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66화 (26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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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유진이 테이블을 거칠게 내려치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는다. 나까무라 순사의 취조는 물샐 틈 없었고 독립군은 이제 본거지를 불기 직전이다. 열일곱 여고생이 아니라 세파에 닳고 닳은 노숙한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포장도 뜯지 않은 상자는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떤 말을 할 자신도, 자격도 없는 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고 하고 싶은 말을 한참이나 쏟아낸 유진은 숨을 고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한참 후에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길래 고개를 들어본다.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고개를 들고 녀석을 올려다본다. 녀석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언니가 그렇게 좋아요?"

"좋다기보단... 우리 사이에는 사정이 있어서..."

"끝까지 그 소리네요."

유진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테이블을 돌아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언니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어요."

어쩐지 불안하다. 녀석은 날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어제..... 온종일 아저씨를 기다리면서 생각했죠."

"뭘?"

녀석은 자신이 입고 있던 교복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결국 엄마 말이 맞았다고."

"엄마 말?"

유미의 말이라니. 뭔가 불길하다. 게다가 넌 지금 그걸 왜 다 풀고 있는 건데! 경악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벙어리 흉내를 내고 있는 내게 녀석이 다가온다. 차갑고도 무거운 기운을 물씬 풍기는 유진에게 압도되어 꼼짝도 못 하고 있는 내게 다가와 내 무릎에 걸터앉는다. 녀석은 두 팔을 뻗어 내 목을 휘감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남자를 가지려면 몸을 내주는 게 가장 좋다구요."

무엇에 홀리듯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유진을 품에 안았다. 작디작은 그 녀석을 안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힐 때까지, 그래, 난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모든 단추가 풀어진 블라우스가 녀석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옅은 핑크빛의 브래지어가 소담스러운 두 살덩이를 담아내고 있는 광경을 내려다본다. 내 몸 아래 온전히 놓여있는 작은 몸체는 나이와는 전혀 맞지 않게도 고혹적인 빛을 뿜어내며 나를 홀리고 있었다. 도덕, 윤리... 그런 것들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만져지지 않는다. 오직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날 기다리는 하나의 여체와 내 손길 아래 만져지는 싱그러운 살결뿐이다.

유진의 얼굴과 목, 가슴과 배를 천천히 더듬어 간다. 두 눈을 질끈 감은 녀석의 몸이 살짝 떨리고 있다. 이론으로는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남자의 손길을 겪어보지 않은 그 몸짓이 사랑스럽다. 작다 못해 어리다. 그런 몸이 내 손 아래 만져지고 있다.

삐빅- 삐빅- 삐빅-

눈을 떴다.

아니, 여태까지 눈을 감고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새롭게 눈을 뜬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이제 겨우 여성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어리디 어린 소녀다. 작은 꼬마다. 내 학생이다. 귀에 들려오는 삐삐의 호출음을 듣고 있노라니 언젠가 어떤 여인이 나에게 당부했던 말이 떠오른다.

"당신이 원할 때, 언제든 제 몸을 제공하죠. 대신에 유진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대답해요."

난 그때 무어라 대답했던가. 알았다고 했었지.

"당신의 성욕은... 내가 처리해 줄 테니, 절대로 유진이를 탐하지 마세요. 알았죠?"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남자라는 생물은, 그래, 그녀의 말버릇대로 자지를 달고 있는 녀석들은 어쩔 수 없이 여체를 탐하게 된다는 것을, 그녀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근데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멈추지 마요."

어느새 눈을 뜨고 날 바라보고 있는 유진이었다. 녀석의 눈이 차갑기 그지없다. 날 잡으려 팔을 뻗는데 나도 모르게 그걸 피해냈다.

"미...미안. 유진아. 난 이럴 수 없어."

"뭘 이럴 수 없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랑.... 아, 안 돼. 우린 이러면 안 돼."

그러자 유진은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남들 다 하는 거잖아요. 아저씨도 다른 여자들이랑 많이 했을 거 아닌가요? 그게 왜 나는 안 돼요? 선영이 언니는 되고 왜 나는 안 되냐구요."

"일단 옷부터 입자."

"싫어요!"

내가 내민 옷을 거칠게 뿌리치는 유진.

"난 말주변이 없어서 설명은 잘 못 하겠지만.... 널 소중하게 생기는 사람이랑 약속을 했어. 그 사람이 결코 넌 건드리지 말라고 부탁을 했단 말이야. 그 부탁을, 그 약속을 난 어길 수 없어."

"내 약속은 어겨 놓구요?"

"그건 어쩔 수 없었잖아."

"이것도 어쩔 수 없다고 하면 되잖아요!"

"억지 부리지 마!"

유진은 코웃음을 쳤다.

"억지는 아저씨가..... 아니, 날 소중하게 생각하는 언니가 부리고 있겠죠. 참 대단히도 생각해주는 언니로군요. 저 건드리지 말라고... 핫. 자, 잠깐. 설마 그런 이유로 아저씨를 꼬시던가요? 자신이 대신 대주겠다면서?"

"말이 너무 심하잖아!"

심하긴 한데 틀린 말은 아니지. 유진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심하다구요? 틀린 말이면 차라리 날 때려보든가요!"

"유진아!"

"다 필요 없어요! 아저씨나! 선영이 언니나! 엄마든 뭐든 다 필요 없다구요!"

"유진아!"

"손대지 마!"

유진은 날 밀쳐내고 이불을 거칠게 당겨 자신의 몸을 덮었다.

"내 곁에 정말 있어줄 게 아니라면 차라리 눈에 보이질 말아요. 그런 어쭙잖은 호의가 난 제일 싫어. 싫다구!!!"

