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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그러자 여태까지 멍 때리고 있던 그놈은 허둥거리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도 못내 아쉬운 듯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감탄한다. 문이 닫혔다. 바깥의 소란이 점점 잦아들었다. 녀석들은 다른 곳을 뒤지러 간 모양이었다. 내 위에 드러누워 있던 소미는 조용히 말했다.
"이제 일어나셔도 됩니다."
"아, 네, 네."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다가 내 위에 있는 소미가 구를 뻔했다. 깜짝 놀라 그녀의 허리를 붙들고 바로 앉혀 주었다. 그러고 나서 일어났더니 몸에 걸친 가운에서 물이 줄줄 떨어졌다.
"일단 가운은 벗으세요. 벽에 있는 선반을 만져보시면 작업복이 있을 거예요. 그걸 입으세요."
소미의 말대로 가운을 벗으려다가 멈칫했다. 사우나 안에서 입던 가운이라 안쪽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러자 소미가 웃었다.
"저는 보이지 않으니, 걱정 마세요."
"아... 네. 죄송합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벽장에는 사우나에서 일하는 작업자들이 입는 옷이 몇 벌 있었다. 그중에서 몸에 맞는 걸 고른 후 가운 대신 입었다. 가운 주머니에 들어있는 회원카드를 꺼내 지금 입은 옷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는 동안 소미는 정말 목욕을 하고 있었다. 욕조 옆에 놓인 스펀지를 들어 바디로션을 바르더니 몸을 닦고 있었다.
전에 밝은 곳에 볼 때도 몸매는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보니 그녀의 몸매 라인이 더 뚜렷하게 도드라졌다. 가냘픈 목선을 타고 내려와 탄탄하게 뻗은 어깨는 쭉 단단해 보였고, 마사지로 단련된 게 분명한 팔뚝에는 보기 좋은 근육도 살짝 붙어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른 몸과는 다르게 그녀의 가슴은 상당히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앞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넋 놓고 보고 있다가 그녀의 스펀지가 가슴 윗부분을 닦아내는 걸 알아차리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내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그녀를 이렇게 보고 있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사장님."
"네?"
"등 닦는 걸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녀는 정확히 내 쪽을 보며 스펀지를 살짝 내밀었다. 아니다. 본다는 건 어폐가 있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고, 그저 내가 있는 쪽을 향해 얼굴을 돌렸을 뿐이다. 소미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지금 바로는 못 나가세요. 저 사람들이 분이 풀릴 때까지 여길 다 뒤집어엎을 겁니다. 지금은 기다리셔야 해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스펀지를 받아서 욕조 옆에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몸매는 더욱 예술이었다. 가슴 쪽에 시선이 가는 걸 애써 참으며 손을 뻗어 소미의 가냘픈 등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스펀지를 통해 전해지는 그녀의 피부는 정말 고왔다. 보글보글 일어나는 거품만 아니라면 직접 만지고 싶을 정도로 매끄러운 등이었다. 내 손길이 등의 곳곳에 닿자 소미는 살짝 웃었다.
"왜 웃으세요?"
"항상 남을 만지는 일을 하는데, 막상 남이 절 만지니 기분이 이상해서요."
그녀의 직업은 마사지사. 게다가 그냥 몸만 만지는 게 아니라 은밀한 곳까지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타인의 손길을 못 견뎌 했다. 소미는 이제 됐다며 스펀지를 달라고 했다. 스펀지를 전해주며 그녀와 손가락이 살짝 닿았다. 물이 따뜻해서 그런가. 손끝이 아주 따뜻했다.
"소미... 씨라고 했었죠?"
"네."
"저를 왜 구해주신 거죠?"
그러자 여태까지 대화에 막힘이 없던 그녀가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그러게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제가 먼저 물어봤는데요."
이번에도 소미는 까르르 웃었다. 마치 소녀 같은 웃음이었다.
"모르겠어요. 저도 남한테 이런 식의 친절을 베푼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음... 뭐라고 할까. 사장님은 냄새가 너무 좋았어요."
