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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61화 (26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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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9

"형님 나오십니다!"

태호의 선창. 그러자 곧바로 수십 명의 남자가 한목소리로 외친다.

"나오셨습니까, 형님!"

귀가 먹먹하다. 누가 보면 내가 귀먹은 사람이라서 저렇게 크게 인사하는 줄 오해하겠네. 아니, 그 이전에, 내가 이런 조직의 보스라고 오해하기 딱 좋은 인사잖아...

"저기, 태호 씨."

"네, 형님."

"그 형님이라는 칭호는 이제 안 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조심스럽게 묻자 태호는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의 얼굴 크기는 보통 사람의 두 배 정도라서 표정 변화의 기복도 두 배 정도 남다르다. 그는 인상을 팍 쓰고 자신의 가슴을 때리면서 내게 사죄했다.

"제가 형님의 지시를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형님!"

"......안 죽여요."

후우. 그냥 내가 포기하는 게 빠를까. 태호의 입에서 저놈의 형님 소리가 안 나오는 게 빠를까. 지난 몇 달간 이런 대화를 몇 번이나 나눴는지 모르겠다. 도무지 모르겠다.

"아뇨. 죽일 것까지야... 다만, 아침마다 이렇게 직원들 일렬로 세워서 큰소리로 인사하는 건 참아주세요. 저희는 이제 그런 거 아니잖아요."

"시정하겠습니다. 형님!"

태호는 곧바로 몸을 돌리더니 직원들을 향해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아침에 여기 나와서 인사하는 녀석은 내가 친히 목을 따주겠다! 앞으로 형님 봐도 인사하지 말고! 그냥 눈만 깔아! 알아들었어?"

"네!"

큰소리로 인사하는 걸 자제해달라는 이야기가 어째서 저렇게 험악하게 바뀌었는가를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서 옥신각신해봐야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기해하는 눈초리만 더 받을 뿐이었다. 태호를 데리고 서둘러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의 우렁찬 인사에 답하면서 빌딩 최상층에 있는 내 집무실을 향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집무실 입구 바로 옆, 비서 자리에 있던 소연이 점자단말기를 한 손에 들고 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아침입니다. 회장님."

"네, 소연 씨. 일찍 나왔네요."

"오늘 일정 말씀드릴게요. 10시에 유성호 이센테크 사장, 오후 2시에는 이강우 토탈에듀 컨설팅 대표가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다른 약속은 없어서 일단 오케이해두었구요, 채 지검장이 저녁 메뉴는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물어보라는 전화를 남겼습니다."

"이센테크 사장은 굳이 찾아올 거 없고 실무진만 보내서 총무팀이랑 계약 마무리 지으라고 하세요. 송화는 지난번에 문어회 이야기하길래 그걸로 메뉴 잡나 싶었는데, 왜 나보고 메뉴를 잡으라는지 모르겠네. 제가 직접 전화해볼게요. 그리고 이강우... 으.... 그 사람은 왠지 느낌이 쐐한데."

그러자 등 뒤에 잠자코 있던 태호가 불쑥 튀어나와 한마디 거든다.

"제가 볼 때도 그놈은 영 사기꾼이지 싶지 말입니다. 언제 한 번 몰래 잡아다가 털어볼까요?"

아이고, 머리야. 나는 최대한 화를 내지 않으며 태호를 타일렀다.

"태호 씨. 몇 번이나 말하지만... 우린 이제 그런 거 안 해요. 잘 아시잖아요. 성질 좀 죽이세요."

"....알겠습니다."

태호는 약간 시무룩해져서 뒤로 물러났다.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좀 더 컸던 모양이다. 그러자 소연이 태호를 위로했다.

"박 실장님 의견도 괜찮은데요 뭘. 저는 가끔은 그런 터프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자 태호는 언제 혼났냐는듯이 금방 얼굴이 풀어졌다.

"그, 그런가요? 소연 씨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단순히 맞장구를 치는 정도가 아니라 태호가 소연을 보고 있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과연. 태호가 요새 내 집무실 주변을 서성거리는 이유가 멀리 있지 않았군 싶었다. 어찌어찌하다가 내 비서로 오게 된 소연은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주변 분위기라든가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맞추는 게 능숙했다. 원래 '서비스업'에 계시던 분이라서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것 같았다.

목소리도 굉장히 좋고, 말투도 사근사근해서 많은 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내게 용무가 있어 전화를 거는 외부인들은 반드시 소연의 전화를 통하고 나서야 내게 닿을 수 있다. 소연이 내게 바꿔주면 그들은 방금 전화받았던 그 아가씨가 누구냐고 꼭 묻곤 했다.

"이 대표에 대해서는 약간 보류합니다. 약속을 일주일 후로 잡아주세요. 좀 더 알아봐야겠어요."

"네, 회장님."

소연은 생긋 웃으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의 자리에는 여느 비서들처럼 전화기와 팩스가 있었지만, 구형 타자기처럼 생긴 점자단말기도 항상 놓여있었다. 사내에서 올라와 내게 보고되는 정보는 문서로 한 부, 점자 정보로 한 부 올라오게 되어있다. 바쁜 나 대신 소연이 먼저 읽어 검토한 후 내게 건네기 위해서였다.

"그럼 태호 씨도 가서 일 보세요."

"아, 저기, 저는 여기서 좀만 더..."

비서실을 금방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태호의 눈치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좋을 대로 하라고 해놓고 내 집무실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 잠깐 발을 멈춰 선다.

커다란 소파와 넓은 책상, 한쪽 벽을 가득 채운 통유리창 너머 펼쳐지는 도심 풍경.

