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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안으로 들어가니 고체 연료 위에 코펠을 올려 끓인 물이 있었다. 예린은 작은 양은그릇에 냉동식품을 담아주더니 거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주었다.
"당분간은 이런 식사로 참아주십시오."
"맛있겠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별로 맛은 없었다. 하루 종일 장거리 운전한 데다가 텐트와 식사까지 준비한 예린의 성의를 봐서 잠자코 먹었을 뿐이다. 산속의 밤은 빨랐다. 식사를 마치고 났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어서 주변이 새까매졌다. 텐트 안으로 들어가니 침낭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밤이 되고 나니 확실히 기온이 떨어졌다. 예린은 고체 연료 하나에 불을 붙여 램프를 만들고, 거기에 유리 덮개를 씌워 텐트 안쪽에 매달아 두었다. 좁은 텐트 안은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훈훈해졌다. 각자 침낭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잠자리가 불편한 탓도 있지만,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예린 씨."
"네."
그녀는 마치 내가 말 걸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대답했다.
"그때... 리사를 잃고 나서, 나한테 그랬죠? 당신은 절 싫어한다고. 밉고, 죽이고 싶다고 말이에요."
"네."
"솔직히 그때는 당신의 기분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당신이 날 죽이고 나면 마음이 편해질 거란 소리도 너무 심한 소리라고 생각했죠. 근데, 지금 저 사람들을 보고 나니... 당신의 그때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이만한 인원을 잃어버린 채 부산의 송 부장에게 맞서다가 리사가 그렇게 된 거잖아요. 저 하나를 구하자고... 저는 리사를 지켜주지 못했는데, 그녀는 절 지키려고 그렇게 애를 썼어요. 그렇지만 이제 그런 그녀를 볼 수도, 그 마음에 보답할 수도 없다는 게 가장 슬퍼요."
"...."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이런 모자란 나를 구하려고 당신들이 그렇게..."
예린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등을 돌리고 있는 터라 그녀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이대로 대화가 끝나나 싶어 애써 눈을 감았다. 숨을 죽이고 있자니 아주 작은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풀벌레 소리, 산속 나무를 헤집고 다니는 바람 소리, 그리고 곁에서 울고 있는 예린의 울음소리... 그것은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이 포식자를 피해 어디 좁고 작은 동굴에서 몸을 웅크리고 애써 숨죽여 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강하고, 무시무시한 완력과 싸움 실력을 갖춘 그녀였지만, 내가 찌른 곳은 너무 아픈 곳이었던 모양이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부러 살짝 코 고는 소리를 내어 그녀의 울음소리를 덮어버렸다. 그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예린은 보이지 않았다. 텐트 바깥에 나와 보니 아침 식사는 이미 차려져 있었다. 혼자서 먹고 별장 주변을 산책하고 있자니 저녁 늦게 예린이 차를 끌고 돌아오는 게 보였다. 그런 식으로 그녀와 나의 기묘한 외딴 별장 생활이 이어졌다. 저녁이면 텐트 안에서 각자 침낭에서 잠을 잤고, 아침이면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럴 거면 굳이 나를 왜 데려온 건가 싶었다.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차로 돌아온 그녀를 마당으로 나가 맞이했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내게 말했다.
"한 가지,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녀는 내게 플라스틱 카드를 한 장 건네주었다. 마치 검은색 신용카드처럼 생겼는데, 표면에는 금박으로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영어로 "Paradise Hotel"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게 뭔가요?"
"파라다이스 호텔 사우나 회원권입니다."
조금 뜬금없었다.
"산속에서 안 씻고 지내는 게 더러워 보였나요? 여기서 씻고 오라는 겁니까?"
"내일부터 하루 종일 거기에서 계시면 됩니다."
"....그렇게 오래 씻으라고요?"
뒷마당 펌프로 물을 길어다 세수는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목욕을 못 한 건 아무래도 심했던 모양이다. 팔을 들어 내 옷의 냄새를 맡으려고 하자 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이 호텔 사우나에 송 부장 심복들이 자주 간다고 합니다. 그들이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있는지, 그 시간을 저한테 알려주시면 됩니다."