"냄새요?"
나도 모르게 겨드랑이 쪽에 코를 파묻고 냄새를 맡았다. 내 동작을 눈치챘는지, 소미는 또 웃었다.
"아뇨.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게 아니라... 그냥 뭐랄까. 눈이 보이는 분들은 잘 못 느끼겠지만, 저 같은 사람들은 청각만큼이나 후각에 아주 예민하거든요. 사람마다 원래 독특한 냄새가 있어요. 사장님은 그런 냄새가 참 좋으세요."
"향기도 아니고 냄새라고 하니... 뭔가 냄새나는 느낌이에요."
내 말에 소미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표현이 이상했네요. 그렇지만 향기까지는 아니고요. 호호. 정말 좋은 냄새예요. 그립고, 기분 좋은 냄새요. 그래서 아까 문 앞에 오셨을 때도 그 냄새가 나서 저도 모르게 문을 열었네요."
그녀는 그러면서도 내가 왜 쫓기고 있는지, 쫓는 사람이 누구인지 일절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말투가 이쪽 분이 아니신데, 서울 분인가 봐요?"
그녀에게는 딱히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네. 사정이 있어서 잠깐 여기 내려왔어요."
"그러시구나. 그러면 앞으로 계속 찾아오시는 건가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지금 큰일을 앞두고 있는데, 그게 잘 되면... 아니, 잘 안 돼도 그렇고... 여기 계속 오기는 힘들 것 같네요."
"저런. 약간 아쉽네요. 지난번처럼 오셔서 절 지명하시면 좋을 텐데."
그녀의 말투는 흔한 영업성 멘트와는 달랐다.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게 재차 물어보았다.
"사우나는 안 오시더라도... 부산에는 계속 계시는 거죠?"
"그것도 모르겠어요."
"저런...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 되시길 빌어요."
말을 마친 소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기로 몸을 헹구더니 선반에 있는 바구니에서 수건을 꺼내 몸을 닦았다. 같은 바구니에서 팬티와 브래지어를 꺼내어 다시 착용하더니 아까와 달리 원피스 말고 다른 옷을 입기 시작했다. 워낙 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인지경으로 어색하지 않게 행동하니 쳐다보고 있는 내가 되려 머쓱할 지경이었다.
소미는 약간 헐렁한 나팔바지를 입고 위에는 꽃무늬 남방을 입었다. 그리고 남방 주머니에서 선글라스와 작은 막대기를 꺼냈다. 막대기는 여러 번 접혀있는 물건이었다. 그걸 착착 펴자 꽤 기다란 지팡이로 변했다. 그제야 그것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보행용 흰지팡이라는 걸 알았다. 선글라스를 얼굴에 낀 소미가 내게 팔을 내밀었다.
"팔 줘봐, 오빠."
갑자기 변한 말투가 이상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빠는 지금부터 내 남친이야. 이름은... 음... 도하 어때? 성은 강 씨. 강도하."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날 데리고 사우나에서 나갈 생각이었다. 녀석들이 사우나를 안팎으로 뒤지고 나서도 날 찾지 못하면, 출구에서 대기하고 있을 게 뻔했다. 나보다 현명한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게 생존에 유리하다.
"고맙습니다. 소미 씨."
그러자 소미가 고개를 저었다.
"애인한테 씨가 뭐야, 씨는. 그냥 소연이라고 불러. 그게 원래 내 이름이야. 일할 때 쓰는 이름이 소미고."
중국 고전 연극에서 변검술이라고 있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는 일종의 마술 같은 건데, 소미, 아니, 소연의 변화를 보고 있자니 마치 그런 느낌이었다. 배우에 어울리는 연기를 같이 해주어야 무대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내 옷차림을 한 번 살피고, 소연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소연은 내 팔의 위치를 살짝 바꿔주었다.
