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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접수처의 아가씨가 수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연락을 취했다. 잠시 후, 내가 올라가야 할 방의 층과 번호를 알려주었다. 감사를 표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1203호실 앞에 섰다. 문에 붙어있는 이름표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노크한다.
"들어오세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좌우에 놓인 책상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꽂힌다. 검사실에는 검사만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양쪽으로 책상이 놓여 있고 책상마다 사람이 한 명씩 앉아 있었다. 책상의 맞은편에 수의를 입고 앉아있는 분은 아무래도 여기 소속이 아니겠지? 그리고 정면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반년 만에 만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꾸벅했다.
"아...안녕하세요."
그녀의 표정은 기묘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아저씨에게 말했다.
"박 사무관님. 안쪽 비어있죠?"
"예."
"최한석 씨. 이쪽으로 오시죠."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집어 들더니 몸을 돌려 한쪽 벽에 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검사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 등 뒤에 꽂히는 것을 따끔따끔하게 느끼고 있었다. 가희에게는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안쪽은 취조실이나 뭐 그런 곳은 아니었다. 긴 소파가 마주 보고 두 개 놓여있었고 한쪽에는 커피메이커도 있었다.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기 좋게 생긴 곳이었다.
"커피, 괜찮아요?"
"아, 예."
송화가 가리킨 대로 자리에 앉자 그녀는 커피 두 잔을 들고 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내게 한 잔을 내밀고 자기도 홀짝거린다. 우리 둘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커피를 어느 정도 마시고 나서야 송화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아, 예... 잘 ....지내셨어요?"
아무 생각 없이 대답을 해놓고 나서야,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맞은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잘? 하아....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한 거야?"
"죄송합니다."
"당신이 죄송할 거 없어. 그곳에 들어간 건 내 판단이고, 당신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리고 당신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것도 나니까."
그녀와 함께했던 밤, 그리고 그다음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차마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볼 수 없다. 귓가에 와 닿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지금도 가끔은 당신을 원망하곤 했어. 그러면 안 된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당신이 왜 날 지켜주지 못했을까.... 그런 원망을 했어. 만약 그 소란이라고 하는 아이가 잡혀갔어도 당신이 그렇게 가만히 있었을까...."
"정말..... 죄송합니다."
"미안해하지 말라니까!"
탁자를 거칠게 내려치는 그녀. 그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이쪽이 더 미안하잖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간다. 흠칫 놀라며 몸을 빼는 그녀에게 팔을 뻗어 안아준다.
"무...무슨 짓이야!"
"그냥...그냥요. 그때 정말 미안했고...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그 말을 하러 왔어요. 정말입니다."
"니가...니가 여기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난 얼마나 그 기억이 생생하게 다시 되살아나는지..."
"알아요! 아니까요. 그러니까요... 정말 미안합니다."
내 팔에서 나가려고 몸부림을 치긴 했지만, 그건 정말이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그녀는 몸에 힘을 주어 빼내려고 하지도 않았고, 팔로 나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냥 말없이 내 품에 안긴 채,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모르긴 몰라도 커피가 완전히 식어버릴 정도의 시간이 흐른 모양이다. 커피만큼이나 차가워진 송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
"뭐가요."
"반년 만에 이렇게 나타난 이유가.... 단지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온 건 아니지 않아?"
그녀는 몸을 빼냈다. 이번에는 나도 막지 않았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했다. 징벌실에 같이 있을 때는 그럴 경황이 아니라 잘 몰랐는데 목선이 정말 예뻤다. 지금의 그녀는 머리를 꽤 촘촘하게 모아 틀어올리고 있었다.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에 잠깐 시선을 빼앗긴다.
"어제 네 전화 받고.... 미리 준비해두었어."
"이건....."
"그래. 소란이에 대한 서류야. 네가 데려가겠다고 여기 온 거 아니었어?"
어제 그녀에게 찾아가겠다고 연락을 취하긴 했지만, 소란이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그냥 찾아가겠다고만 했고 그녀도 시간을 알려주며 맞추어 오라고 했을 뿐이다. 탁자 위에 놓인 서류철을 받아 펼쳐보니 소란이에 대한 조서와 여러 기록이 나온다. 가족은 모두 행방불명....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짐작은 가지만 증거도, 증인도 없다. 소란이는 이제 천애고아가 되었다. 다시 한 번 울컥하지만, 송화의 마음 씀씀이에 고개를 먼저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보살펴주시고...."
"내가 보살핀 게 아냐. 원래 국민은 범죄로 입은 피해를 국가로부터 보상받게 되어있어. 절차대로 따랐을 뿐이야."
차가운 그녀의 말투지만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것도 이것입니다만, 사실은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뭔데?"
"저기... 이런 거 여쭤봐도 괜찮습니까만..."
여러 번 머릿속에서 되뇌었지만 막상 말로 하려니 참 힘들었다. 송화가 거듭 재촉하고 나서야 겨우 말문을 뗀다.
"저기, 채 검사님은..... 지금 정기적으로 관계를 갖는 상대가 있습니까?"
"...관계?"
"그러니까, 성관계를....."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나한테 소리친다.
"너, 이 자식 나를 뭘로 보고....."
"아뇨. 채 검사님. 그런 이상한 의도가 아니라요..."
"볼일은 끝났어. 당장 사라져!"
황급히 그녀를 붙들고 통사정을 한다. 방방 날뛰면서 나를 발로 차려는 것을 겨우 진정시키며 내 원래 목적을 전한다.
"......해독제?"
"굳이 설명하자면 면역체계 회복 및 약물중화제라고 합니다. 근본적인 치료는 안 되지만 증상을 약화시키고 긴 시간이 걸리는 회복기간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당신, 선생 한다고 하지 않았어? 사실은 약장수야?"
"그런 건 아니구요. 같이 오신 분이 그쪽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하아.... 그런 건 좀 먼저 말하고 시작하라고. 근데 같이 오신 분? 조카나 동생 아니야? 그 얼굴이 전문가?"
가희가 이런 취급 받는 것에는 익숙하다. 워낙 생긴 게....
"으음. 그분이 말씀하시길 만약 정기적으로 관계를 맺는 상대가 있다면 굳이 약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 이야기는 좀 닥쳐주지 않을래?"
"네."
송화에게 부연설명을 좀 더 한 후에 문을 열고 가희를 불렀다. 아저씨들에게 둘러싸여 과자를 얻어먹고 있던 그녀가 이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송화는 아주 잠깐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가희가 가방을 열고 주사기와 고무 밴드를 꺼내자 말없이 팔을 내밀었다. 채혈이 끝난 후, 가희가 말했다.
"분석을 하고, 농도 체크가 끝나면 그에 맞게 조제된 약을 보내드릴게요."
송화는 가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아.. 대한민국 검사가 불법 의약품의 신세를 지게 되다니.... 이래서야 내가 남 말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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