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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32화 (23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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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날 안다?

게다가 그녀의 말투는 그냥 말을 건 게 아니라 꽤나 걱정스럽다는 투였다. 나에게 한 걸음씩 다가오는 그녀의 손에 들린 야구 배트를 본다. 피 묻은 야구 배트..... 아까 문을 부술 때 보여준 괴력을 담아 저 방망이를 휘두른다면 사람의 육신이 온전할 수 있을까....

"자...잠깐만요!"

내가 손을 내밀자 여자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저....저기, 절 아세요?"

그러자 여자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물론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기에 표정의 절반은 감춰져 있었지만, 얼굴 전체로 느껴지는 느낌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키가 훤칠한 그녀는 나와 눈높이가 얼추 비슷할 정도였다.

"한석 씨. 무슨 말씀이신지.... 전 리사 아가씨가 보낸...."

"리사? 그게 누구죠?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외국인은 없는데.....?"

리사라니. 그건 대체 어느 나라 이름인 거야? 미국은 아닌 것 같고... 유럽이나 뭐 그런 쪽인가? 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몸을 홱 돌려 다시 바텐더에게 향한다.

"네놈 짓이냐?"

"뭐...가?"

"저분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어."

내용이야 뭐 아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아까까지는 꽤 점잖은 말투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말투에서 명백한 적의가 느껴진다. 검은 옷 안쪽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살기가 느껴질 정도다. 바텐더는 부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놈이 저렇게 된 건 내 책임이 아냐. 나도 모르겠다고. 까불다가 얻어터지다 보니 저렇게 된 거 같은데 자세한 건 나도 몰라."

"네놈 약 때문이 아니라?"

"하하. 내 약이 무슨 전지전능한 신의 약이라도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 약은 그저 기분이나 조금 좋게 만들어 주는 칵테일에 불과하다고."

"닥쳐!"

여자의 발이 높이 들어올려지더니 바텐더의 허벅지를 밟는다.

"끄어어어억!!!"

방금 들린 뿌드득- 하는 소리가 설마 사람 뼈 나가는 소리인 건가? 저렇게 밟는 것만으로도 뼈를 나가게 할 정도라는 건가. 점점 이 여자가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더욱더 소란이 쪽에 바짝 붙어서 그녀의 공격을 대비했다. 바텐더를 잡으러 부산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그녀.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손에는 야구 배트를 들고 있는 그녀가 바텐더의 다리가 아니라 내 다리를 부러뜨린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아마 순식간에 해치우고도 남으리라.

"다리 하나 정도는 서비스다. 저분을 원래대로 돌리는 방법을 빨리 생각해내지 않으면 나머지 다리도 온전하기는 어려울 거다."

바텐더는 자신의 허벅지를 짓밟고 있는 여자의 다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다리는 땅에 뿌리 박힌 나무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알았다. 그러니 제발 이 다리 좀....."

"방법을 먼저 이야기해. 시간이 없으니 짧게 듣겠다."

"끄으으으....으으...."

바텐더는 몸을 바싹 웅크리고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 하나가 뭔가 이상하다. 조끼 안쪽으로 들어간 손이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다. 아까 그가 챙겼던 무언가가 떠올라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예린! 조심해!"

"네?"

여자가 날 쳐다보는 사이, 바텐더의 한 손이 벼락같이 움직여 여자의 정강이에 무언가를 꽂아넣는다.

"크윽! 너 이 자식!!"

여자는 다리를 휘둘러 바텐더의 머리통을 차버리고 뒤로 물러났다. 여자의 정강이에는 아까 바텐더가 조립하던 그 주사기 총이 꽂혀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황급히 빼버리고 야구 배트를 들어올렸다. 바닥에 나뒹구는 주사기 총에 매달린 앰풀은 이미 텅 비어있었고 바늘 끝에는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 자식이!!!"

그러나 바텐더는 이미 몸을 굴려 그녀에게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그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외쳤다.

"하하. 최한석! 네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그럼, 난 이만 아디오스."

그는 부서진 책상 위를 기다시피 하여 문을 빠져나갔다. 밖에서는 엄청난 소란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바텐더가 빠져나가고 난 이 방은 다시 적막에 빠졌다. 배트를 들어 올린 채 우뚝 선 여자는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저...저기, 괜찮으세요?"

