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5 / 0471 ----------------------------------------------
Route 5
간신히 울음을 그친 선영은 그대로 멍하니 한참 동안 앉아있었다. 난 그녀의 옆에 앉아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산 중턱이라 꽤 먼 곳까지 잘 보였다. 산속이라 도시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종종 들려왔다. 바람 소리, 새소리. 마치 내 고향을 연상시키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선영이 가만히 날 불렀다.
"자기야."
"응?"
이제 어쩐지 그녀가 날 이렇게 부르는 거에 애정이 듬뿍 담긴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아니, 착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일까.
"아깐 왜 그렇게 대답했어?"
"뭘 말이야?"
"아까 말이야."
아까 일이라.... 아까 선영이 아버지가 나에게 남편이냐고 물었을 때 말인가. 왜 그랬냐고 물으신다면 몹시 쑥스러운데...
"아니라고 하면 설명이 길어지잖아."
"그것뿐이야?"
"음? 기분 나빴어?"
"아니, 전혀."
선영은 날 돌아보더니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준다. 어쩐지 짠맛이 날 것 같은 짧은 입맞춤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지개를 거창하게 켠 그녀는 무언가 결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앉아 있는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먼저 돌아가."
"무슨 소리야?"
"난 여기서 좀 더 있다 갈게."
"남는다고?"
"응."
선영은 바닥을 보며 돌 하나를 발끝으로 툭 찼다.
"그 사람의 끝을 내 눈으로 봐야겠어. 그래야 나중에 잠이 잘 올 것 같아."
무슨 무협지에서 원수를 가리켜서 그런 말 종종 하는 것 같던데.... 설마 여기 남아서 직접 해코지를 하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물론 농담이다. 그녀의 표정이나 태도에서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느낌이 더 강했다.
"후우. 그래. 니 결심이 그렇다면...."
"미안해. 이 먼 곳까지 오게 해놓고 혼자 돌아가게 해서."
"아냐. 괜찮아. 근데 차는 어떻게 할까? 여기 두고 갈까?"
선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자기가 가지고 올라가.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연락할 테니까."
"알았어."
무슨 일이라. 어떤 일이려나.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겠지. 선영에게 내 삐삐 번호를 알려주었다. 명희와 헤어지고 난 후 한 번도 울린 적이 없는 삐삐였지만, 그래도 늘 가지고 다니긴 했다. 내가 차에 올라타자 그녀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조심해서 올라가. 운전 조심하고."
"너보단 안전운전하니까 걱정 마."
선영은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배웅해주었다.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차를 돌려 산을 내려갔다. 산길을 벗어나기 직전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손을 흔들고 있는 선영이 보이길래 마주 손을 흔들어준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지루할 뿐이었다. 둘이 함께 내려왔던 길을 혼자 돌아가는 건 쉽지 않았다.
고속도로에 접어들면서 휴게소에 한 번 들렸다. 뒷자리에 던져놓은 작은 상자가 눈에 밟혀 유진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본다. 여전히 아무도 받지 않았다. 다시 차를 몰고 서울로 향한다. 일요일이라 들어오는 길이 꽤 막힌 탓에 빌라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했다. 차를 세우고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누군가 빌라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유...유진아."
짧은 미니스커트에 옅은 색의 블라우스. 손바닥만 한 핸드백까지 들고 있는 모양새는 마치 여대생 같아 보이는 차림이었지만, 그 특유의 얼굴 때문에 어려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제 오는 건가요."
녀석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계단을 올라 녀석과 마주한다.
"미안... 새벽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너한테 연락을 했으면 했는데 전화를 안 받더라."
"급한 일....?"
"어... 좀 아는 사람이 어디 급히 가야 할 일이 있다고 해서...."
유진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평소에도 녀석의 얼굴이 인형처럼 귀엽게 생긴 얼굴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무표정하게 날 바라보는 지금 녀석의 얼굴은 생기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더 인형 같다. 눈빛마저도 그저 유리구슬이 박혀있는 봉제인형처럼 초점이 흐릿하다. 녀석은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어딘가로 돌리면서 말했다.
"그게, 선영 언니 일이죠?"
"어? 어....."
어떻게 알았지? 문득 유진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녀석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뒤에 있는 차를 향한다. 유진이라면 선영을 차를 모를 리가 없다. 내가 이걸 끌고 왔으니... 하아.
"응. 선영이 아는 분이 위독하셔서... "
아버지라고 말할까 하다가 본인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데 함부로 말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말을 아꼈다.
"암튼 미안하다. 내가 나중에...."
"아뇨."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차갑기 그지없는 유진의 말이 내 말허리를 자른다. 녀석은 나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면서 천천히 말했다.
"이젠, 안 봤으면 좋겠어요. 아저씨랑 나랑."
"유진아...."
"내 이름 부르지도 말고... 내 눈앞에 띄지도 말아 주세요."
"유진아....."
거듭 불렀지만, 녀석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차분하게 걸어나갈 뿐이었다. 녀석을 따라가 붙잡고 싶었지만, 워낙 날이 선 녀석의 말투가 예사롭지 않다.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저 모습을 하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기다렸을 녀석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녀석을 따라가 잡고 싶었지만, 왠지 화만 더 돋우게 될 것 같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유진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생각한다.
