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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44화 (24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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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송화의 반응을 본 가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보내지 말까요?"

"누가 보내지 말래?"

"혹시 지금은 어떤 식으로 성 충동을 해소하고 계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니면 정기적으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파트너를 구하시는 것도 증상 완화에 도움이...."

"이 꼬맹이가 너까지!!!"

팔뚝을 누르고 있던 송화가 눈을 크게 뜨고 일갈하자 가희는 황급히 내 등 뒤로 숨었다. 송화가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물었다.

"너도, 저 꼬맹이가 만든 약으로 치료된 거야?"

가희의 분석 결과는 그랬다. 바텐더의 약. 그 약은 신체에 곧바로 적용되어 그 순간 쾌락에 빠지도록 만들어 버리는 강력한 최음제인 동시에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떤 내성, 그러니까 음란한 행위에 대한 어떤 도덕적인 기준 같은 것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말로만 들으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소리지만 나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약을 하고 난 후 소란과 관계를 가지면서 끊임없이 느꼈던 파괴적 충동, 욕구 같은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망은 약을 하고 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리마인딩 된다. 이걸 해소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정기적인 섹스 파트너가 있어 욕망이 해소되던가 그게 아니면 약으로 중화를 시켜야 한다는 게 가희의 의학적 소견이었다.

맨 처음, 송화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질문을 한 까닭도 그래서였다. 만약 그녀가 파트너가 있다면 이런 약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 내 경우에는 마리가 그런 나를 보듬어 준 셈이고....

"아뇨. 저는.... 상대가 따로 있었습니다."

"설마? 저런 꼬마랑? 너, 그런 취향이었어?"

가희가 귀여운 얼굴이기는 하지만, 몸매라든가 성격이라거나... 암튼 나랑은 그런 쪽으로 맞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한 집에 산 지도 꽤 되었는데, 한 번도 그녀를 그런 쪽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걸 떠올렸다.

"에엑. 아뇨. 다른 사람입니다."

그러자 송화가 내뱉듯이 말했다.

".......나쁜 자식."

"에엑?"

"혼잣말이야. 이제 볼일 전부 끝났으니 빨리 꺼져."

송화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우리를 내보냈다. 말과 동작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우리에게 수사관을 따로 붙여주어 우리가 병원에서 소란을 만날 수 있게 수속을 돕도록 했다. 감사를 표하고 물러났다. 병원으로 가니 미리 연락을 받은 의료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를 받아 어떤 병실로 들어선다. 병실 안의 광경을 보자마자 목이 멨다.

"소란아....."

이제 손자국은 남아있지 않지만.... 앙상한 녀석의 몸을 보고 있노라니 잊고 있던, 애써 감추고 싶던 죄책감이 와락 밀려왔다. 호흡기는 하고 있지 않았지만, 녀석의 배와 가슴 쪽으로 각종 센서가 부착되어 있었다. 마리만큼 솟아오른 배도 눈에 띈다.

"자력 호흡이 가능한가 보죠?"

뒤따라온 가희가 옆에 있는 담당의사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원한 직후와 비교하면, 지금은 아주 많이 좋아졌습니다. 지난달부터는 시범적으로 하루에 몇 시간씩 호흡기를 떼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떼고도 문제없습니다. 다만 영양 공급을 위한 튜빙만 계속하고 있구요."

그 밖에도 뭔가 의학적인 조치와 관찰 결과에 따른 대화가 오갔지만, 그건 가희의 몫이지 내 몫은 아니었다. 양해를 구하고 침대로 다가가 소란의 손을 가만히 쥐어본다. 가느다랗고 작은 손가락... 이 손을 한번 놓았던 내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겪었던 수많은 일들을 하나하나 들려주고 싶다. 자세를 낮추고 소란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기분 탓일까. 소란의 눈꺼풀이 살짝 흔들린 것 같기도 하지만 주변 사람들 아무도 보지 못했단다. 가희와 수사관이 사무적인 절차를 처리하는 동안 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앉아 소란의 손을 가만히 잡고 있었다. 무연고자였던 그녀의 보호자로 내 이름이 등록된다. 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인다.

"그동안 혼자 두어서 미안해, 소란아."

작은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겨울의 차가운 햇빛이, 병실을 밝고 따뜻하게 만들고 있었다. 잠시 후, 가희가 병실에 들어오며 말했다.

"담당 의사의 의견은 가능하면 여기서 출산하는 게 안전하다고 하네요. 이 상태에서 자연분만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여차하면 제왕절개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그러려나요..."

되도록이면 소란과 함께 돌아가고 싶었지만, 녀석의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바싹 마른 가운데 배만 볼록한 그 모습이 그나마 많이 좋아진 상태라고 하니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가희와 난 일단 병원을 나섰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올라타 강원도로 향했다. 갈 길이 멀었기에 서둘러야 했다.

서울을 떠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조수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가희를 몇 번이고 흔들었지만, 잠꼬대까지 늘어지게 하고 있는 그녀는 일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둘러업고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대문에 누군가 서 있었다. 어두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만큼 큰 키를 가진 여자라는 건 실루엣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예린 씨, 왜 나와 있..."

"쉿!"

예린이 내게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예린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렇게 있기를 1분 정도 했을까. 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데, 예린이 먼저 소리쳤다.

"거기 누구야? 나와!"

허공을 향해 미친놈처럼 소리치는 그녀가 이상해 보였다. 그런데, 저쪽 길 건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세상에. 저걸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게다가 그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역시, 성예린. 날카롭군."

송화였다. 너무 놀라 뜨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내 시선을 무시했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와 예린 앞에 섰다.

"리사의 심복, 성예린이 여기 있다는 건 리사가 여기 있다는 뜻으로 봐도 될까? 안에 있어?"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던 예린이었지만, 의외의 이름에 그녀의 경계가 누그러졌다. 예린은 대답 대신 몸을 비켜 대문을 열어주었다. 송화가 안으로 들어가고 그녀도 뒤를 따랐다. 가희를 들고 있는 내가 그 뒤를 따랐다.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가며 생각했다. 조금 전, 송화의 이야기...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마리가 우릴 맞아주었다.

"오빠, 어서 오... 어머, 손님도 계시네요? 안녕하세요."

송화는 현관에 우뚝 선 채로 마리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배를 한 번 보고,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날 째려보았다. 그 시선이 어떤 비난을 담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잠시 후, 송화, 예린, 마리, 그리고 나까지 네 명은 난로 옆에 둘러앉았다. 각자의 손에는 마리가 끓인 커피가 담긴 머그잔이 들려있었고, 가희는 방에서 자고 있었다. 커피를 조금씩 홀짝이며 송화는 중얼거렸다.

"리사는... 리사는 이제 없는 거구나."

"네."

그녀에게 지난 일을 말해 준 건 마리나 내가 아니라 예린이었다. 그녀는 특유의 건조하고 담담한 어조로 말세교 교회에서 있었던 구출작전을 이야기했다. 잡혀 있는 최한석을 구하기 위해 리사는 다소 무리했다. 교회의 저항도 저항이거니와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로 인해 조직원 다수를 잃었다. 그런 와중에 부산에서 들려온 소식은 리사 아버지의 신변에 생긴 변고였다. 송 부장이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던 것이다. 남은 인원을 그러모아 부산으로 돌아갔지만, 결국 리사는 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지금도 양산 어딘가의 산속에 묻혀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송화는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렇군, 그래서 지난 몇 개월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인 거군. 하. 생각보다 흔적을 잘 지워서 추적이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이 세상에서 자신을 지워버린 거였군.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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