여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바텐더는 대체 뭘 주사한 걸까. 설마 독약 같은 건 아니겠지? 순간 겁이 덜컥 나서 그녀에게 달려가 부축한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 안색이 좋지 않아 자리에 눕혔다. 다리부터 시작해서 파드득거리며 경련을 일으키는 그녀를 어떻게 처치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이봐요. 예린 씨! 정신 차려요!"

뺨을 두드려본다. 선글라스가 하도 짙은 색이라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조차 모르겠다. 선글라스를 벗기기 위해 손을 뻗는다. 내 손이 안경에 닿자 그녀의 손이 벼락같이 움직여 내 팔목을 붙잡았다.

".....지...마..."

"네?"

"벗기지 마.... 으윽......"

내 손목을 쥔 그녀의 손은 무슨 조임쇠처럼 팔목을 조여왔다. 팔을 빼내려고 하는데도 쉽게 빠지지가 않는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힘이 세냐!

"이럴 힘이 있으면 정신 좀 차려봐요. 어디가 안 좋아요? 말을 해봐요!"

그나마 자유로운 한쪽 팔로 어깨를 짚고 흔들어 보지만, 그녀는 낮은 신음만 흘릴 뿐 제대로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간신히 잡힌 손을 풀어내고 환자복 상의를 벗어 그녀의 허벅지를 단단히 묶기 시작했다. 바텐더가 주사한 약이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독사에 물린 사람에 대한 조치를 흉내 내어 한번 해본다.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전혀 장담할 수 없지만.

"나...나를....."

"네?"

예린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무언가 말하기 시작했다. 귀를 바싹 대고 그녀가 말하는 소리를 들으려고 애썼다.

"나....나를... 범....."

"범?"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 마치 목이 졸린 사람처럼 한참 헐떡이다가 갑자기 상체를 일으켜 애써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얼른 몸을 받쳐주어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아까까지 하얗게 질려있던 얼굴이 다시 붉어지기 시작한다.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했고 그녀는 손을 품 안에 넣고 무언가 주섬주섬 찾았다.

"....이럴... 수는....그럴 수는.... 크윽.... 아가씨에게...."

무어라 계속 중얼거리고는 있는데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통 모르겠다. 오래 걸리지 않아 그녀는 품 안에서 무언가 꺼내 들었다. 난 무슨 해독제라도 찾나 싶어 멀뚱히 보고 있다가 그녀가 꺼내놓은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그걸 뭐에 쓰시게요?"

형광등의 빛을 받아 번뜩이고 있는 날 부분이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꺼낸 것은 한 뼘 정도 길이에 손가락 두 개 정도의 폭을 가진 단도였다. 끝이 좁고 날카로운 게 사람 어디 한 군데 찔렀다가는 그대로 푹 들어가기 아주 좋게 생긴.... 그런 느낌의 칼이었다.

"이봐요. 예린 씨! 설마... 그걸로 저를...."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니 시선이 어딜 보는지 통 모르겠다. 두려움에 질린 내가 뒷걸음치며 다시 소란의 침대로 다가가는 동안 예린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발걸음이 제대로 내딛어지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들린 흉흉한 물건 때문에 도무지 다가가 부축을 한다거나 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녀가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어떤 공격도 나를 향하지 않았다. 예린이라는 여자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며시 눈을 뜨고 상황을 확인한다. 바로 다음 순간, 난 황급히 뛰쳐나가 예린의 손목을 잡고 제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이 여자. 힘만 센 줄 알았는데 돌기까지 한 걸까?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놔요!"

"피나요, 피!"

자기 허벅지에 대고 칼을 긋는 건 대체 무슨 이유일까. 설마 이 여자가 과부라서 조선시대 열녀들처럼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는 건 아닐 테고.... 게다가 한 번 스윽 긋는 거면 손이 미끄러진 건가 싶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아주 꼼꼼하게, 차분하게 자기 허벅지에 대고 한일자를 긋고 있었다. 어느 정도 깊이로 찌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걸로 보아 결코 얇게 찌른 건 아닌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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