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36화 (23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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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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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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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헉....헉...."

거친 숨을 내쉬며, 예린은 생각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녀의 성격상, 대개 한번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지만, 이 경우에는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녹산공단에 송 부장 일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쳐들어간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미리 아버님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하고 들어간 것이 문제였을까. 잡혀서 매달린 아버님의 그 처참한 모습을 보고 동요한 부하들을 제때 추스르지 못한 것이 문제였을까. 평소 같으면 1호차에 그냥 앉아 있었을 리사가 함께 나와 현장에 나온 것이 문제였을까. 도무지 뭐가 첫 번째 문제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무거운 발걸음과 거친 숨이 그녀를 더욱 괴롭게 한다.

사실 생각은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그녀는 늘 리사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고 그에 따른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며칠 전, 서울행을 결정할 때부터 리사는 그녀 특유의 날카로운 지시를 잘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예린은 은연중에 그걸 느끼고 있으면서도 애써 불안감을 억누르고 있었다. 어떻게든 잘 되겠지... 그런 믿음이 있었다. 예린에게 있어 리사를 믿는다는 건 지구가 돌고 있다는 걸 믿는다는 것과 동등할 정도다.

지금도 그녀는 리사의 지시가 필요했다. 지금 이대로 도망치면 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조직의 분파로 이동해서 재기를 꾀해야 하는 건지. 예린으로서는 도무지 모르겠다. 등에 업힌 리사가 자꾸 흘러내리려는 것을 추켜올린다. 팔로 자신의 목을 단단히 감으라고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 정도 힘을 내지 못할 정도인가.... 끈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축 늘어진 리사의 무게가 예린을 짓누른다.

"아가씨....아가씨!!!"

덜컥하는 마음에 리사를 불러본다. 대답이 없다. 예린은 주변을 둘러보고 낡은 문 하나를 발견한다. 지은 지 십 년은 넘은 것 같은 쓰지 않은 폐창고였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 바닥에 리사를 눕힌다. 어깨를 짚고 흔든다.

"아가씨....리사! 정신 차려!"

리사의 등에 꽂혔던 칼은 이미 제거했다. 지혈도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다. 비록 완벽하진 않아도 그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응급조치는 다 취했다. 태호를 위시한 동생들이 몸을 던져 길을 뚫었고 예린은 리사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삼고 그 지옥 같은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리사의 원피스는 빨갛게 물든지 오래였고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리사야! 리사야... 잠들면 안 돼!"

맥박은 희미하지만, 아직 있었다. "아직 있다"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예린은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이미 그녀는 리사를 죽어가는 사람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내 생각이 틀렸어. 내 생각이 틀렸다고 말해, 리사. 어서.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끄흐흑....."

리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자신도 모르게 울고 만다. 가슴을 내리치고 뺨을 때려도 리사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직 있다"고 생각했던 맥박도 희미해지고 있다. 믿을 수 없다. 이건 현실이 아냐. 이런 건 전혀 현실이 아냐. 실감이 나질 않아. 이럴 리는 없어. 울고 있는 예린의 귀에 아주 작디작은 소리가 들렸다.

"...어..언니... 울어요?"

"리사!"

리사의 손이 예린의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작고 가느다란 손이지만 그녀의 손짓 하나하나에 전 조직이 움직이곤 했다. 그러나 그 조직은 이제 분해되어 궤멸했고 남은 조직의 파편은 비수가 되어 그녀를 쫓고 있었다.

"여...역시...언니는....선글라스를.... 안 쓰는 게.... 좋아...."

선글라스를 언제 떨어뜨렸을까.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리사의 손, 그 힘없는 움직임에 예린은 울컥해졌다.

"리사야. 말하지 마. 힘 빼지 말라고!"

"파란 눈이.... 어때서... 예쁘잖아.... 난 처음 봤을 때... 인형인 줄....."

"리사야.. 제발..."

