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35화 (23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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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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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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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겠어요? 정말로?"

"문제없습니다. 이 정도는...."

예린은 허벅지에 올려둔 재킷을 똑바로 했다. 평범한 동작이지만 사실 그녀는 속으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바텐더의 약은 듣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여파가 오래갔다. 몸에서 약이 돌 때, 그녀는 자기 자신의 그 정도의 음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난생처음 알았다. 아직 남자를 겪어 보지 못한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있는 남자, 한석에 대해 미칠듯한 욕정을 느꼈던 것이다. 극단적인 방법과 육체의 고통을 감내하며 그 마음을 일시적으로 간신히 억누르는데 성공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임시처방이었다. 그녀는 지금도 다리 사이에 일어나는 몸의 변화에 신경 쓰느라 사실 옆에 앉아 있는 리사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계속해서 은근히 젖어오는 다리 사이의 낯선 느낌에 비하면 자상으로 욱신거리는 허벅지는 차라리 양반이었다. 지금도 불쑥불쑥 치밀고 올라오는 욕망은 그녀로 하여금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모두 연락이 되질 않아요. 송 부장의 행동이 생각보다 빨랐던 모양이에요."

".....으음....그렇습니까....?"

"다들 고생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한 번 더 고생 좀 해주어야 할 것 같아요."

"문제... 없습니다."

예린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려 버스 뒷자리를 살핀다. 그녀는 지금 45인승 버스의 맨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검은 옷 일색의 사내들이 뒤로 주욱 앉아있다. 동생들의 상태를 가늠해보고 예린은 속으로 혀를 찼다. 리사의 질문에 문제없다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손실이 심각했다. 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짭새들이 생각보다 빨리 들이닥치더군요. 분명 그만한 인원이면 긴급 출동이라기보단 어디선가 대기하고 있던 인원임에 틀림없어요. 그 교회를 주시하고 있던 꼰대들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덕분에...... 교회에서 빠져나올 때 애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단순 폭행으로 잡혀가면 상관없지만... 조직 간 항쟁으로 비치면 곤란한데...."

리사는 어두운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교회에 진입을 시도할 때, 곧 경찰이 출동하리란 것은 예측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내 한복판에 있는 대형교회에 버스 네 대 분량의 인원이 쳐들어갔으니 어떤 식으로든 제재가 들어오리란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돌입에 앞서 그녀가 추정하기에 자신들이 교회 내에서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 데리고 나올 정도의 시간은 충분하리라 보았다. 교회에 배치된 주먹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제압 가능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도들의 저항은 예상보다 격렬했고 예린이 한석을 찾아내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찰의 출동이 생각보다 훨씬 빨랐으며 그 수도 일반적인 상황보다 훨씬 많았다. 그 교회를 쳐들어갈 생각은 리사만 하고 있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원래 계획은 신속하게 치고 빠져나와 또 다른 적이 기다리고 있을 부산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그 계획이 늦어지고 또한 틀어지고 있다. 경찰에 의해 체포된 조직원 다수의 손실, 에이스 예린의 부상도 그렇고 실신한 채로 예린의 어깨에 실려온 한석이 더욱 그러하다. 한석의 모습을 보는 순간 리사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어쩌다 그런 상태에 빠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예린은 한사코 말이 없었다.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는 리사는 더 이상 추궁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한석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의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볼 뿐이었다. 시간이 없다고 재촉하는 부하들을 이끌고 부산으로 떠나기 직전 자신의 차를 마리에게 내어주며 한석을 데리고 양산에 가 있으라고 이야기했다.

"언니야는 우짤라고?"

"난 부산에서 할 일이 있어. 닥터 윤에게 연락해둘 테니까 오빠를 부탁해."

그러나 마리는 대답 대신 리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왜 그래?"

"닌 내한테 할 말은 읍나?"

마리의 뜬금없는 질문에 리사는 조금 멈칫했지만, 이내 평정을 가장하고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아니다. 아니면 됐구마. 일 퍼뜩 처리하고 별장으로 온나. 뒀다 얘기하구로."

"그래. 아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리사는 마리를 먼저 출발하게 했다. 송 부장이 자신의 뒤를 밟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다. 자신이 한석을 위해 이만한 인원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 물론 명목상은 바텐더를 잡겠다고 나선 일이긴 하나 사실 그 점에 대해서는 리사 본인조차 믿지 않을 소리이긴 했다. -  그는 틀림없이 한석을 노리고도 남을 인물이다. 이번 기회에 송 부장을 완전히 축출하고 조직을 조용하게 만든 다음, 반드시 한석을 데리고 부산으로 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 꼭 이야기해야지....'

그녀는 가만히 손을 뻗어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한석과 보낸 단 하루의 밤이 지난 지 이제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뿐이다. 늘 같은 시기에 마리와 함께 월경을 맞이하던 리사였지만 예정대로 시작된 마리와 달리 리사는 지난번을 걸렀다. 그녀의 생리가 꽤 규칙적인 편이라고는 하나 어쩌다 한 번 걸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리사가 느끼는 감정은 그저 한 번 건너뛴 정도의 느낌이 아니었다. 조금 전, 마리의 뜬금없는 질문도 어찌 보면 둔감하기 짝이 없는 마리조차 뭔가 이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몰랐다.

"연락이 왔습니다. 녹산공단 외곽에 있다고 하는군요."

옆자리의 예린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리사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너무 길게 끌었습니다. 이번에 모든 것을 끝냅니다."

리사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예린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버님께 연락이 안 됩니다."

제아무리 대담한 리사라고는 하나, 자기 친아버지의 안위는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그녀는 손톱을 몇 번 깨물다가 예린을 보며 말했다.

"아무리 송 부장이 막 나간다고는 해도... 설마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거예요. 부산 전체를 장악할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건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어디 외딴곳에 연금했을 겁니다. 이번 일이 끝나고 모셔오면 될 거예요."

"그랬으면 다행입니다만..."

예린은 말끝을 흐렸다. 리사의 전망은 지극히 희망적이고, 아무 근거도 없었다. 그렇지만 예린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들을 태운 버스가 녹산공단 외곽에 도착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한 무리의 사람이 드러났다. 실루엣의 수를 가늠한 예린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리사와 함께 부산을 떠나 서울로 향할 때부터 느꼈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허벅지의 은은한 통증은 애써 무시하고 있었지만,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이상한 느낌은 여전히 그녀를 괴롭혔다.

예린의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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