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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벨이 울린다. 내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벨 소리가 꿈속에서 울린 게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침대에서 비척비척 기어 나와 전화기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 수화기를 집어 든다.
"여보세요?"
대답은 없었다. 장난전화인가? 잠이 덜 깬 눈을 들어 시계를 본다. 야광이라고 사다 놨는데 밤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사천 원짜리 시계의 시침은 4에서 5 사이에 있었다. 이 시간에 장난전화라니. 너무한데?
"여보세요. 말을 하세요."
"자기야. 나야."
이런 호칭으로 날 부르는 사람을 알고 있다.
"선영이?"
"응. 잤어?"
"그럼. 이 시간에 자지... 안 자?"
"그래. 그렇겠지."
선영이 전화를, 게다가 이 시간에.... 뭔가 대단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수화기를 들고 말이 없는 그녀를 한참이나 기다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예전처럼, 그러니까 아직 나와 한강에 가기 전의 목소리처럼 착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아냐. 아무것도.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거짓말."
내가 아는 선영이 할 만한 대사는 아니었기에 거짓말이라고 쏘아붙여 주었다. 아무래도 말이 곱게 나오질 않는다. 뭐든 간에 자다 깬 사람이 기분이 좋을 리는 없으니까.
"하아. 미안. 정말 그냥 해 본 거야. 깨워서 미안."
"뭔데, 말해봐."
잠은 이미 예전에 달아나 있었다. 잘 자고 있는 사람을 난데없이 전화로 깨운 그녀가 괘씸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꺼림칙한 기분을 남긴 채로 그냥 전화를 끊으면 너무 궁금해서 오던 잠도 안 올 것 같았다. 한참 주저하던 선영은 몹시 어색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내일... 내일 말이야."
"응."
"나랑 어디 좀 가줄 수 있어?"
"어디? 멀어?"
"좀."
내일은 유진이와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다. 선영에게 선약이 있다고 말하고 거절하는 건 간단한 일이겠지만, 지금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그렇게 말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무슨 일인데 그래?"
"그건..... 굳이 알 거 없고, 내일 같이 갈 수 있는지 없는지만 대답해줘."
잘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운 건 자기면서 되려 나에게 닦달이다. 유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늦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그 녀석의 얼굴. 그리고 동시에 선영의 얼굴도 떠오른다. 지금 전화기 너머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느 정도 감은 잡힌다. 근래에 그녀의 표정이 많이 밝아지고 좋은 표정도 간혹 지어서 잊고 있었지만, 예전 검은 옷의 선영은 늘 화난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아마도 지금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내 대답이 늦어지자 선영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곤란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해. 그럼....."
"자, 잠깐. 생각 중이란 말이야. 잠깐만."
달력을 한 번 본다. 시계를 다시 본다. 이제 다섯 시가 되어가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저, 선영아... 알았어. 같이 가줄게."
머릿속에 두 얼굴이 떠올랐다. 유진의 얼굴보다는 선영의 얼굴이 더 슬퍼 보인다.
"무리하는 거 아냐?"
"아냐. 약속이 있긴 했는데 사정을 말하면 이해해 주겠지."
"알았어. 지금 끝나니까 곧 데리러 갈게."
"지금 바로?"
"응."
성질도 급한 녀석 같으니라고. 꽤 이른 시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잠들기도 애매한 시간대였다. 일단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책상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노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차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신발을 꿰어 신고 나가본다. 나가기 직전 책상 위에 올려놓은 작은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유진이 주려고 사다 놓은 인형이었다. 일단 챙겨서 가지고 나간다. 빌라 앞에 있는 차는 역시 선영의 차였다. 운전석에 다가가니 핸들을 감싸 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선영이 보였다. 운전석을 열고 물어본다.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 내가 운전할까?"
"그럴래? 부탁 좀 할게."
선영은 순순히 내리더니 조수석으로 옮겨탔다. 내가 운전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둘러맸다.
"어디로 가면 돼?"
"충남."
"알았어."
충남이 다 니네 집이냐 라고 농이라도 걸고 싶었지만, 착 가라앉은 선영의 분위기를 보아 함부로 그런 이야기도 못 꺼내겠다. 일단 서울을 빠져나와 고속도로 쪽으로 올라탔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워낙 이른 시간이라 도로에 차도 별로 없이 한산했다. 한 시간 넘게 달린 후 휴게소 하나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우동을 시켰는데 선영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미뤄놓는다. 난 그녀의 우동을 받아들며 말했다.
"차에서 좀 자지 그랬어?"
"잠이 안 와."
"밤에 계속 일 했을 텐데 안 피곤해?"
"피곤이라.... 모르겠어."
선영은 내가 우동을 먹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우동을 다 먹자 가방에서 어떤 봉투 하나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뭐야, 이게?"
"지금 거기 가려고."
