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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38화 (238/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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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이후의 일에 대해 생각한다. 예린은 우리가 몸을 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사를 죽인 자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위협당하지 않기 위해서 관련된 사람들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마리는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 별장은 두 자매와 아주 친밀한 사람이 아니면 거의 모르는 곳이라 안심이긴 하지만 워낙 외진 곳에 있어 설령 공격을 받게 되면 빠져나갈 곳이 마땅치 않다는 단점이 있다.

나까지 흔적을 지워야 한다는 이야기에 이의를 제기해 본다. 그러자 예린이 말하길 저들에게 있어 나라는 사람은 리사를 움직이게 할 정도의 인물이고 리사의 그림자라고도 할 수 있는 예린이 붙어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제거 대상 제1호라 한다. 예린의 말과 처지는 퍽 모순되었다. 나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그녀가 내게 붙어 있어야 하겠지만, 또한 그녀가 내게 붙어있기에 나라는 존재가 더 부각된다.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는 패러독스처럼, 나와 예린은 그렇게 엉켜버렸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날 쳐다보는 그녀의 퍼런 눈빛은 결코 부드럽거나 따뜻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녀가 날 쏘아보는 것 같아 무서울 정도였다.

학교는 물론, 유진이나 고향 집으로의 연락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 리사를 공격했다는 송 부장이 - 그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 예린의 눈에서는 푸른 불꽃이 튀는 듯했다 - 어디까지 파고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리사가 행동을 개시하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이미 많은 준비를 끝마쳤으리란 반증이다. 그러니 위험부담이 있는 일은 할 수 없다.

서울에서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유진이나 서울에 보내놓은 자식새끼가 딴짓 안 하고 당연히 공부만 열심히 하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을 엄마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예린은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면 편지라도 보내어 무사함을 알리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별다른 도리가 없는 나는 예린이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다. 마리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가희는 내 피를 좀 더 연구해보겠다며 따라오겠다고 했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준비로 바쁜 예린이기에 그녀에게 그 이야기를 꺼낼 순 없었다. 내 손으로 목 졸라 죽일 뻔한 그 아이. 의식도 없이 어딘가 방치되어 있을 그 아이를 약속대로 구해 달라는 이야기를 꺼낼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하아...."

소란이에 대한 것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답답했다. 이곳의 사정도 결코 편한 게 아니라지만 그 아이는 지금 살아도 산 게 아닌 채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설령 구해온다고 하더라도 대체 내가 무얼 해줄 수 있는가 의문이지만 그래도 손에 닿는 곳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작고 가는 목에 선명하게 찍힌 손자국을 어찌 잊을쏘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바로 이 두 손 가득 살의를 담고 행한..... 그 끔찍한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몸서리쳐진다. 아무리 약에 취해 있었다고 한들, 그것은 분명한 내 의지였다. 제아무리 소란이 그걸 받아들였다고 해도, 그것은 살인 시도였다.

달칵-

생각에 빠져 있느라 문이 열리는 걸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화들짝 놀라 바라보니 예린이 서 있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다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차림이었지만, 어쩐지 상복처럼 보여 슬펐다.

"예...예린 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꼭 해야 하나요? 제가 지금...."

"상관없습니다. 그 상태로 들어주십시요."

욕조에서 일어난다면 알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지라 난 그저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있었다. 예린도 더 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고 문가에 서서 말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숨길 필요 없겠죠. 이미 짐작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 당신이 싫습니다."

"......네?"

"들으신 대로입니다. 최한석이라는 당신이 싫고, 밉고, 죽이고 싶습니다."

"예린 씨...."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린의 입에서 나오는 "죽이고 싶다"라는 소리는 몹시 실감 나는 말이기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나 예린은 그대로 달려와 내게 흉기를 휘두르거나 목을 조르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당신 때문에 리사 아가씨의 판단이 흐려지고 결정적인 순간까지 내몰렸으며 끝내는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가지 않아도 될 곳을 가셨고 죽지 않아도 될 죽음을 맞이했죠. 그래서 당신이 싫고 밉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결국 아가씨를 지키지 못한 건 저니까요. 당신을 비난함으로써 제 잘못을 덮고 싶은 마음인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계속 복잡하고 두려운 마음뿐입니다. 차라리 당신을 죽인다면 제 마음이 편해지리라.... 그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습니다."

"예린 씨... 나는....."

"게다가 더 어처구니없는 건, 당신이 기억을 잃고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당신은 소란이라는 아이를 아끼고 계셨지요. 리사 아가씨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었으면서 그 와중에도 그 아이를 지키려고 애썼지요. 이 이야기를 리사 아가씨에게 전하지 않은 건 순전히 제 판단입니다만.... 지금에 와서는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욕조의 물이 식고 있었다. 아니, 내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어서 그런가.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상황을 보아 가능하다고 판단되고 소재가 파악되는 대로 저는 바로 그 아이를 구해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고 간에 송 부장의 멱을 따서 당신을 향한 위협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판단될 때까지 당신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죽지 마십시요. 아니, 죽게 하지 않겠습니다."

"날 지키겠다고요?"

"그래요. 리사 아가씨가 마지막까지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은 당신이니까. 그녀가 슬퍼할 만한 일은 하지 않습니다."

예린은 말을 마치자마자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욕실을 나갔다. 거친 소리를 내며 닫힌 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욕조에서 나와 몸을 닦고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내가 묵고 있는 2층의 방으로 향했다. 실내의 모든 불이 꺼져 있었지만,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달빛이 유난히 밝아 방을 찾아가는 데 무리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를 향해 걷던 나는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누군가 나보다 먼저 방에 들어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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