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0 / 0471 ----------------------------------------------
Route 9
잠시 후, 시간이 다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운을 다시 입었다. 방에서 나와 대기실 소파에 한참 동안 걸터앉아 있었다. 예린은 마사지가 이런 서비스라는 걸 알고도 날 여기로 보낸 걸까. 여자인 그녀도 이런 걸 받아봤다는 건가...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렇게 한참을 골똘하게, 그리고 멍하게 있었는데 문득 앞에 있는 남자와 자꾸 눈이 마주쳤다. 처음에는 내가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말았다. 그는 이건 누구지하는 표정이면서도 마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 다음 마사지실에서 나와 욕탕으로 걸어가다가 걸음을 딱 멈추고 말았다.
사진 속의 인물이었다!
예린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사우나에 오는 게 맞았다. 다시 마사지실로 갈까 하다가 이미 나온 사람이 또 들어가는 건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았다. 홀에 있는 긴 의자 중에서 마사지실 입구가 잘 보이는 쪽을 찾아 앉고 신문을 하나 펼쳤다. 눈은 신문 지면을 훑고 있지만, 신경은 온통 마사지실 입구에 향해 있었다. 약 30분 정도 지났을까. 세 명의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함께 나오는데, 바로 예린이 보여주었던 사진 속의 남자들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진구, 청연, 태준이었던가... 며칠 전부터 머릿속에 욱여넣다시피한 인물들의 프로필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들에게 다가가 무슨 대화를 나누나 들어볼까 싶었는데, 딱히 그럴 필요도 없었다.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워낙 큰 소리로 떠드는 통이라 그들의 대화 내용은 아주 멀리서도 잘 들렸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그들은 지난번 가졌던 회식에서 2차를 갔는데, 거기 나왔던 아가씨들 서비스가 별로였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천박한 이야기였다. 나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옆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에잉. 추잡한 놈들... 쯧쯧."
고개를 돌리자 내 옆 긴 의자에 누워있는 중년 남자가 책을 보면서 혀를 차고 있었다.
"지들 권세가 높을 줄 알고, 아주 천지 사방에 저 잘난 듯이 유세 떨고 다니는데... 저러다 큰코다치지."
시선은 안경 너머 책을 향해 있지만, 명백히 저 백당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지 싶었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어르신, 저 사람들이 누군데 이렇게 시끄러워도 아무도 제지를 안 하죠?"
그러자 중년 남자는 안경을 잡아다 살짝 내리고 이마를 찌푸리며 날 보았다. 노안이라 가까운 곳은 잘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자네는 누군가? 누군데 저 사람들을 못 알아봐?"
"아, 그게..."
이럴 때를 위해 짜둔 설정이 나올 차례였다. 양산산업단지에서 물류업을 하는 사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중년 남자는,
"양산? 양산이면, 어디 보자... 최 사장 알아?"
"네? 어느 최 사장 말씀인가요?"
"아, 거 왜 있잖아. 삼우실업의 최 사장. 삼우실업도 몰라?"
알 리가 있나. 나는 황급히, 서울에서 양산으로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었으며, 부산으로도 사업을 확장해볼까 고려 중인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그 남자는 자신이 서부산유통단지를 꽉 잡고 있는 부동산업자라며, 부산에서 기업 이전이나 확장을 하려면 자기를 안 통하고는 불가능하다면 큰소리를 팡팡 쳤다. 그가 건네준 명함에는 "송곳부동산"이라는 상호와 함께 "대표 이사 최규석"이란 이름이 적혀있었다.
"상호가 특이하네요."
"그래. 우리 부동산 통하지 않고는 부산에 어디 송곳 하나 꽂을 자리 있나 알아보라고. 없어, 없어."
"아, 예에."
그의 말이 사실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런 사람일수록 상대하기는 쉽다. 상대의 비위를 살살 맞춰주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쏟아내게 되어있다.
"자네는 명함 없어?"
"옷을 갈아입으면서... 다 두고 온 모양입니다."
"쯧쯧. 젊은 사람이 말이야. 사업하는 사람은 빨가벗고 있어도 명함은 언제든 꺼내야 하는 법이라고. 요즘 젊은 사람들은 사업하는 자세가 안 되어있어, 자세가."
