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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담배 한 보루에 우릴 팔아넘긴 노인 덕분에 소연은 더이상 내 팔을 잡고 있을 수 없었다. 달려온 남자들 중 두 명이 내 팔을 각각 하나씩 잡아끌고 갔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명은 소연의 머리를 다짜고짜 후려쳤다.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진 그녀의 팔을 잡아 마치 개처럼 끌고 갔다. 아무래도 한 방에 기절해 버린 모양이었다. 더 이상의 저항이 없다.
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붙잡히면서 나도 많이 맞아서 턱이 돌아간 것 같았다. 입이 제대로 벌려지지 않았다. 놈들은 날 끌고 가면서 저희들끼리 이야기했다.
"어디로 데려갈까?"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 빌딩으로 가자."
그렇게 흠씬 두들겨 맞고 질질 끌려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마주쳤지만, 누구 하나 그들에게 뭐하는 짓이냐고 묻거나 막지 않았다. 흉흉한 그들의 기색을 읽은 건지 아니면 그들의 든든한 뒷배를 이미 알고 있기에 그런 걸지도 몰랐다. 야속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문지기 노인도 욕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름도 모르는 사내의 처지보다는 담배가 더 급한 것이리라.
주차장에 이르자 검은색 세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연은 뒷좌석에 태워졌는데, 나는 트렁크에 밀어넣는다. 문이 닫혔고, 어마어마한 어둠이 날 뒤덮는다. 발로 내부를 차며 여는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무리였다. 차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한참을 발버둥 치다가 이내 포기하고 침착하게 숨을 쉬었다. 트렁크 안은 산소가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괜히 열리지도 않는 문을 안쪽에서 열겠다고 난리 치면서 괜한 체력만 낭비할 수 있었다. 몸을 뒤척거리며 안에 있는 물품 중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트렁크 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푸대자루 같은 걸로 내 머리를 확 뒤집어씌웠다. 팔을 뒤로 꺾은 채로 결박하다시피 하여 강제로 걸었다. 몇 개의 계단을 오르고 엘리베이터를 탄 후에 어떤 방에 도착한 것 같았다. 누군가 밧줄로 등 뒤에서 내 손을 묶었다. 그리고 허벅지 뒤쪽을 때려 앞으로 무릎 꿇게 만들었다.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고 나서야 머리에 씌워졌던 푸대자루가 없어졌다.
"푸핫!"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 앞에는 다섯 명의 남자, 그리고 저쪽 한구석에 소연이 쓰러져 있었다. 내게 도움을 주려던 그녀가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되어 마음이 아주 안 좋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 뒤통수와 등짝을 강타하는 각목 세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 잠깐만요!"
그들은 내 말을 무시했다. 네게 누구냐는 질문도, 왜 자신들을 따라다니냐는 질문도 하지 않고 꼼꼼하게 두들겨 팼다. 한 명이 계속 때리면 힘들어서 그런지 각목을 주고받으며 돌아가면서 골고루 때렸다. 비명을 지르는 건 너무 꼴사나워 보여서 최대한 참으려고 했지만,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비집고 나오는 것까지 참을 순 없었다.
몽둥이찜질이 한 바퀴 돌고 나서야, 놈들은 내 주머니를 뒤졌다. 바지 주머니를 뒤지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바지를 벗기더니 항문 사이에 뭘 숨긴 게 있나까지 확인했다. 수치스러움과 황당함에 어쩔 줄 몰랐다. 개중에 한 놈이 내 물건을 구두 끝으로 툭툭 차면서 큼직하게 잘 생겼다는 칭찬을 하더니 곧바로 짓밟았다. 이번만큼은 나도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으아아아아악!"
"맷집이 좋은 놈이긴 한데, 역시 이건 못 당하는군."
그러면서 저희들끼리 키득거리며 웃는다. 그들이 나를 샅샅이 뒤졌지만, 나온 건 호텔 사우나 회원권뿐이었다. 백당과 관련된 사진이나 문서를 일절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한 예린의 조치에 감탄했다. 만에 하나 그들에게 들켰을 경우, 이런 수색을 당하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잠깐만, 만에 하나?
"니 뭐고?"
"네?"
"니 뭐하는 새끼냐 말이다."
그제야 내가 누군지 물어본다.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양산에서 사업하는 박영호라고 합니다."
"근데 왜 우리 뒤를 졸졸 따라다녀?"
"송곳부동산 최규석 사장님이 말씀하시길 부산 바닥에서 사업을 하려면 여러분께 잘 보여야 한다고 그러셔서..."
"최규석? 그게 누구야?"
그러자 한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사우나에 가끔 오는, 그 뭐냐. 말 많은 노인네 있잖아."
"아... 그 서부산 유통단지 쪽에?"
"그래."
자신들이 아는 이름이 나오자 그들은 뭔가 납득하는 눈치였다. 내게 재차 묻는다.
