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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양산을 빠져나온 우리는 남해와 서해, 동해까지 두루 구경하며 유랑 아닌 유랑을 하다가 결국 강원도에 정착했다. 왜 굳이 강원도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아마도 누구의 연고도 아닌 곳을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시간을 화살처럼 빠르게 흘렀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시간의 흐름도 잊고 살았는데, 어느새 눈 내리는 계절이 되었다. 강원도의 눈은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자주 왔다.
오늘도 또 눈이 왔다. 강원도에서 지낸 지 이제 겨우 6개월이고 이제 겨우 11월인데도 여긴 벌써 눈이 쌓일 정도로 내린다. 감나무집 서 씨의 조언대로 가을에 싸리를 베어 만들어 놓은 빗자루를 들어다가 개집 위에 쌓인 눈을 쓸어낸다. 이제 눈이 오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좀 못 되는데 벌써 이만큼이나 쌓였다. 조금 털어내다가 팔이 아파 결국 빗자루를 내려놓는다. 눈이 쌓여봤자 얼마나 무겁겠냐 싶었다. 서 씨는 눈이 많이 쌓이면 집도 무너진다고 엄포를 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무너질 정도라니... 시골 사람들 허풍하고는.... 에휴.
축사 안을 들여다본다. 쭈그리고 앉아있던 녀석들이 내 얼굴이 나타나자 난리를 치기 시작한다. 꼬리를 흔드는 놈, 꼬리가 아니라 숫제 허리를 흔드는 놈, 철망 꼭대기까지 펄쩍펄쩍 뛰는 놈, 너무 흥분한 나머지 옆에 있는 놈을 무는 놈까지.... 아주 그냥 개판 오 분 전도 아니고, 오 분 후다. 축사 철망을 몇 번 두드려 진정시킨다.
"인마! 아직 밥 시간 아냐!"
똥은 아직 안 치워도 될 듯싶었다. 전에 가희가 한 번 축사에 들어갔다가 자기 키랑 비슷한 덩치의 개들에게 덮쳐지는 바람에 구출하느라 애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 웃었다. 그다음부터 가희는 절대로 개축사에 가까이 가질 않았다. 광견병 예방접종도 결국 주사기를 들고 내가 직접 해야 했다.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딱히 개를 키울 필요도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시작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는데 막상 챙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마당을 둘러본다. 눈이 쌓이는 소리 - 아, 강원도에 와서 처음 알았다. 눈이 쌓일 때 소리가 난다는 사실 말이다. 그것도 꽤 시끄럽다. 아무튼 마당 전체를 쓸 엄두는 나지 않고 개 축사와 창고까지의 길만 쓸어놓는다. 어차피 한 시간 후면 또 나와서 쓸어야 하겠지.... 일단 빗자루를 내려놓고 집으로 향한다. 현관 앞에 서서 어깨와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한참 털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눈 많이 와예?"
"응. 제법 오네."
서서히 불러오는 배를 자랑하듯 내어놓은 마리가 한 손으로 허리를 받친 채 부엌에서 나오고 있었다.
"개들은 어때예?"
"여전하지, 뭐. 다들 너무 팔팔해서 그 등쌀에 축사가 무너질 것 같다."
"안 추울까... 실내에 안 들여놔도 되겠어요?"
"내가 그 이야기했다가 서 씨한테 얼마나 비웃음 당했는 줄 알아? 누가 개를 집 안에 들여놓고 키우냐고 한 소리 하던대?"
"그래도... 안 추울까...."
개를 키우자고 결정한 건 순전히 마리 때문이다. 안전상의 이유로 예린은 우리로 하여금 이 마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차가 없으면 인근 읍내도 나가기 어려운 촌동네인지라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반연금상태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손으로 꼽을 정도의 가구 수에 오십 명도 채 되지 않을 정도의 인구가 다인 손바닥만 한 동네였다.
원래 성격에 전혀 맞지 않게 온종일 집에만 있게 된 마리는 몹시 괴로워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사실 그녀의 괴로움은 외로움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함께 있기는 하지만 그녀의 외로움은 일종의 태생적인 것이었다. 나는 실감할 수 없지만...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함께인 대상을 잃은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개를 몇 마리 구해다 마당에서 키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풀어놓고 키워서 마당이 온통 개판이었지만, 마리가 홑몸이 아닌 걸 알게 되고부터는 건강을 우려하여 축사를 짓고 녀석들을 몰아넣었다.
"금동이는 어때? 태동이 있어?"
"태동은 5개월부터라던데예. 저는 아직이예."
"그런가."
배 속에 있는 녀석의 태명을 금동이라고 지었다. 녀석이 생긴 이후부터 마리는 급속히 안정이 되고 침착해졌다. 표정도 좋아졌다. 첫 임신과 입덧으로 고생을 제법 했지만, 그래도 밝은 표정으로 이겨내었다. 다음 달 정도 되면 읍내로 나가 초음파도 찍어보고 검사도 할 계획이다. 마리가 워낙 건강체질이라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남들 다 한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다. 금동이가 들어 있는 배를 어루만지는 마리를 보며 혼자 생각했다. 역시 그녀는 "혼자" 있기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을 타고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참고로 이곳에서 내 이름은 "최영수"였고 마리의 이름은 "김희지"였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마을에서는 일명 "부산댁"이라고 불리는 마리를 한 번 쳐다본다. 그녀는 지금 임신 15주차에 막 접어들고 있었다. 배가 불러오고 있어서, 이제 눈으로만 봐도 제법 임산부인 게 티가 나기 시작했다.