"팔을 몸에서 약간 벌린다고 생각해. 내 손을 잡으려고 하지 마. 내가 오빠 팔을 잡긴 하지만 매달리지는 않아. 가볍게 접촉만 하고 방향을 지시해 줘. 난 단지 앞이 안 보일 뿐이지, 아예 혼자서 못 걷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잊지 마."
"알았어. 소연아."
소연은 내게도 선글라스를 내밀었다. 방 안은 워낙 어두웠기에 바로 쓰기는 힘들었고, 복도에 나온 다음 얼굴에 썼다. 예전에 햇빛 차단용 선글라스를 써본 적은 있지만 이건 완전히 종류가 달랐다. 앞이 완전히 새까매져서 조명 아래서도 밤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우리 둘은 마치 시각장애인 커플인 것처럼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나아갔다. 다른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그들이 알아서 피해줘서 편하긴 했다.
소연은 조용한 목소리로 직원용 통로 위치를 알려주었다. 미로 같은 좁은 복도를 몇 번 꺾고 나자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걸 지나고 나자 화려한 사우나의 뒷면이 펼쳐졌다.
"보일러실 보이지?"
"응."
"똑바로만 걸어가면 기계에 닿지 않을 수 있어. 배관이 뜨거우니까 조심해."
"응. 알았어."
다행히도, 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보일러실을 지나 비품 창고를 거쳐 건물 출구에 도착했다. 문은 닫혀 있었는데, 그 앞에는 덩치가 왜소한 할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다가가자 마치 여태까지 안 졸았다는 듯이 퍼뜩 일어나 우리를 맞이했다. 그는 눈을 비비다가 소연을 보고 말했다.
"소미, 일찍 가는구나."
그러자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사는 오빠가 찾아와서요. 배고프다고 빨리 집에 가서 밥 해달래요."
노인은 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눈초리가 살짝 매서웠다.
"뭐여. 이놈도 눈깔병신이여? 처음 보는 놈인데?"
실제로 내가 장애인은 아니었지만, 그의 무례한 표현에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약간 울컥했지만, 내 팔을 잡는 소연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고 그냥 허허 웃으며 가만있었다.
"할아버지도 참. 같은 복지관에서 만났어요. 난 본 적 없지만, 우리 오빠 미남이죠? 그쵸?"
"남자가 얼굴 팔아먹을 일 있나. 사지 멀쩡하고 눈에 뵈는 게 있어야 처자식 고생 안 시키지."
"호호호. 돈은 제가 벌면 되죠. 뭐. 오빠는 그냥 집에서 쉬어도 돼요."
기분 탓일까. 소연의 말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고작 문을 지키고 있는 할아버지와 뭐 이렇게 대화를 오래 하나 싶었다.
"오빠, 배고프지? 빨리 집에 가자."
"그.. 그럴까?"
"덕구 할아버지. 빨리 문 열어주세요."
그러나 노인은 문을 열지 않았다. 선글라스 안쪽에서 눈을 움직이며 살피니, 문 열쇠는 그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허리춤에 쩔렁거리며 달려있는 열쇠 꾸러미 중 하나가 출구 열쇠인 모양이었다. 손에는 무전기도 들려 있었다. 그는 굽은 허리를 펴며 요란한 기침을 했다.
"에구야, 에구야. 뭐가 그리 급혀. 이 할애비는 하루 죙일 여기서 지루한데, 소미처럼 예쁜 색시가 말 상대도 해주고 그랴믄 좋지. 안 그래?"
노인의 말투가 심상치 않았다. 소미는 내 팔을 잡아당기더니 귀에 대고 말했다.
"할아버지 열쇠를 뺏어요. 얼른!"
이게 무슨 소리인가 파악하기도 전에 등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앞에 있는 노인의 검버섯 가득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손을 뻗어 소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소미 색시. 미안혀. 처음 보는 놈이 이쪽으로 오면 알려달라고 한 사람들이 있어서 말이여. 못 나가게 하고 무전기로 신호를 주면 담배 한 보루를 준다나, 어쨌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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