"그런데 왜 도망갔어?"
"그야... 쫓아오니까요."
"뭐?"
"누구든 모르는 사람이 쫓아오면 무서워서라도 도망가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들은 폭소했다.
"푸하하하. 병신 같지만 맞는 말이네. 하긴 우리가 좀 무섭게 생기긴 했지."
그들은 저희들끼리 남을 위협했던 일화를 주고받으며 낄낄거렸다. 내 말을 믿어주는 눈치였다. 그런데 한 녀석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뺨에 긴 상처 자국이 있는 그 남자는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뭔가 켕기긴 했지만, 시선을 피했다가는 더 오해를 살 것 같아서 똑바로 있었다.
"아니야."
상처 자국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약간 불안해졌다.
"뭐가?"
"이 새끼, 아무래도 낯이 익어. 게다가 서울말..."
그는 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가 갑자기 고개를 홱 쳐들었다. 그는 내게 다가와 턱을 붙들었다. 그리고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게 하며 얼굴을 살피다가 내게 얼굴을 바싹대고 물어본다.
"야, 너 리사 알지?"
"네넷? 모르는데요."
나도 모르게 눈빛이 흔들린 모양이었다. 일단 아니라고는 했지만, 약간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고 말았다. 그는 한층 더 의기양양해졌다.
"이 새끼, 이거 눈빛 흔들리는 거 봐라. 안다. 맞다, 맞어. 이 새끼 리사를 아는 새끼야."
"뭐?"
다른 남자들의 눈빛이 변했다. 그저 한 여자의 이름이 나왔을 뿐인데, 놈들의 분위기 자체가 변했다. 리사의 이름이 갖는 무게감은 상당한 것 같았다. 놈의 입에서 난데없이 리사 이름이 나왔을 때, 사실 내 가슴도 철렁했다. 애써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무리였던 모양이다. 상처 있는 남자가 기운차게 떠들었다.
"다들 기억나? 예전에 마리가 서울에 있는 대학교 합격하고, 리사가 이삿짐 옮겨준다고 따라갔었잖아. 나도 갔었어. 그때, 그때 말이야. 옆집에 살던 허우대 멀쩡한 서울 놈. 그놈이 너지? 이 새끼야?"
"아, 아닙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저는 양산에서 사업하는 박영..."
"아니긴 뭐가 아냐! 이 개새끼야!"
턱을 잡고 있던 남자는 그대로 내 머리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그는 내 머리를 자기 무릎으로 찍은 채 말을 이어갔다.
"리사가 서울 놈한테 정신 팔려서 회사 일 제대로 안 한다고 박태호가 말했던 게 네놈이야. 확실해. 하, 씨발. 아까부터 계속 얼굴이 낯이 익다, 익다 싶었는데 그 새끼였네. 설마 서울에 있는 놈이 부산 바닥에 나타날 줄을 몰랐제. 자, 말해, 이 새끼야. 너 리사가 보냈지? 어?"
"모...모릅니다. 리사가 누군지...."
"이 새끼 끝까지 오리발이네."
그는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밟아가며 계속 추궁했다. 구두 뒤축으로 꼼꼼하게 짓이긴다. 내가 리사를 안다고 말하는 순간, 목숨은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사코 부정했다.
"말하라고. 리사 어디 있어? 예린은 또 어디 있고? 니 놈은 뭔데 여길 혼자서 기웃거리고 있는 거야?"
"모릅니다... 으윽...모른다구요. 으악...."
다른 놈이 각목을 수직으로 세워서 내 허벅지 뒤쪽을 찍어눌렀다. 차라리 휘두르는 건 아프더라도 참을만한데, 저렇게 찌르니 발 전체에서 힘이 쭉 빠진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들은 확실히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일에 프로페셔널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 수 있는 건... 그들은 리사가 죽은 걸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양산에 있는 작은 산장 뒷마당이지... 그걸 내가 네놈들에게 말할 것 같아?
그렇게 한참을 날 짓밟고 괴롭히던 놈들은 그래도 내가 불지 않자 다른 수를 찾기 시작했다.
"그래, 말 안 한다 이거지..."
다른 놈이 구석에 있던 소연을 끌고 왔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두드리며 강제로 깨웠다. 몸을 움츠리는 걸 보아하니 정신은 이미 차린 모양이었다. 그러자 남자가 그녀를 내 앞으로 끌고 오더니 바닥에 눕히고 그 위로 올라탔다.
"갑자기 그 아가씨는 왜..."
"왜긴 왜야. 네놈을 조져봐야 말을 안 하니, 다른 사람을 조져봐야지."
그러자 놈들은 낄낄거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심심하기도 한데, 기왕 조지면서 재미도 좀 보든가."
"아... 안 돼."
한 놈이 소연의 남방을 북 뜯어냈다. 단추가 사방으로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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