예린은 리사의 손을 꼭 쥐었다. 손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리사는 살짝 떴던 눈을 도로 감으며 조용히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마리 앞으로... 숨겨놓은... 재산은.... 부산은행에..... 그리고 아빠 명의로 된... 땅은.... 화순에...."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빨리 양산 가야지. 한석 씨가 너 기다리잖아. 눈 떠!"

"아아.. 한석 오빠한테는... 정말....말하고...."

"그래, 직접 가서 말해. 얼굴 보고 말하라고!"

예린은 울먹이며 다그쳐보지만, 리사의 태도는 완강했다.

"하아.. 하하. 언니.....왜...이래요.. 선수끼리.... 나... 알아요... 정말... 아쉽고... 아쉬운데.... 여기까지인가 봐....."

"리사야. 제발...."

"마리가... 걱정돼.... 그 아이도... 이걸... 느끼고... 있을 거... 아냐.... 어떡하지... 미안해서...."

"리사야...."

리사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언니... 내 말 잘 듣죠...? 나.. 여기서 잠깐.... 잘 테니까.... 최대한... 빨리... 양산으로.....오빠랑.... 마리 데리고.... 숨어요.... 아무도 못 찾을 곳으로.... 송 부장이....."

"일어나! 나랑 같이 가자. 일어나라고!"

"언니.. 내 말 잘 듣잖아요. 제발요....이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부디.. 오빠에게....내가... 사실은.....오빠의......."

밖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예린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신의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차렸다. 한두 놈이 아니었다. 예린은 혀를 찼다. 아무리 바빠도 입구를 숨길 생각을 못 하다니. 정말이지.. 자긴 아무것도 못 할 년이다. 리사 없이는... 그러니 리사가 없으면 안 돼.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리사의 손을 놓고 벌떡 일어났다. 잠깐 이 손을 놓겠지만, 다시 잡을 것이다.

"여기 있.....으악!"

창고 문으로 들어서던 한 놈은 예린이 휘두른 단도에 목을 베였다.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쓰러진 앞사람의 비극을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뒤에 있는 놈의 눈깔에도 칼날을 꽂는다.

"끄아아아아악!!!"

비록 몸상태가 엉망이긴 하지만 예린의 육식동물 같은 움직임은 전혀 그 예리함이 바래지 않았다. 리사를 창고 가운데 잘 보이는 곳에 눕혀놓고 문 바로 옆 공간에 몸을 납작 숙이고 있던 그녀는 아무런 대비 없이 창고로 들어서려던 두 놈을 그렇게 순식간에 해치웠다.

"끄악.. .내 눈!! 내 눈!!! 으아아악!!"

목을 베인 놈은 절명했지만, 눈을 찔린 놈은 그렇지 않았다. 일부러 노리고 했다. 패닉에 빠진 놈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방향을 못 찾고 허우적대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상대편은 함부로 이 창고에 들어올 생각을 못 하게 되었다. 예린은 밖에 있는 적들이 주저하는 기색을 확인하고는 재빠르게 리사에게 돌아가 그녀를 둘러업었다. 자기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으라고 그렇게 이야기했건만 리사는 예린의 바람대로 팔을 움직여 주지 않았다. 이미 숨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예린은 애써 고개를 저으며 뒷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저쪽이다! 쫓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지만, 예린은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공단을 끼고 길다랗게 늘어서 있는 콘크리트 제방을 향해 뛴다. 이제 막 시작된 새벽의 여명을 받아 번쩍이고 있는 서낙동강의 물길이 그녀의 앞을 막는다. 그러나 그녀는 기세를 전혀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사람 하나를 업고 있음에도 그녀는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뒤에 들려오는 욕설과 함성보다도 온몸의 근육 하나하나가, 세포 하나하나가 내지르는 비명이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땅이 끝난다. 그 끝을 박차고 예린은 뛰어올랐다. 검푸른 물길이 두 여자를 삼켰다. 솟구쳐 오른 물보라가 두 사람을 감추었다. 쫓던 이들은 감히 그 물에 뛰어들어 그들을 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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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아직 모르시는 분이 있나 싶어서 미리 말씀드리자면... 히로인 중에서 작가가 가장 아끼는 캐릭터가 바로 리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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