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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열심히 폼을 잡으며 예린을 보내긴 했지만, 그녀가 떠난 후 내가 할 일은 진짜 없었다. 일단은 차에 앉아서 무선을 듣고 있었지만, 딱히 유념할만한 이야기가 나오진 않았다. 게다가 무선에서 사용하는 말은 일상적인 표현보다는 무슨 암구어나 코드 같은 말이 더 많아서 듣고 있자니 정신이 멍해질 지경이기도 했다. 어쩌다가 연산동을 언급하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새벽까지 퍼마시느라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서 길바닥에 널브러진 취객에 대한 이야기나 주민신고가 들어갈 정도로 과격한 부부싸움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였다.
"후우..."
카폰을 손에 쥔 채로 거듭 심호흡 해보았다. 여기까지 따라온 일이 과연 잘한 일일까. 일반인의 주먹다짐이 아닌, 말 그대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판에 끼어든 내가 대체 뭘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송화를 믿지 말라던 예린의 이야기와 예린을 믿지 말라던 송화의 이야기가 동시에 떠올라 머릿속에서 교차한다. 이제 곧 출산예정일이 임박한 마리의 모습과 모르긴 몰라도 마리보다 더 먼저 출산을 맞이할 소란이의 모습도 떠올랐다.
"후우...후우..."
심호흡을 반복해도 도무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호흡을 많이 하면 되려 과호흡증후군으로 곤란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래서 숨을 약간 참아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힘들었다.
"휴우..."
그때였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짧고 강렬한 폭발음. 길게 이어지는 소리의 잔상.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총소리였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몇 번 더 이어졌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린과 그의 일당이 얼마나 무장을 갖췄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한 그들에게 총기는 없었다. 그렇다면 저 소리는 분명히 송 부장 혹은 바텐더 쪽의 무기일 게 분명했다. 예린이 다치진 않았을까. 괜찮을까. 마음속에 일렁이는 걱정은 안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일렁거리며 내 피부를 뚫고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까지 간헐적으로 통신이 오고 가던 경찰 주파수가 엄청나게 소란스러워졌다. 시끄럽기 그지없는 그 통신에서 분명한 걸 깨달았다. "연산동" "총격" "확인" "출동"
반사적으로 손에 든 카폰의 1번을 길게 눌렀다. 뚜루루-하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 흘러나왔다. 빨리 받으라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예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두 번 걸지 말라고 했던 예린의 이야기가 떠올라 다시 걸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걱정이 차올라서 그대로 앉아있을 수 없었다.
차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다. 언덕 끄트머리로 나아가니 약 이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외딴곳에 비슷한 모양의 빌딩이 두 채 나란히 서 있었는데, 직감적으로 저곳에 금부빌딩과 은부빌딩이라는 걸 알았다. 빌딩 주변을 예린의 차와 비슷한 검은색 승용차와 봉고, 전세버스가 에워싸고 있었다. 습격은 성공적이었을까. 싸움은 이긴 걸까.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저쪽을 향해 달려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 프로의 싸움에 아마추어인 내가 끼어봤자 방해만 될 테니...
그때, 한 무리가 차량 사이를 뚫고 뛰쳐나왔다. 그 뒤를 또 다른 무리가 쫓고 있었다. 눈을 찡그리고 멀리 있는 그들을 유심히 살폈다. 앞에 있는 사람 중에서 내가 아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아는 사람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만 몰랐으면 더 좋았을 사람이다.
바텐더였다.
앞에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모두 네 명. 바텐더 말고도 중년의 남자가 하나, 젊은 남자가 둘이었다. 중년 남자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얼마 전 예린이 보여주었던 사진에서 본 남자다. 바로, 송 부장이었다. 그런 그들을 뒤에서 쫓고 있는 이들은 예린과 그의 부하들이었다. 송 부장이 무어라 소리 지르며 뒤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곧바로 폭음이 들려오며 예린의 부하 중 한 명이 그 자리에 나뒹굴었다. 총성의 진원지는 바로 저 인간이었다. 예린이 무어라 벼락같인 소리 지르는 게 아련하게 들려왔다. 멀어서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분노의 외침이었다.
