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1 / 0471 ----------------------------------------------
Route 9
원래 개들은 예린이 나타나면 침묵을 지켰다. 꼬리를 말고 슬금슬금 피하는 게 마치 그녀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기운을 감지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렇게 짖는 건 뭔가 이상한 일이다. 현관 옆에 세워둔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눈발의 소리가 무척이나 소란스럽다.
"많이 늦었네요. 길 많이 미끄럽죠?"
"그렇기도 했습니다만...."
예린의 뒤에서 가희가 자신의 키만 한 트렁크를 낑낑대며 들고 오고 있었다. 얼른 다가가 받아준다. 묵직하다.
"뭐가 이렇게 무거워요?"
"전부 책이에요. 에헤헤."
활짝 웃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골려주고 싶은 생각이 종종 든다.
"설마 동화책? 만화책?"
"우씨. 전공서적이거든요?"
내 허리를 토닥이는 그녀의 주먹을 견뎌내며 트렁크를 현관까지 옮겨주고 다시 예린에게 돌아간다. 예린은 꼼짝도 않고 서서 한쪽을 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저기, 원래 축사 있던 자리 아닌가요?"
"에엑?!"
예린이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그래! 어쩐지 개들이 짖더라니! 우산을 내던지고 그쪽을 향해 뛰어간다. 축사를 덮은 슬레이트가 내려앉아 있었다. 설마 눈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 싶었는데 정말이다. 세상에나. 정말 무너지는구나! 황급히 싸리빗자루로 눈을 털어내고 슬레이트를 들어 올린다. 나무로 틀을 해 넣은 축사의 왼편이 와르르 무너져있었다. 다행히 다친 녀석은 없었다. 지붕을 들어 올리고 철망을 걷어낸다. 그렇게 축사 한 곳이 열리다 보니 전부 뛰쳐나가 버린다. 내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는 놈 하나만 간신히 잡아올렸다.
"인마! 거기서!"
마당 가득한 눈밭에 개와 인간의 추격씬이 벌어진다. 눈이 오면 아이와 개들은 좋아서 팔짝팔짝 뛴다고 하던가. 난 애들도 아닌데 때아닌 개들과 눈놀이를 하고 있었다. 예린이 한 마리씩 잡아서 넘겨주지 않았다면 아마 밤새도록 그러고 있지 않았을까...
"에취!"
"이것 좀 드시죠. 그리고 재채기는 마리 아가씨에 닿지 않도록 멀리서 해주세요."
"아, 예."
집으로 돌아온 후, 눈에 폭싹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이미 한기가 들고 있었다. 예린이 주는 코코아 잔을 받아들고 마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앉았다. 마리는 웃으며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임산부에게 감기라도 옮기면 큰일이다. 리사만큼 아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리는 예린의 제1종 보호대상 중 하나였다. 그런 마리에게 균이라도 옮겼다가는 ... 어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른 사람을 둘러본다. 책에 흠뻑 빠져있는 가희에게 다가가 물어본다.
"그런 게... 재미있어요?"
"그럼요. 이거 이번에 학술지에 새로 실린 논문인데요, 박테리아의 자가증식을 이종의 균에 이식해서...."
.......어쩌구.....저쩌구..... 하고 한참을 읽어준다. 난로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가희에게 괜히 말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설명하는 최신 의학 학술지 정보를 귓등으로 흘려듣는다. 숫기가 없어 평상시에는 말이 별로 없는 그녀였지만 활자를 볼 때면 소리 내 읽는 게 버릇이다. 적당한 때를 봐서 예린에게 다가갔다. 마리는 소파에 기대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가희는 여전히 그 두꺼운 책을 보고 있었다. 조용한 목소리로 예린에게 묻는다.
"이번에도.. 허탕인가요?"
"지난번 알려드린 바대로 경찰에서 데려간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저도...."
"그런가요... 수고했어요. 부산은 어때요?"
"태호와 연락은 닿았습니다.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그녀도 조만간 큰일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그녀에게 소란의 일까지 부탁하는 게 염치는 없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경찰이라.... 그렇다면 좀 어렵겠다 싶었다. 전직 조폭. 그리고 현재 조직은 없지만, 그래도 조폭인 예린에게 경찰 쪽 일을 알기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무리해서 그쪽을 파고들려다간 예린이 위험에 빠질 여지도 있었다. 나도 더 이상은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문득 한 사람의 이름이 아주 잠깐 떠올랐지만... 그녀에게 내 존재를 알리는 것도 어쩐지 부담스러웠다. 고개를 돌려보니 마리가 소파에 아예 드러누워 자고 있는 게 보였다. 담요를 가져다 덮어주고 토닥여주었다. 내 아이를 품고 있는 이 여자의 곁에서, 함부로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우와.. 진짜 정말 말도 안 돼."
난로가에서 책을 읽고 있던 가희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왜 그래요?"
그러자 그녀는 어떤 잡지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제 모교인 K대 대학병원 소식지인데요, 여기 엄청 말도 안 되는 기사가 실렸어요. 이러니 세상이 말세라고 하나 봐요. 참나."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간다. 가희는 자신이 손으로 짚은 부분을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지난 5월, 본원에 식물인간 상태로 입원한 신원미상의 A양은 지난 10월, 배가 점점 불러옴을 이상하게 여긴 의료진의 조사에 따라 임신 5개월이 넘은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식물인간이 임신? 그게 가능한가?
"당 환자는 범죄피해 국가보상제의 후원을 받아 경찰이 후견인으로 되어 있다. 본원에서는 역학조사를 펼쳐 당 환자가 본원에 입원하기 이전의 성관계로 인하여 임신한 것인지 아니면 식물인간 상태에서 임신한 것인지 파악할 계획이다. 임신 중의 여성이 사고로 식물인간 상태가 되어 출산한 사례는 있지만, 식물인간 상태에서 임신한 사례는 작년 미국에서 보고된 사례가 유일하다. 이에 경찰은 당 환자의 가족을 찾아 출산 의사를 물을 계획이지만 이 또한 여의치 않은 듯 보인다. 무엇보다 이 환자는 십 대 후반의 어린 여성으로 지난 말세교 파동 당시 교회에서 발견되어..."
"잠깐만요!"
무심하게 듣고 있던 나는 가희에게 와락 달려들어 잡지를 빼앗아 들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도 모르게 한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말았다. 어느새 잠에서 깬 마리와 여전히 말이 없는 예린, 어리둥절한 가희 모두 날 보고 있었다.
"차...찾았다."
뜬금없는 내 말에 마리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찾다니예?"
마리의 눈빛을 보며 가슴이 콱 막힌다. 말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모른 척해야 하나. 그러나... 그러나... 난 결코 모른 척할 수 없다. 설령 그게 누군가를 슬프게 하는 일이라도, 내 죄를 이대로 덮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억누르며 천천히 그 이름을 불러본다.
".....소란이...말야...."
"네에?"
모두의 놀란 표정이 날 향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