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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47화 (247/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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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다음 날 아침. 예린은 송화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검찰에 잡혀가겠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부산 지역에 사람을 들여보내려는 송화의 계획을 함께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린은 날 지목했다.

"한석 씨도 같이 가시죠."

"네....?"

"부산이든 검찰 쪽이든 저는 너무 얼굴이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최대한 음지에서 움직인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계가 있겠죠. 저보다 얼굴이 덜 알려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요?"

난감한 표정으로 마리와 송화를 돌아보았다. 마리는 어쩔 수 없다며 가희와 함께 있겠다고 했다. 송화는 마리의 안전을 위해 안전가옥을 수배하겠다고 했다. 내가 따라가는 문제에 대해서 송화는 별말이 없었지만, 표정만 봐서는 반대하거나 그다지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아무리 늦어도 열흘 안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아가씨."

"몸 건강해요."

"네."

"오빠도요."

마리가 싸준 옷 가방을 차에 실었다. 예린의 차 트렁크를 열었을 때, 안에 야구 배트가 여러 개 들어있는 걸 보고 자못 긴장했다. 그녀가 특별히 야구를 좋아해서 그런 걸 가지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공이나 글러브는 보이지 않았다. 나와 예린, 송화 이렇게 세 명은 한 차에 탄 채로 서울로 향했다. 차 안은 조용했다. 예린은 운전석에, 나는 조수석에, 송화는 뒷자리에 앉아있었는데 누구 하나 입도 열지 않았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을 때, 송화가 화장실에 간 사이 예린이 내게 딱 한마디 했을 뿐이다.

"아무리 채 검사님이 있다고 해도... 저는 검찰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 전에 송화가 돌아와 버려서 묻지 못했다. 우리 세 사람을 태운 차는 곧 서울에 도착했다. 송화를 중앙지검에 내려주자, 그녀는 안에 들어갔다가 한참 만에 돌아왔다. 그녀는 우리에게 몇몇 자료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어떤 공문서의 사본도 함께 넘겨주었다. 송화는 예린을 향해 다짐하듯 말했다.

"이미 천안에 이야기해두었어. 거기 가면 당신의 동생이라는 놈들을 데려갈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그리고 최한석."

"네?"

"당신은 나랑 따로 이야기 좀 합시다."

송화는 차에서 먼저 내렸다.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나를 따로 부르는 걸까 싶었는데, 예린은 내게 어서 따라가 보라며 재촉했다. 차에서 내려 저만치 걷고 있는 송화를 따라갔다. 그다지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건 아니었기에 금방 따라잡아서 나란히 걷게 되었다. 송화는 한참 말이 없다가 불쑥 이상한 소리를 했다.

"혹시, 영화 좋아해?"

"네? 영화요?"

"그래. 영화. 극장에서 보는 거."

"좋아하긴 합니다..."

갑자기 무슨 뜬금없이 영화 타령이야. 그러고 보니 영화 보러 가는 걸 좋아해서 위조 학생증까지 만들고 다니던 유진이가 잠깐 생각났다.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매주 과외하러 가던 그때가 아득하게 옛날처럼 느껴졌다.

"이 일이 끝나면..."

"끝나면요?"

"나랑 영화나 보러 가자."

"영화를..."

걸음을 멈추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왜요?"

그러자 송화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는 수사의 일환이라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아무리 내가 둔해도 그게 아닌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저기, 채 검사님. 아니, 송화 씨. 약간 주제넘을 수 있는 질문인데... 혹시, 저 좋아하세요?"

그러자 송화는 펄쩍 뛰었다.

"무슨 헛소리야? 영화 보러 가자고 하면 무조건 반한 거야?"

"영화뿐만이 아니잖아요. 어젯밤 일도..."

"어젯밤은 약에 취해서 그랬던 거고!"

"아무리 약에 취해도 여태까지는 안 그러셨다면서요. 그런데 여태까지 잘 참으시던 게 왜 굳이 저와 함께 있을 때, 못 참게 되었습니까. 정말 절 좋아하시는 거예요?"

송화는 말이 없었다. 나보다 키가 작아 그녀의 표정을 똑바로 볼 순 없었지만,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송화 씨가 좋은 분이라는 것도 알고, 저를 위해 많이 애써주셨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어젯밤 송화 씨의 손짓에 응했던 건 함께 교회에서 고생했던 기억 때문이었어요. 그때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걸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상은..."

"알아. 나도 알아. 그러니 그만해."

송화는 손등으로 자기 얼굴을 한번 훔쳤다. 우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자존심 강한 그녀가 그런 질문한 나를 곱게 내버려 둘 것 같지가 않았다.

"소란이를 굳이 다시 찾은 건, 네 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 이유도 없잖아 있습니다만, 그 아이는 가족을 모두 잃었으니까요. 돕고 싶었습니다."

"그래. 그 아이에 비해서 나는 아직도 가진 게 많지."

송화는 고개를 힘주어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눈가가 살짝 젖어있었지만, 웃는 얼굴을 꾸미는 데 지장은 없을 정도였다.

