리가 한데 엉켜 시내 한복판에 아수라장을 펼치고 있다.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어떤 단체 녀석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특히 바텐더... 그 자식이 거기에..."

이번엔 리사가 놀랄 차례였다. 그녀는 길을 건너려던 사람에게 길게 경적을 울리고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그대로 횡단보도를 지나쳤다.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악을 쓰듯 소리쳤다.

"바텐더?! 그 자식이 어떻게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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