차라리 울고 있는 녀석이라면 달래주기라고 할 텐데 녀석은 눈에 핏발을 세워가며 나에게 손에 잡히는 대로 뭔가 집어던졌다. 몇 개는 내 몸에 맞고 또 몇 개는 벽에 맞고 바닥에 굴렀다. 내가 예전에 사주었던 펀치 브라이스 인형도 그중 하나였다. 바닥에 드러누워 그 큰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인형을 마주하고 있기 쉽지 않았다. 난 유진에게 아무런 말도 더 건네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문을 닫고 나서는데 그제야 유진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불에 얼굴을 묻고 애써 소리를 죽여 우는 그 소리는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패잔병의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맞은편 집도 조용했다. 집으로 들어와 자켓을 벗어던지고 침대에 눕는다. 한숨을 내쉰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유진이와의 첫 만남, 과외, 어설픈 데이트, 은행나무침대 같은 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무표정하게 날 경계하던 첫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다 조금씩 표정을 보여주었고 어느 순간에는 나한테 메롱을 던지고 도망가는 아이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익숙지 않은 술에 취해 딸꾹거리면서 아무도 없는 자기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고, 열에 들떠 꼼짝도 못하는 주제에 나에게 상반신의 나체를 보여주기도 했었다. 녀석의 어른스러운 말투와 행동, 때로는 너무도 성인 여성 같은 느낌에서 잊고 지냈지만 유진은 틀림없이 어린 녀석이었다. 아이였다. 그런 녀석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 건 내 책임이다.

문득 아까 삐삐가 울렸던 사실이 생각나 안주머니에서 꺼내 든다. 번호를 보니 잘 모르는 번호다. 지역번호를 보고 혹시나 싶어서 전화를 걸어보니 역시 "성 바오로 돌봄의 집"이었다. 선영이를 찾으니 금방 바꿔준다.

"미안. 삐삐 온 걸 지금 봤어. 무슨 일 있어?"

"아, 아니. 그냥 자기 목소리 듣고 싶어서."

"응. 그렇구나..."

어제 새벽에도 그녀는 내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했다. 그다지 미성도 아닌 내 목소리가 왜 듣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듣고 싶다니 많이 들려준다.

"식사는 했어? 아버님은 좀 어떠셔?"

"식사는 했고... ......그 사람은 그냥 그렇지, 뭐."

결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건 여전했다.

"곁에 계속 있어드려. 나도 주말엔 내려갈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어."

"아냐. 그래도 사위라고 해주시는 데 찾아뵈어야지."

선영이 조금 웃었다. 다소 건조한 웃음이긴 했지만.

"그리고 혹시 필요한 거나 그런 거 있으면 말해. 준비해서 내려갈게."

"안 그래도 말이야. 내 오피스텔에 있는 것 좀 보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었어."

"뭔데?"

선영은 자신의 옷가지와 기본적인 생활 물품 몇 가지를 말했다. 그리고 덧붙인다.

"혹시 비밀번호 기억해?"

"그때 한번 들은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

"자기도 아는 숫자일 텐데.... 유진이 생일이야. 0213"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렇게 유진이를 끔찍이도 아끼는 이 여자에게 조금 전까지 유진이가 그녀를 향한 독설을 내뱉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나.

".....아, 알았어. 일단 짐부터 챙겨서 소포로 보낼게."

"아냐. 자기 주말에 내려온다면 그때 가지고 와도 돼. 여긴 소포 한 번 보내도 한참 늦게 오는 동네라더라."

"그래도 일주일씩이나 늦게 가?"

"그렇다고 하네. 아.... 자기야. 우리 통화 너무 오래한 것 같다. 여기 수녀님들 사무실인데...."

"어, 그래. 알았어."

선영은 잘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지난주와 별 다를 바 없는 교생실습의 하루가 지난다. 다른 점이 있다면 현아가 지난주보다 나에게 더 친근하게 대했고 태근이 형이 그 비법에 대해 물어보았으며 은애가 형에게 많이 들러붙고 있다는 점일까. 교실이나 복도에서 유진이를 두어 번 마주쳤지만 녀석은 내게 학생답게 깍듯이 인사할 뿐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오히려 소란이가 더 친하게 굴 정도다.

다시 정상 퇴근을 했다. 일주일 만에 주어지는 저녁 시간의 자유스러움에 감동했다. 이 값진 시간을 어찌 보낼까 하다가 발걸음이 저절로 선영의 집으로 향한다. 그녀가 집에 없는지 뻔히 알면서도 들어가는 기분은 묘했다. 0213. 유진이의 생일을 찍고 방으로 들어간다. 방주인이 없는 방안은 삭막한 기분마저 감돌았다. 그녀의 옷과 속옷, 크림 따위를 챙긴다. 이것들을 담아갈 커다란 가방을 찾다가 옷장 아래쪽에서 예전에 그녀가 자주 입던 검은 옷들이 차곡차곡 개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그 옷도 챙겨야 하나 고민했다. 모르긴 몰라도 조만간 그녀는 다시 검은 옷을 입게 될 것이다.....

그때 삐삐가 울렸다. 꺼내어 확인해보니 어제 한 번 보았던 전화번호였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전화기로 가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기 전에 선영이 직접 받았다.

"바로 전화 올 줄은 몰랐어. 퇴근했지?"

"응. 안 그래도 지금 니 방에 와 있어."

"어머,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막 들어가고. 자기 응큼한데?"

"그러게 말이야.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기대하고 막 이상한 기대 잔뜩 하면서 들어왔는데 아무도 없어서 지금 실망 중이야."

수화기 너머 선영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듣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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