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30화 (230/471)

0230 / 0471 ----------------------------------------------

Route 9

──────────────────────────

한석은 모른다

──────────────────────────

"...그건 분명 바텐더였습니다. 얼굴이 많이 상하기는 했습니다만... 분명 그 눈빛이나 말투는..."

예린의 말을 전해 들으면서 리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신이 느낀 불안감의 정체는 이것이었나. 단순히 한석이 잡혀갔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초조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감은 닥칠 미래에 대해서 그녀 생각보다도 더 멀리 보고 더 깊게 보고 있었다. 바텐더가 살아있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소리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린이 한 소리다. 그녀가 맞다고 한다면 맞을 것이다. 예린이 가져온 정보를 통해 리사는 단번에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처리했다고 믿은 적이 살아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신뢰하고 있던 이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이다.

"분명... 병구 아저씨가 자기 손으로 처리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작년 이맘때에?"

"그렇습니다."

"그랬는데 그놈이 살아있다는 건....."

"송 부장이 거짓말을 했겠지요."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방심했다. 비록 수상한 기색이 보여도 아버지 항렬의 어르신이니 대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게 너무 안이한 판단이었다. 조금 불편한 듯해도 딸뻘의 여자아이에게 지시를 받는 게 불편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를 치고 있었다니...

"태호 씨에게 연락하세요."

"태호는 왜요?"

"지금 당장 동원 가능한 인원 전부를 이끌고 이쪽으로 오라구요."

"네?"

옷을 갈아입고 있던 예린이 멈칫거렸다. 지시를 바로 이행하지 않고 되묻고 있는 예린을 보며 리사가 짜증을 부렸다.

"제 말 못 들으셨어요? 지금 당장 전부 끌고 이리로 오라고 했잖아요."

"아가씨가... 부산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말입니까?"

"그래요."

"저는.... 그 지시를 따르기 어렵습니다."

"뭐라구요?"

예린이 옷을 모두 갈아입어 평소의 말쑥한 정장으로 되돌아왔다. 그녀가 리사의 지시를 곧바로 따르지 않고 이렇게 반박하는 건 난생처음이다. 리사가 잔뜩 굳은 얼굴로 예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모를 리 없는데도 예린은 자기 할 일을 전부 마친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산에서도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아가씨가 지금 가장 우선시 하고 있는 건 뭡니까?"

"...그런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지 않아요?"

리사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잔뜩 배어있었다. 예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천천히 입을 연다.

"최한석 씨 말입니까?"

"무슨 소리예요. 백당이죠."

리사는 조금 뜨끔했지만, 그래도 그 말에 덥석 긍정할 만도 없는 게 그녀 입장이었다. 리사의 대답을 듣고 예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어째서 인원들을 끌고 이쪽으로 오게 하십니까? 지금 당장 우리가 내려가서 애들을 데리고 송 부장을 축출해도 모자를 판에..."

예린의 반문에 리사는 혀를 찼다. 자신이 한석에게 빠져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녀가 양보할 수 없는 게 바로 그녀의 조직이었다. 예린은 자신을 너무 쉽게 보고 있다.

"휴우. 언니... 언니는 지금 한 가지 오해를 하고 있어요. 그래요. 최한석 씨. 한석 오빠도 중요하죠. 그분을 이런 상태로 두고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제 솔직한 심정이에요. 근데 생각해봐요. 근데 제가 방금 내린 판단은 결코 한석 오빠만을 위해서 내린 판단이 아니라구요. 이번엔 제가 언니에게 묻죠. 송 부장과 바텐더. 이 둘을 두고 봤을 때 어느 쪽이 더 위험하죠?"

"........"

"대답해 보세요. 조금 전까지 저한테 말대답 잘하셨잖아요?"

".....죄송합니다."

리사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사라지고 평상시의 차분함을 되찾는다. 그녀의 목소리가 차분해지면 차분해질수록 그 위엄은 더해가기에 예린은 절로 고개를 숙이며 경청했다.

"병구 아저씨. 그래요. 야심도 있고 속도 시꺼먼 데다가 우리 백당에 지분도 어느 정도 있으시니 딴 맘 먹고 있다고 해도, 그건 어느 정도 제가 커버할 수 있는 범위죠. 근데 바텐더라니. 그 자식 하나 때문에 울산이랑 양산 쪽 애들 전멸한 건 벌써 잊었나요? 그렇게 위험한 놈이 단지 부산에 없고 서울에 있다는 걸로 우리 조직에 해가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정말로?"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예린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 리사에게 사죄하고는 차로 돌아갔다. 휴대전화를 찾아 리사의 지시를 이행한다. 새벽에 걸려온 난데없는 전화와 뜬금없는 지시에 놀란 태호가 이유를 물었지만, 예린은 아가씨의 지시 사항이라는 걸로 설명을 끝냈다. 이곳 위치를 상세히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뒷좌석에 있는 담요 하나를 챙겨 리사에게 돌아간다. 강변에 서서 새벽바람을 맞고 있는 리사의 어깨를 담요로 감싼다.

"지시했습니다."

리사는 한 손으로 담요가 덮인 어깨를 누르며 천천히 말했다.

"도착하는 대로 곧바로 저 교회를 칩니다. 제1목표는 바텐더. 생포하지 않아도 좋아요. 약쟁이를 좋아하는 건 병구 아저씨지 제가 아니니까요."

"예."

"가능하면.... 오빠도 구출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바텐더보다 우선할 순 없어요."

"알겠습니다."

예린은 방금 리사의 지시에서 아주 잠깐 머뭇거린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그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인원 그대로 돌아가서 병구 아저씨를 축출합니다."