"부산 가거든 몸조심하고, 사람 조심하고... 특히 저 예린이라는 여자 조심해."

아까 휴게소에서 예린이 검찰을 믿지 못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그냥 잠자코 있었다. 송화의 말은 이어졌다.

"나도 이곳에서 급한 일 몇 개만 처리하고 나면, 곧 내려갈 거야. 일 전부를 깡패들 손에 맡길 순 없으니까. 부산이 깔끔하게 정리되면... 그때는, 술이나 한잔 하자.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네."

송화가 내민 손을 잡아 가볍게 악수했다. 그녀의 손은 작았지만, 힘이 넘쳤다. 송화는 몸을 돌려 그대로 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나와 그녀,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어떤 식으로 마주하고 있었을까. 그녀 말대로 같이 영화도 보러 가는, 그런 사이가 될 수도 있었을까. 모르겠다. 사람 일이란 한 치 앞을 모르는 거니까. 송화가 보이지 않을 때쯤 되어서 나 역시 몸을 돌려 차로 돌아왔다. 조수석에 올라타자 예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역시..."

"역시 뭐요?"

"채 검사의 제안을 거절하신 모양이군요."

"...여기서 우리 이야기가 들렸어요?"

"들렸다기보다는 그저 짐작했을 뿐입니다."

"그냥... 그렇게 되었어요."

예린은 차를 돌려 골목을 빠져나갔다. 차의 속도를 조금씩 올리며 예린이 말했다.

"무슨 제안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받아들이지 그러셨습니까. 앞으로 우리 일에 서포트를 할 사람인데."

"어, 이건 좀 개인적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에 영향을 주려나요?"

그러자 예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젯밤 하신 일보다야 영향은 적겠죠."

"....예, 예린 씨..."

"마리 아가씨에게는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역시 예린의 눈을 피할 순 없었던 모양이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창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예린의 선글라스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천안에 도착하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는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예린에게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들은 예린의 얼굴을 보자 다 같이 환호했고, 예린 역시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들어보니 그들은 바로 지난번 교회에서 체포되었던 백당 사람들이었다. 리사가 나를 구하기 위해 백당 사람들을 동원했다가 그 직후 진입한 경찰에게 많은 수가 잡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예린은 그들에게 무언가 한참을 설명했다. 사람 이름과 장소 등을 소상히 말하는 걸 듣고 있자니 그녀가 송 부장을 상대하기 위해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를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함부로 결행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부족한 머릿수 때문이었다. 아무리 예린이 날고 기는 솜씨를 가졌다고 해도 몸은 하나였다. 송화의 협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관광버스 두 대가 오더니 사람들을 태웠다. 나와 예린은 다시 승용차에 올라탔다. 우리 차와 버스는 같은 방향으로 향하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는 따로 준비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탄 차는 구불구불하게 난 좁은 도로를 한참 동안 달렸다. 해가 지고 있어서 길은 어두웠다. 그렇지만 어쩐지 낯익은 곳이었다.

"여긴..."

"이곳에서 며칠 있겠습니다."

그곳은 몇 달 전, 나와 마리가 머물던 별장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의 온기가 전혀 없는 터라 밖보다 더 추웠다. 예린은 차에서 작은 텐트와 침낭을 가져왔다.

"물은 뒷마당의 펌프를 사용하면 됩니다만, 전기나 가스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그래도 노숙하는 것보단 낫네요. 최소한 지붕과 벽이 있으니."

텐트 치는 예린을 도우려고 했더니 혼자서 할 수 있다며 거부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따로 있다. 뒷마당으로 가니 리사의 자리에 잡풀이 가득했다. 마당 한구석에 있는 창고에서 낫을 가져와서 베기 시작했다. 손에 익지 않아 조금 힘들었지만, 이내 마칠 수 있었다. 어차피 봉분이 커다랗게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묘라고 해봐야 사람 누운 것보다도 못한 크기의 공간만 풀을 베면 되었다. 한참 만에 리사가 묻힌 곳이 드러났다. 낫을 갖다 놓고, 리사 앞에 가서 앉았다. 비석 대신 두었던 커다란 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리사야."

대답은 없었다.

"리사야. 춥진 않니."

남쪽으로 내려와 보니 여태까지 살고 있던 강원도보다는 따뜻했지만,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그녀 혼자 땅속에 묻혀있다고 생각하니 가엽기 짝이 없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가만히 리사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일부터 지금까지의 일이 옛날 영화처럼, 흐린 연기처럼 흘러 지나갔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반추하다가 고개를 무릎 사이에 묻었다. 눈물이 나는 걸 애써 참아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잠깐 졸았던 모양이다. 누군가 내 어깨에 담요를 덮어 주는 걸 느끼고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니 예린이 내 옆에 서 있었다.

"날이 춥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몸을 일으키려는데 발이 저려서 잠깐 몸이 흔들렸다. 예린이 날 부축해주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녀의 가슴 쪽을 만지게 되었다.

"어, 저기,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미안해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신경이 쓰였다. 뭐랄까. 예린의 가슴은 굉장히 탄탄한 근육일 줄 알았는데, 상당히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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