그러면서 그는 부산의 누가 사업을 하는데 기본이 안 되어있어서 망했다느니, 자기 이야기를 안 들어서 망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빨가벗고 있으면 명함은 대체 어디다 넣고 다니라는 건지 궁금했지만, 사소한 궁금증은 잠시 미루어 두었다. 규석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그러다가 요즘 젊은 것들 비난으로 넘어가더니 IMF 와서 우리나라가 망한 것도 젊은 놈들 탓이라는 결론으로 치닫는다. 그게 어떻게 젊은 사람들 잘못이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난 여기에 정보를 얻으러 온 거지 토론을 하려고 온 게 아니었다. 꾹 참고 듣기만 했다.
"그래서 말야, 어디 보자. 쟤네들 말이지? 자네는 서울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모르겠구만. 부산에서 뭔가 하려며 말이야. 저 사람들 안 통하고는 이야기가 안 돼. 사업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게 뭐겠나?"
"글쎄요. 땅인가요?"
"땅이야 나한테 돈만 주고 말만 잘하면 아주 좋은 곳으로 얻어주지. 그럼 말일세, 땅이 있다고 치자고. 그러면 또 뭐가 필요하겠나?"
"일할 사람이 필요하겠죠."
"그래. 저놈들은 사람 장사하는 놈들이야. 백당이라고. 아주 큰 조직인데, 호텔 청소부 구하는 일부터 하다못해 나랏일 하는 사람까지도 쟤들 안 통하고는 못 구한다고 보면 돼."
"사람 장사요....?"
"암. 가장 이문이 큰 일이지."
문득 리사가 생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조율하는 일"이라고 설명했었다. 그게 그런 의미였던 말인가. 그나저나 나랏일 하는 사람까지 저들이 쥐고 있다니. 송화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속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저놈들이 요즘은 미쳤어. 아무리 급해도 말이지, 지들 사업기반을 지들이 까먹고 있다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그건..."
여태까지 잘 떠들던 양반이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칭, 부산의 땅을 다 쥐고 있다는 양반도 무서운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시선을 약간 낮추더니, 무슨 역적모의라도 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약을 팔고 있다고 하더라구. 게다가 아주 쎈 걸로."
"....뽕이나, 뭐 그런 건가요?"
"예끼, 이 사람아. 그 수준이면 말을 말어. 한번 맞으면 지 에비에미도 못 알아보고 흘레붙고 아주 난리도 아니여. 지금 부산에 그걸로 아작난 집안이 한두 채인 줄 알어?"
"근데 그게 왜 사업기반을 까먹는 일이라는 거죠?"
"쯧쯧. 이 양반. 사업한다더니 세상을 볼 줄 모르는 구먼. 지금 당장이야 곶감 빼먹기 마냥 약 팔아서 번 돈이 아주 달콤하겄지. 그런데 말이여, 그렇게 죄다 약쟁이 만들고 나면, 지들이 팔아먹을 사람이 남아나겠냐 말이여. 원래 사람 장사하는 놈들이."
"....이해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백당 사람들에 대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마사지실 근처에서 노닥거리다가 오후 3시쯤 되자 사라졌다. 저녁에 예린에게 돌아가 오늘 있었던 일과 부동산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모두 전해주었다. 예린은 잠자코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서는 새로운 정보를 알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예린의 태도를 봐서 그다지 새로운 건 없는 모양이었다. 대화를 끝내기 직전,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그녀에게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 예린 씨."
"네."
"마사지실로 가 보라는 건... 그들이 거기 나타날 줄 알기에 그랬던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것뿐이에요?"
"네."
예린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렇군요."
설마 마사지실 안에서 일어나는 내용까지 다 알면서 보냈을까, 그런 것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냈다. 그러나 그날 잠들기 직전, 예린이 무심코 흘리듯 말했다.
"오랜만에 잘 빼고 오셨을 테니, 푹 주무시겠군요."
"....뭐, 뭘 빼요!"
예린은 침낭에 쑥 들어가더니,
"안녕히 주무십시오."
이 말을 끝으로 뒤돌아 누웠다. 으으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