편지봉투였다. 수신인에는 선영의 이름이 쓰여있었고 발신인에는 어떤 단체의 이름과 충남 어딘가의 주소가 인쇄되어 있었다. 단체의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다. "성 바오로 돌봄의 집." 뭐 하는 곳일까, 대체.
"여긴 왜?"
"안에 내용을 봐."
봉투를 뒤적여 안에 있는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문방구에서 파는 흔한 편선지 위에 볼펜으로 눌러 쓴 또박또박 정갈한 글씨체가 적혀 있었다. "한선영 자매님께"로 시작하는 그 이야기는 자신들이 무얼 하는 단체라는 점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는 걸로 서두를 열었다. 노숙자, 무연고자들 중에서 병이 깊은 이들을 구호하는 그들은 "한양구"라는 사람을 보호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폐렴 및 기타 합병증에 의해 죽어가고 있으며 죽기 전에 자신의 딸을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의 상태가 좋지 않아 부디 빠른 시일 내로 꼭 찾아주시길 바란다는 그 이야기는 마음의 평화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며 끝났다. 다 읽은 나는 선영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성이 한 씨였다는 점을 상기해낸다. 딸을 보길 바라는 사람이라.
"이분이.... 네 아버지야?"
여태 침울해져 있던 선영의 표정이 돌변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선영은 토해내듯이 외쳤다.
"그 새끼는....... 그런 게 아냐!"
"........알았어."
한 번 더 물었다가는 때릴 기세다. 휴게소를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오르기 전에 공중전화에서 유진이네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자는 건가 싶었다. 자는 걸 깨우는 것도 미안하게 생각되어서 두 번 걸지 않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충남에 이르러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선영은 휴게소를 나온 이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간간이 내쉬는 한숨 소리로 보아 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국도로 접어들어 한참을 달리다가 중간중간 멈춰 서야만 했다. 초행길인 데다가 주소만으로는 방향이 가늠이 안 되어서 가다가 보이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가며 돌봄의 집을 찾아갔다. 산 중턱에 숨어있는 그곳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를 한참 달리고 나서 비포장도로를 또 한참 꺽어들어 가서 몇 개의 가건물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을 찾아냈다. 서울에서 새벽에 출발했는데도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여러 개의 건물 중에서 사무실이라고 써 붙여진 건물로 들어갔다. 말이 좋아 건물이지 컨테이너 몇 개와 조립식 샌드위치 판넬 몇 개를 이어붙여 놓은 게 다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회색 수녀복을 입은 한 중년 여자가 우리를 맞이한다. 선영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그녀는 반색하며 선영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자기가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한양구 씨가 참 많이 기다렸답니다."
이제 마흔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자신을 에스더라고 소개했다. 그녀와 몇 명의 젊은 수녀들이 이곳에서 갈 곳 없는 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에스더의 안내를 받아 마당을 가로질러 안쪽의 다른 건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커다란 방에 여섯 개의 간이침대가 놓여있었다. 네 개의 침대는 비어있었고 두 침대에만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한 분씩 누워계셨다. 젊은 수녀 한 명이 한 명을 돌보고 있다가 우리를 보곤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나도 엉겁결에 마주 인사했지만, 선영은 꼿꼿이 선 채로 있었다. 왜 그런가 싶어 그녀를 돌아보니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방금 수녀가 돌보고 있던 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검버섯이 가득 피어있고 백발이 성성한 그 노인은 눈을 반쯤 뜨고 있었지만, 검은 부분보다 흰자위가 더 많았다. 에스더가 한 발 나서더니 선영을 팔을 잡고 이끌었다.
"한선영 씨. 이쪽이...."
"놔요!"
날카로운 선영의 말.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듯이 그녀의 말투는 꽤 공격적이었다. 뿌리치는 동작도 상당히 거칠었다. 그러나 에스더는 크게 놀라지 않은 듯 보였다. 그녀는 손을 들어 노인을 가리키며 조용조용 말할 뿐이었다.
"저희는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마당에 나와 저희를 불러주세요."
병원 같은 데서 곧잘 사용하는 호출 벨 같이 호화로운 설비는 여기에 없는 모양이었다. 젊은 수녀가 작고 동그란 의자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감사를 표하며 의자를 받아 침대 곁에 두었다. 선영의 등을 한쪽 팔로 감싸고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간다. 선영은 마치 사형집행을 위해 전기의자로 끌려가는 죄수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간신히 뗀다. 다행히도 아까 그 수녀에게 한 것처럼 나를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뻣뻣해진 그녀의 몸 전체가 그 노인에게 다가가기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간신히 그녀를 의자에 앉힌다. 나는 그녀의 뒤에 서서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짚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노인의 가쁜 숨소리만이 방안에 가득했다. 맞은편 침대에 누워있는 또 다른 노인의 가래 끓는 소리가 유일한 효과음이다. 한참 만에 선영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건 인사말이라 하기에는 좀 묘한 소리였다.
"당신.... 여태 안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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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회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Route 5 시작합니다.
Route 5는 322회에서 마무리되리라 예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