책상 위에는 <최한석 회장>이라고 양각으로 새겨진 명패가 놓여있었다. 검은 바탕에 자개로 된 흰글씨는 무척이나 위압적이었다. 내 이름인데도, 전혀 내 이름 같지 않았다. "회장님"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지 벌써 반년이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낯설었다.

어디 누군가를 만나러 갔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경남산업 그룹의 최한석 회장"이라고 부를 때도, 그게 날 부르는 건지 몰라서 멍하게 있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요즘은 좀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처음에는 정말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으로부터 6개월 전.

모든 항쟁을 끝내고 난 뒤, 난 병원에 누워 보름 넘게 요양해야 했다. 그다지 최전선에서 싸운 녀석도 아니건만 온몸에서 성한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서울에서는 마리와 소란이 둘 다 아이를 낳았다. 마리는 자연분만으로 아들을, 소란이는 제왕절개로 딸을 낳았다. 그 아이들의 이름을 생각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빨리 보러 가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 내게 예린은 매일같이 찾아와 백당의 잔존 세력 처리와 그 이후의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백당 조직을 해체하고 회사를 세운다는 예린이 해주는 설명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그냥 그런가 보다 싶었다.

"이제 회사는 다 준비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표자 자리가 남아있습니다."

"그렇군요."

대표자가 누가 될까 싶었다. 만약 김 회장이 살아있었다면 그의 자리였을 터... 만약 리사가 살아있었다면?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그녀의 영향력으로 미루어보아 능히 앉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린은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왜 그렇게 보죠?"

"한석 님이 회장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네?"

"저희가 세우는 회사의 대표가 되어주십사 하는 겁니다."

"하필이면 제가... 혹시 이거 그건가요? 바지사장 같은, 그런?"

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부연설명은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당신이 해. 그게 더 이상 백당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에서 내가 제시한 조건이야."

병실의 입구에 낯익은 얼굴이 하나 나타났다. 송화였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 들어오며 말했다.

"너희들의 싸움박질이 워낙 전격적으로 일어나서 우리가 어찌하기도 전에 끝나버렸지만, 그렇다고 죄 자체가 다 사라지는 건 아냐. 실종, 그래, 아주 이상하게도 온다간다 소리 없이 실종되었다는 송 부장도 시체를 찾으면 그건 실종사건이 아니라 살인사건이 되는 거니까."

예린은 송화가 나타났는데도 딱히 인사를 하지도, 긴장하지도 않았다. 송화 역시 예린을 딱히 염두에 두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송 부장 같은 잔챙이들이야 몇 놈이 사라져도 상관없어. 깡패 새끼들이 누가 오야가 되든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니까. 근데 바텐더는 달라. 그놈을 너희들이 데리고 있다는 건 우리로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세상에 내놓고 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니까. 그런데도 우리에게 한사코 넘기지 않겠다고 하더군. 안 그래, 예린?"

예린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송화를 향해 대신 대답했다.

"나라에서 바텐더를 잡아가면 기껏해야 감옥에 가두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잖아요. 하지만 저희는 그에게 갇혀 있는 것보다 더 괴롭게 만들 수 있어요."

"괴롭게 한다고? 어떻게?"

"그가 만들기 싫어하는 약을 강제로 만들게 하고 있어요. 사람들을 낫게 하는 약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만 하는, 그리고 남을 괴롭히는 약만 만드는 일에 매니아인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짓이죠. 그 약을 통해 수많은 중독자를 도울 수 있을 겁니다. 저희는 그런 이유로 바텐더를 억류하고 있어요. 그래서 넘길 수 없다는 겁니다."

송화는 코웃음을 쳤지만 그렇다고 딱히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녀 입장에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송 부장이나 예린이나 같은 깡패라고 보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바텐더를 넘기지 않는 예린의 속내를 견제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예린 역시 송화를 견제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흉금까지 터놓을 수 없는, 그런 애매한 거리인 것이다. 그나마 두 사람의 창끝이 서로를 향할지언정 찌르지 않는 이유는... 그래, 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그 회사를 맡으면... 송화 씨도 믿어준다는 건가요?"

"믿는다기보단... 적어도 엉뚱한 짓은 덜하겠다 싶은 거지."

송화의 대답을 듣고 예린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무표정인 그녀의 얼굴에 담긴 뜻을 읽기 어려웠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예린 씨 생각은 어때요? 저처럼 어린 사람이 그럼 막중한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예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조직의 일을 책임지기 시작했을 때는 스물도 채 되지 않은 앳된 아가씨였죠. 나이는 문제가 안 됩니다."

예린이 말하는 "그녀"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건강한 아들을 출산한 나의 아내의 언니이자, 한때는 날 사랑했던 여인.

"다른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 저를 잘 따를까요? 원래 백당 사람도 아니었는데..."

"마리 아가씨가 있으니 아예 남도 아니고... 오히려 외부 사람이라서 더 괜찮습니다. 내분이 봉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섣불리 한쪽 사람을 내세웠다가는 다시 쪼개질 수도 있으니까요."

예린이 말했던 리사의 계획을 떠올린다. 그녀의 유지를 이제는 내가 이어받는다. 어깨가 무거웠다.

"며칠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러시죠."

그리고 일주일 후,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태호는 부하 스무 명을 이끌고 병원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나오는 날 보고 "형님 나오십니다!"를 외쳤다. 뒤에 있던 스무 명은 태호의 선창이 끝나자 병원이 떠나가라 동시에 외쳐대었다.

아이고, 머리야. 아아, 생각나 버렸다. 그때부터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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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가 이번 루트의 엔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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