".....그만한 인원이 움직였는데 송 부장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알아요. 오히려 제가 이렇게 움직이는 걸 보고 그쪽도 본색을 드러내겠지요. 그러니까 가능한 모든 인원을 끌고 나오라고 했잖아요. 이 일로 조직이 쪼개지는 한이 있더라도 난 바텐더를 잡아야겠어요. 그 자식이 부산 사람들에게 한 짓을 생각해보면...."

리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재작년의 일이 떠올라 몸이 부르르 떨렸다. 바텐더와의 악연을 여기서 끝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바텐더. 이름도 성도 아무도 모른다. 말투로 보아 일본에서 부산으로 밀항했으리라 추정될 따름이었다. 어디선가 나타나 하층민 끄트머리에 접촉한 그는 처음에 피로회복제와 같은 각성제류를 만들어 지하 경제에 유통시켰다. 항만이나 산업단지 등에서 고된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흔해 빠진 피로회복제로 알고 바텐더의 약을 많이 복용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전에 없던 총기가 솟아나고 활력이 넘친다는 소문이 돌면서 유흥업소 종사자들은 물론 주먹을 빌려주는 사람들 역시 앞다투어 바텐더의 약을 찾았다. 약의 이름을 묻자 바텐더는 그것을 칵테일이라고 불렀다. 백당은 그를 불러들여 이런 약을 퍼뜨린 저의를 물었다. 이때, 바텐더를 만난 사람이 리사와 송 부장이었다. 자신에게 투자하길 요구한 바텐더는 자신의 미끈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딱 한마디 했을 뿐이다.

"재미있잖아."

여기에서 리사와 송 부장의 의견이 갈렸다. 그 이전부터 조직일에 관여를 하긴 했지만, 나약한 신체와 여자라는 이유로 좀처럼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아버지의 뒤에서 의견을 제시하는 수준의 참여를 하고 있던 리사였지만, 이번만큼은 완강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을 이유로 바텐더의 약을 반대했다. 그녀가 보기에 저 정체 모를 남자는 물론 그가 만든 음료는 분명 탈이 날 독배였다.

그러나 송 부장의 의견은 달랐다. 바텐더가 거의 무상이나 다를 바 없는 가격으로 시중에 유통시키고 있는 칵테일에 대한 지분을 자신들이 확보한다면 엄청난 이득을 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리사의 아버지는 두 사람의 이견을 조율하느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그 사이에 칵테일은 부산은 물론 근처 양산이나 울산, 창원까지도 칵테일의 전파는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바텐더는 다른 조직에 투자를 유도해보겠노라며 백당을 떠났다.

그러다 최초로 사달이 난 것이 바로 울산이었다. 백당의 하위 조직에 속하는 한 이권 단체에서 내부에서 칼부림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사소한 다툼이었으나 어느 순간 조직 내 항쟁으로 비약되더니 울산 조직이 괴멸에 이르기까지 갔다. 리사의 라인에 기대고 있는 소조직의 오야가 칵테일을 금지하도록 하자 이미 칵테일에 맛 들린 부하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약을 못 하게 했다는 이유로 하극상을 저지른 일에 대해 백당은 엄밀히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리사는 그전부터 칵테일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가진 자료를 모두 공개했다. 칵테일은 일시적으로 사람의 신체를 각성시키고 활력을 가져다줄지언정 지속적으로는 불안감, 무기력, 정신 이상 등을 가져올 수 있는 환각 물질이 기본 베이스였다. 자료의 출처는 부산지방검찰청. 나름대로 검찰에 줄을 대고 있던 리사만이 가져올 수 있는 특급 정보였다.

리사의 아버지는 즉각적으로 그녀의 의견을 수용했다. 당장 바텐더를 잡으라는 지시가 송 부장을 향해 떨어지고 리사는 예린을 통해 조직 내 칵테일의 전파 및 중독 정도를 조사했다. 그들이 직면한 현실은 끔찍했다. 그들의 생각보다 칵테일은 깊고 넓게 퍼져있었다. 부하들과 지하 경제의 사람들에게 칵테일을 끊게 했더니 당장에 폭력적이고 야만적으로 변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만약 이러한 사실이 언론이나 공권력이 눈치채게 된다면 지하 경제를 향한 강합 압박이 들어올 게 분명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송 부장은 바텐더를 잡아 처단했다고 알려왔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깊이 중독된 사람들을 되돌리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조직 내의 불화가 심해지고 조직원의 이탈은 물론 하극상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때부터 리사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현장에서 직접 지휘하기 시작했고 혼란이 수습되는 데는 거의 일 년이 걸렸다. 단 한 명의 약쟁이가 저지른 일치고는 너무 깊고 커다란 비극이었다.

무심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지난 일을 떠올리는 리사였다. 그녀의 등 뒤에는 예린이 서 있었다. 새벽이 물러가고 아침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다. 동쪽 하늘로부터 광량이 증가하더니 이내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한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리사는 결국 자신이 궁금하던 것을 묻게 된다.

"오빠는... 어때요?"

"제가 보았을 때 의식이 없었습니다. 비호하는 이들이 있어 가까이 접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군요. 그렇다면 혹시..."

리사는 뭔가 더 물어보려다가 말을 삼켰다. 내심 불안했지만, 차마 그것을 묻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의 대화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예린이었다.

"....약을 이미 하셨으리라 추정됩니다. 한석 씨를 경호하고 있는 것들이 바텐더의 졸개들이었으니까요."

리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예린에게는 애써 조직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한석을 구하고 싶었다. 그게 그녀의 본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게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