예린은 뒤이어 접혀 있는 종이를 꺼냈다. 종이를 펼치자 그 안에는 몰래 찍은 게 분명한 스냅사진이 여러 장 들어있었다. 예린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가며 이름과 특징을 알려주었다. 수첩을 꺼내어 적으려고 하자 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기록을 남기는 건 위험합니다. 만약 잡혔을 때, 이런 사소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심을 크게 사서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똑똑한 분이니, 모두 외우실 수 있을 겁니다."
예린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름을 모두 일러주고, 다시 또 처음부터 한 명 한 명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름을 외운 사람은 넘어가고, 못 외운 사람은 다시 또 천천히 일러준다. 성실한 학생은 못 되었지만, 그녀는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었다. 다음 날 새벽, 예린은 내게 정장을 한 번 내주고 부산 외곽까지 태워주었다.
"지난밤에 말씀드린 주의사항을 잊지 마십시오. 한석 씨에게 바라는 건 많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의 시간대만 정확히 파악하시면 됩니다."
"알았어요."
"그럼 전 이만. 저녁에는 미리 말씀드린 곳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예린이 떠난 후, 나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파라다이스 호텔로 향했다. 가면서 밤새도록 외웠던 사람 얼굴과 예린의 이야기를 복기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대략 이러했다.
송 부장이 김 회장의 자리를 찬탈한 후, 그는 신경질적으로 보안에 신경 썼다. 외부 노출 자체를 극도로 꺼리며 거의 음지 생활을 해왔다. 이유는 멀리 있지 않았다. 김 회장 추종파가 무서웠던 까닭이다. 예린을 포함하여 그녀가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백당은 물론 이 부산 바닥에서 최고 주먹들인데, 송 부장 쪽으로는 이 중에서 단 한 명밖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닥치는 대로 사람을 긁어모아 머릿수를 늘리는 데 집중했다. 사람이 많아지면 돈이 필요한 법. 자금 관리도 애초에 리사가 하고 있던 터라 백당의 자산 중 송 부장이 차지한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바텐더를 영입하고, 환각제 유통에 손대게 되었다...
속 빈 강정.
예린은 송 부장의 지금 상태를 그렇게 설명했다. 워낙에 백당이라는 이름이 부산 전체에 가지는 위력이 대단하니 반년 가량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이름마저 위태로운 상태였다. 예전 같으면 엄두도 못 내었을 다른 조직들이 백당을 툭툭 건드리고 있는 와중이라고 했다. 예린은 사상누각인 지금의 백당에서, 밑에 있는 주춧돌들을 하나씩 적출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을 외과수술처럼 적출하려면, 혼자 있는 시간이 언제인지 알아야 하는데, 같은 백당에서 있던 사람들은 얼굴이 알려졌기 때문에 절대로 근처에 갈 수 없었다. 그들에게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그러면서도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예린은 그래서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이 사우나에 들어가야 하는 거라고 설명했다. 호텔에 도착해서 지하로 내려가니 사우나 입구가 보였다. 입구에 서 있던 안내원 아가씨가 무척 예뻤다. 그녀에게 회원권을 제시하니 단말기에 긁었다.
"네, 어서 오십시오. 박영호 님."
"네? 아... 네에..."
순간 멈칫했지만, 내 본명으로 회원권을 만들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딱히 신분을 증명해야 하는 것도 아니어서 바로 입장이 가능했다.
"와..."
들어가자마자 나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사우나라고 해서 그냥 커다란 대중목욕탕 정도를 생각하고 있던 내 생각을 완전히 수정해야만 했다. 내부는 거대한 욕탕, 아니 욕탕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할 정도로 커다란 수영장이 서너 개 배치되어 있었고, 벽과 천장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신전처럼 각종 부조가 양각되어 있었다. 상단에 붙어있는 표시등이 각종 시설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에어로빅 풀, 수중 마사지 풀, 원적외선 풀, 기능성 풀, 피트니스 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다시 입구로 돌아가 내부 안내용 카탈로그를 뽑아왔다. 처음 와보는 티를 내는 거라 안 그러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카탈로그를 처음부터 꼼꼼히 읽어보니 내부에는 식당과 커피숍까지 있었다. 하루 종일 사우나 있으면 밥은 어디서 먹냐고 물어봤을 때, 예린이 대답을 안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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