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42화 (24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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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마리의 시선을 받으며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내 아이를 품고 있는 그녀에게는 다른 누구보다 먼저 설명을 해야만 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이제는 말해야 한다. 마리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마리를 향해 잡혀갔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털어놓는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겨우겨우 털어놓는다.

소란을 돕다가 교회에 끌려갔던 일부터 시작한다. 그곳에서 교회에 저항을 하다가 갇혀있던 일. 약에 취해 두 여자를 범했던 일. 그리고 저들의 마수에서 지켜내겠다는 명목하에 소란의 목을 졸라서 뇌사에 빠지게 한 일. 그리고 기억을 잠시 잃었지만, 예린에게 이끌려 빠져나온 일까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어 푹 숙인 채 낱낱이 고한다. 내 고백을 듣고도 마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말하고 끝으로 사과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땐...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가 저지른 일이야. 정말 미안해."

"오빠야."

고개를 들고 마리를 쳐다본다. 굳은 표정이긴 하지만 눈가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마리는 한참을 주저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만약 저 기사에 실린 게 그 소란이라는 아가 맞다면요.... 그럼 그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오빠 아이겠지요?"

"아마도..."

그러자 마리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그럼 저한테 미안해하실 필요가 없지예. 그 아이에게.... 소란이라는 아이에게 사과하셔야죠. 전 괜찬아예."

"마리야...."

조금 울컥해졌다.

"그리고 저도 이렇게 되고 보니 알겠어예. 그 의식이 없는 아이도, 자신의 아이만큼은 지키고 싶을 거 아입니까.. 그 마음은 분명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러면...."

"가서 데려오세요. 불쌍한 아이이고 또 우리가 모른 척할 수 없는 아이 아입니까.."

"정말 괜찮겠어? 정말..."

그러자 마리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지는 마, 그렇게 생각했심더. 언니라면 분명 그랬을 기다. 그라고도 남을 사람이다. 설령 오빠에게 다른 여자가 있어도 나만 확신이 있다면 아무 문제없다고예. 여기 있는 건 저지만예, 제가 말했잖아예. 저나 오빠야한테나, 늘 언니가 함께 인기나 마찬가지라고예."

아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리를 품에 안고 고맙다고 속삭여주었다. 내 아이를 품고 있는 이 여자는, 나의 결함조차 품을 그릇을 가지고 있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느라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살아온 나는 이제야 어떤 길 하나를 정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길이 결코 평탄하거나 쉬운 길은 아니겠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겠지만, 날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떻게든 해나갈 것이다. 마리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참 많다.

내 계획을 예린과 가희에게 털어놓았다. 가희는 조금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수긍했다. 그녀는 자신이 소란을 돌볼 수 있다고 대답했다. 문제는 예린이었다. 그녀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 얼굴은 표정을 읽기조차 쉽지 않았다. 마리가 예린에게 몇 번이나 거듭 물어보고 나서야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하기 시작했다.

"바깥세상이... 벌써 안전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안전하지 않다는 건 무슨 뜻이죠?"

"송 부장... 그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의 아버지를 해하고, 또 하나의 자신이었던 리사마저 죽음에 이르게 한 남자의 이야기이니 불편할 수밖에 없다. 예린에게 눈짓을 보내 잠시 말을 멈추게 한 뒤, 마리를 방으로 돌려보냈다. 가희에게 마리를 부탁하고 다시 예린 앞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호가 전해 온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지금 조직을 제대로 정비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갈라지면서 떨어져 나간 이들도 적지 않은 데다가 그 자신도 조직 정비보다는 배신자 색출에 더 열을 올리고 있으니까요."

"배신자라니. 자기 자신이 가장 큰 배신을 했으면서...."

"그놈 기준에서는 아버님과 리사가 배신자였겠지요."

"둘 다... 이제는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마리 아가씨가 남아있습니다. 게다가 송 부장은 리사의 죽음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어째서 조직과는 상관없는 마리를 노리는 걸까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리사가 백당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리사의 죽음이 조직을 결정적으로 쪼갠 사건이라고 한다면, 그녀의 쌍둥이 동생인 마리는 그런 조직을 다시 봉합할 수도 있는 인물인 것이다. 그녀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상징이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힘이다. 송병구는 그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은둔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예린 씨가 나한테 했던 말 생각나요. 송 부장이 가장 두려워했던 건 리사. 그리고 나라는 놈은 그런 리사가 제일 아끼던 사람. 또한 리사의 그림자인 성예린이 첫 번째로 보호하고 있는 사람. 그것 역시 나. 지금 생각하니 이건 마리가 나와 함께 있다는 이유도 포함된 거겠죠?"

"네."

"그래서 예린 씨는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내가 밉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보호하겠다고 했었지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는가 봐요."

예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종종 침묵으로 긍정을 대신한다.

"아마도 내가 세상으로 나가게 되면 송 부장의 추적을 받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마리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 그걸 염려하는 거겠죠."

"잘 아시는군요."

그걸 잘 알면서도 지금 바깥세상으로 꼭 나가야겠냐는 핀잔이다. 예린이 좀 더 남을 비아냥거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말투가 더 공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린은 짧은 말 한마디에도 무게를 담는 여자였다.

"후우. 그렇지만요, 예린 씨. 예린 씨는 살면서 후회라든가... 뒤에 남기고 온 무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해 본 적 없나요? 그게 눈에 밟히면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기분 말이에요."

예린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지금 리사가 떠올랐다는 거에 내가 가진 모든 걸 걸어도 좋았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더 밀어붙이기로 했다.

"만약, 리사였다면."

아주 잠깐이지만, 예린의 몸이 흔들렸다. 선글라스 너머 눈빛은 또 얼마나 안광을 발하고 있을 것인가.

"리사였다면, 아마도 그랬을 거예요. 자신이 위험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쉽지 않은 길을 걸었어요. 저기 바깥세상에는, 그래요. 예린 씨가 우려하는 것처럼 우릴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겠죠. 그렇다고 저곳에 외롭게 있는 아이를 계속 방치해 둔다면, 우리는 그저 안전한 것만으로 괜찮은 건가요? 사랑했던 사람들을 내버려두지 않는 것. 그게, 그게 리사 뒤에 남겨진 우리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저질러 버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할 말을 다 쏟아낸 후 예린의 반응을 기다렸다. 마리와 가희도 예린만 쳐다보고 있었다. 예린은 그대로 조각상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굳어있었다. 그녀는 잠시 후, 긴 한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한석 씨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그리고 마리 아가씨는 한석 씨가 하자는 건 무엇이든 할 분이니... 제가 반론을 내봐야 의미가 없겠군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는 예린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마리와 가희는 방으로 간 게 아니라 거실 한편에 서서 우리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다. 마리와 난 서로 마주 보았다. 쓸쓸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가볍게 입 맞추었다. 솔로 앞에서 염장이 심하다고 가희가 투덜거렸지만, 못 들은 척했다.

며칠 후, 눈이 모두 그치고, 도로에 눈이 녹을 때쯤 나와 가희는 길을 나섰다. 목적지의 특성상 예린을 동행하기는 곤란했고 마리 역시 장거리 이동을 하기에는 어려운 몸을 하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서울로 향한다. 아침을 먹고 출발했고 점심은 휴게소에서 간단히 때웠다.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도착했다. 그래도 약속한 시간에는 제대로 온 듯하다. 입구에 걸린 "서울중앙지방검찰청"라는 고딕체 글씨가 무척이나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가희와 함께 정문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가야 하나 두리번거리는데 맞은편에 안내데스크 같은 곳이 보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채송화 검사라고.... 미리 연락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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