두 무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송 부장의 부하 두 명이 예린을 막아서려고 했지만, 그녀는 마치 흘리듯이 그들을 피해내고 다시 돌진했다. 예린의 부하 두 명이 그들을 맞이했다. 이제 앞에 있는 이들은 송 부장과 바텐더, 뒤에서 쫓는 이는 예린 한 사람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도무지 모르겠는데,
언덕에서 뛰어내렸다.
비탈을 타고 거칠게 구르듯이 내려갔다. 내 위치는 송 부장과 예린의 중간쯤 되었다. 송 부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 예린이 날 따라잡았다. 위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그녀의 선글라스는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고, 옷 군데군데는 예리한 무언가로 벤 흔적이 가득했다. 몸의 이곳저곳에 핏자국이 잔뜩이었다. 그녀 본인의 피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녀는 날 힐끔 보고 말없이 달렸다.
나도 모르게 따라붙었지만,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버거웠다. 송 부장은 리사의 삼촌뻘이라고 들었는데, 체력이 젊은이 못지 않았다. 길은 어느새 비탈길로 접어들었다. 지그재그를 난 내리막길을 구르듯 내려가는 송 부장과 바텐더는 갑자기 두 방향으로 나뉘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와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안타까움으로 발을 동동 구르던 난 뭔가 번쩍 떠올랐다. 두 사람 중 하나만 잡을 수 있으면 어떻게 하겠냐는 내 질문에 대한 예린의 답 말이다.
"예린 씨! 바텐더의 발을 묶어두면, 송 부장은 잡을 수 있겠어요?"
"그야...."
"그럼 얼른 던져요!"
"뭘 던지죠? 던질 게 없는데?"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애용하던 야구 방망이는 모두 소진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었다.
"나요!"
"네?"
"날 던지라고요. 나를!"
답도 없고 탈출구도 없던 교회에서 날 구하던 예린, 깡패들이 구축한 매음굴에 갇힌 날 구하던 예린. 그녀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그때마다 문짝을 맨손으로 뜯어내는 그녀의 괴력을 본 적이 있다. 나보다 더 크고 무거운 문짝을 솜방망이처럼 들어 올리던 그녀였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하던 예린은 곧 내 말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실례합니다!"
그녀는 내 허리와 뒷목을 잡아채더니 그대로 "들어 올렸다". 내 짐작대로 그녀는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날 들어 올릴 수 있었다. 허공에 둥실 떠오른 채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쪽!"
대각선 아래쪽, 바텐더가 달리고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솔직히 송 부장은 내가 잡고 있을 수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나이 든 사람이라고는 하나 조직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그러나 바텐더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저 녀석쯤이라면 내가 잡아도 최소한 몇 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예린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그대로 날 집어 던졌다. 라이트 형제는 인간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동경하여 수백 번의 실패를 겪어가며 비행기를 만들었다고 했던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왜 한 걸까. 이렇게 사람을 집어 던지면 되는...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제아무리 마음으로는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고는 하나, 입에서는 꼴사나운 비명이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만 해도 충분히 기절할만한 일인데, 떨어지는 중력가속도에 예린의 팔심까지 더해진 결과, 내 몸의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그 어떤 롤러코스터가 이런 스릴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번지점프가 이런 느낌일까. 몇 초전의 나는 대체 얼마나 미친놈이기에 이런 제안을 했으며, 예린은 또 얼마나 미친 사람이기에 하란다고 그걸 하냐.
이 모든 생각은 불과 수 초도 안 되는 사이에 벌어졌다.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바텐더와 나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예린의 투척은 실로 완벽 그 자체였다.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뻗어 바텐더의 등을 밟았다. 아니, 찼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은 엉망진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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