선영이 아버지와의 약속, 유진과의 약속. 어느 쪽도 쉽지 않다.
내가 대체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다시 교생 실습 2주차가 시작되었다. 아침에 동기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늘 그렇듯이 담당 사수인 지애를 따라다닌다. 아침 조회시간에 1학년 3반에 들어갔을 때 유진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특별히 날 쳐다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나에게 싫은 내색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제의 일을 어떻게 사과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아 따로 유진에게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혹시나 싶어서 점심시간에 등나무 쉼터에서 괜히 앉아 있어보기도 했지만, 전처럼 소란이나 유진이가 등장하지는 않았다. 대신 태근이 형이 농구라도 한 판 뛰자고 했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거절했다.
퇴근 후, 모처럼 회식이 없는 정상적인 퇴근이었다. 태근이 형이 은애나 현아를 불러서 같이 저녁이라도 먹으러 가자고 꼬셨지만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다. 아쉽다는 듯이 먼저 가는 형의 모습을 뒤로하고 유진이네 집으로 향했다. 전에는 과외 선생이라는 이유로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가던 곳인데 막상 사과를 하러 오니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잘못을 한 건 나이기에 분명히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 앞에 도착해서 벨을 누른다. 벨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려도 답이 없다. 아직 안 들어왔나? 혹시나 싶어서 다시 벨을 누르니까 그제야 문이 열린다. 아직 교복 차림을 하고 있는 유진이였다.
"무슨 일로 오셨죠?"
"유진아. 어제는 내가 진짜 미안했어. 이렇게 사과할 테니까 봐줘라. 응?"
두 손을 모아 비는 포즈를 취해보지만, 유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미리 준비해 간 선물을 내민다.
"사실 일요일날 주려고 선물도 미리 준비해 놨었단 말야. 정말이야."
"이게 뭔데요?"
녀석은 그것을 받아들 생각도 안 하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정말 전화했었다니까. 근데 아무도 안 받아서...."
"일단 들어오세요.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는 유진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선다. 굉장히 오랜만에 오는 느낌이다. 전에 과외할 때 쓰던 책상이 그대로 있어서 거기에 앉았다. 유진이도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언제부터죠?"
"뭐...가?"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물어보는 통에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유진은 고개를 들어 가만히 날 바라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선영이 언니랑 잔 거 말이에요."
"....뭐...어?"
"그럼, 안 잤어요?"
말문이 턱 막힌다. 이게 지금 고등학교 1학년짜리가 할 소리야? 선영이랑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언제부터 잤는지를 물어보다니...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고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틀어본다.
"그게 내가 어제 네 약속 못 지킨 거랑 무슨 상관인데?"
"아니라고 대답은 안 하는군요."
"야, 그...건 그러니까..."
나까무라 순사가 독립군 잡아다 놓고 취조하는 것도 아닌데도 녀석의 기세는 무섭기 그지없다.
"이 문제가 선영이 언니랑 상관없을 것 같아요?"
"그야 당연히....."
당연히 없지! 라고 대답하려다가 답이 궁했다. 가정을 해본다. 만약 선영의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난 당연히 유진이와의 약속을 지키러 나갔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선영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상관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할 말이 없어진 난 변명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유진아, 그러니까 선영이도 굉장히 급한 일이 있어서...."
"알아요."
유진은 내가 말을 길게 하는 꼴을 못 보는 모양이다. 녀석은 칼같이 내 말을 자르고 들어온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엄마한테 어느 정도는 들었어요. 내가 궁금한 건 언니가 그런 일이 있다고 왜 아저씨가 나서냐죠.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 일에 그렇게 발 벗고 나섰을 리는 없고 분명 모종의 관계가 있으니 그런 급박한 부탁에도 뛰쳐나간 거 아니겠어요? 내 약속은 뒤로 미루면서까지."
"유...유진아."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라고 해봐야 뻔하잖아요. 둘이 잤겠죠. 그것도 한두 번 실수도 아니라 여러 번 서로 원해서 여러 번. 그런 사이가 아니고서야 언니 전화 한 통에 그렇게 무작정 튀어 나갔겠어요?"
올해로 열일곱이 된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도무지 믿기 힘든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 말 하나하나가 틀린 말이 아니라는 점이 더 무섭다.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그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해가며 중학생 과외를 하고 있다고 할 때부터 말이죠. 그리고 제가 아파 누워있었을 때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고 확신했다구요. 내가 그런 것 하나 눈치 못 챘을 것 같아요?"
"......"
말문이 막힌다.
"난 아저씨보다 언니가 더 미워요. 아저씨는... 그래, 남자니까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언니는 나밖에 없다면서, 날 위한다면서 어쩜 그렇게 뒤에서 그러고 있을 수가 있죠? 두 사람 다 나를 영원히 속이려고 했단 말이에요?"
"거기에는 사정이...."
"사정? 남자가 여자랑 자는 데 무슨 놈의 사정이 있겠어요! 둘이 눈 맞으면 끝난 거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