"예린은 아직인가?"
"그러게예. 오늘 같은 날은 해도 빨리 떨어질 텐데....."
일주일에 한 번, 예린과 가희는 시내로 나가 식료품과 생필품 등을 사왔다. 오늘은 가희가 필요한 책과 약품이 있다고 하여 좀 멀리까지 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나갔다. 이곳은 산간마을이라 해가 빨리 저물고 도로에는 가로등도 별로 없었다. 게다가 눈까지 내리고 있으니 운전하는 사람이 걱정되는 건 당연했다. 나 역시 창밖을 내다보며 걱정을 보탠다.
"일단 탄 좀 때자."
"야아."
마리를 부축하여 소파에 앉게 하고는 태교 음악 CD를 틀었다. 거실 가운데 놓인 조개탄 보일러에 탄을 더 넣었다. 보일러 옆에 놓인 주전자에 담긴 물의 양을 가늠한 다음 보일러 위에 올려놓았다. 조금 있으면 보글보글 끓어오를 것이고 우리는 거실은 따뜻한 습기를 머금게 될 것이다. 이곳의 공기는 아무래도 차갑고 건조한 편이라 이럴 필요가 제법 있었다. 가습기를 하나 살까도 싶었지만, 돈은 아끼는 게 좋았다. 아직 돈을 버는 사람이 없는 탓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아무래도 돈 쓰는 게 쉽지 않았다.
리사가 숨겨두었다는 재산은 제법 되었고 예린은 그것을 조금씩 빼내고 축적하여 우리의 가짜 명의 앞으로 돌려두었다. 마리와 나는 식만 올리지 않았다뿐이지 부부처럼 생활하고 있었고 밖에서 볼 때도 그러했다. 가희는 우리의 처조카. 예린은 내 처형 정도로 알려져 있다. 전혀 닮지 않은 세 사람이었지만, 예린의 분위기를 한번 맛본 사람은 의문을 제기할 엄두를 잘 내지 못했다. 네 사람의 목가적 삶은 그렇게 흘러갔고, 겉으로 볼 때 몹시 한가했다.
아니, 엄밀히 말해 한가한 사람은 나와 마리뿐이었다. 가희는 내 혈액을 기반으로 하여 바텐더의 약을 중화시킬 해독제를 개발하느라 바빴고 예린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분주했다. 또한, 내게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부산의 동향도 수시로 접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일 모두 전혀 쉬워 보이지 않았다.
"히유....우.... 이래서는 도저히 진도가 안 나가는데... 어떠세요, 한석 씨. 제가요, 꼭 구해올 테니까, 바텐더 약 한 번 더 먹어볼 생각 있으세요?"
이젠 제법 낯을 가리지 않는 가희는 이런 소리까지 내게 할 정도였다. 정중히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가희는 샘플도 없이 어떻게 개발하느냐고 항상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듯했다. 참고로 그녀가 땄다는 박사학위의 전공은 약물 쪽인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바텐더의 약을 굉장히 구하고 싶어 했고 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어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아직 중독이 덜 풀렸던 나의 피는 그녀의 좋은 연구소재였지만 시간이 흘러 약의 기운이 희미해진, 뭐, 이제 나는 거의 없다고 보고 있지만.... 지금은 가희가 날 볼 때마다 투덜거려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럴 거면 원래 연구소로 돌아가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고개를 젓는다. 어차피 리사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던 연구소였기에 그녀가 없는 지금 제대로 돌아가고 있을지 어떨지는 미지수라며.
여자 셋을 데리고 한 곳에 정착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마리와는 한 침대, 한방을 쓰면서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항상 과묵한 예린과 남자를 어려워하는 가희를 대하는 게 꽤 어려웠다. 그러나 생활의 불편함과 관계의 서먹함은 시간이 해결해주었다. 이제 가끔씩 예린도 내게 말을 붙일 때가 있고 가희도 자기 이야기를 곧잘 하곤 했다. 그다음 문제는 시골생활이었다.
시골 출신이긴 하지만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도시에서 보낸 터라 시골 물이 너무 빠진 내가 다시 손에 흙을 묻히는 건 꽤 난이도가 있는 일이었다. 평범한 시골집으로 보이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나무를 베어와 버섯 포자를 심고 개집을 지어 개를 기르면서 완연한 시골집의 풍모를 갖추는 게 목표였다. 그러는 와중에 마리가 임신을 했다. 한 침대를 쓰는 사람과 하루가 멀다 하고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 당연하려나.
"어머, 오빠. 애들이 짖는데예?"
"글쎄. 왜 그러지?"
마리는 우리가 키우는 개들을 "애들"이라고 불렀다. 새끼라도 낳는 개가 있으면 그 강아지들의 이름을 일일이 짓느라 몇 날 며칠을 고심하곤 했다. 어차피 별생각 없이 기르는 애들이라 난 별생각이 없었는데 마리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마리에게 담요를 갖다 주고 창가로 다가갔다. 점점 더 내리기 시작하는 눈발이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어놓고 있다. 그 새하얀 세상에서 우뚝 선 검은 옷이 눈에 들어온다.
"아, 도착했다."
"언닌가 보네예."
"응. 근데 개들이 왜 짖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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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도 더블데이트와 함께.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