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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그럼 자기야, 기왕 부탁한 김에 몇 가지 더 부탁할게."
"뭔데, 말해봐."
선영은 어제 말한 옷가지 말고 좀 다른 것을 주문했다. 그녀가 말하는 대로 화장대의 서랍과 보조 서랍 등을 열어 안에 있던 장부 따위를 챙긴다.
"이걸 ROSE에 갖다 주면 되는 거야?"
"그러긴 한데.... 하아. 아무래도 정리가 안 되어 있을 거야. 언니한테 갖다 줘봤자 제대로 하지도 못 할 거고..... 거래처에 줄 돈도 합산이 채 안 끝났는데....."
장부를 열어서 내용을 확인해 본다.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일목요연하게 쓰여 있어 알아보기는 쉬웠다. 그러나 유미에게 맡기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거란 선영의 걱정에 나도 공감한다.
"그럼 말야, 내가 정리할까?"
"자기가 할 수 있겠어?"
걱정스러운 선영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을 치며 당당하게 답한다.
"이래봬도 사무정보기기응용기사 자격증도 준비하고 있다고."
"사무.......뭐?"
뭐, 이름만 들으면 좀 못 알아들을 정체의 자격증이긴 하다.
"엑셀이나 액세스 다루는 거 말야."
".......엑셀이랑 액세스는 또 뭔데? 지금 나 공부 덜 했다고 놀리는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엑셀이랑 액세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렇지만 짧게 말로만 설명하는 걸로 스프레드시트와 데이타데이스에 대해 알아듣게 하는 건 무리였다. 그러나 선영은 핵심을 짚어서 이해할 줄 아는 여자였다.
"솔직히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수치를 다루는 거라고?"
"응. 이 장부도 그런 식으로 정리하면 어느 정도 될 것 같아."
"하아. 괜찮을까...."
선영은 꽤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나름대로 ROSE의 경영에 애정이 있는 그녀인지라 내부정보나 다름없는 걸 외부인에게 맡긴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마담인 유미에게 맡기는 건 더 불안하고.... 선영은 결국 결정을 내렸다.
"그럼 자기 믿고 맡겨볼게. 일단 급한 건 거기 장부에 쓰여 있는 것들부터고 사무실에 가면 내가 지나에게 시켜서 정리해놓은 전표도 있을 거야. 그건 다음 주까지니까 일단은...."
선영은 자신들의 거래처와 입금 방법 등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해주었다. 내용이 좀 길어 받아 적으려고 펜과 종이를 찾았다. 선영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책상을 뒤져본다. 메모지와 펜을 찾았다. 그리고 찾으려고 하진 않았는데도 찾은 게 하나 더 있었다. 전화로 돌아가 선영에게 전달 사항을 모두 듣는다. 그걸 다 듣고 나서 선영에게 묻는다.
"내가 방금 뭘 찾았게?"
"뭔 소리야?"
"아주 예전에 어떤 여자가 나랑 단둘이 차에 있다가 다짜고짜 울길래 손수건을 줬었거든. 근데 그 여자가 그걸 돌려줄 생각은 안 하고 그걸 가지고 있던 모양이네."
"아...."
목소리뿐이었지만, 선영이 얼굴을 붉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 돌려주려고.... 했었어. 타이밍이 안 좋아서 안 준 거지."
"그럼 이제 내가 가져간다?"
"아, 안 돼."
"왜 안 돼? 이건 원래 내 건데"
"....흥, 알아서 해. 난 몰라."
살짝 토라진 선영의 얼굴을 생각하니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선영도 마주 웃는다. 잠시 후, 선영이 다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내가 괜한 부탁하는 거 아닐까 몰라."
"괜한 부탁이라니."
"자기 공부도 해야 하고 교생 일도 해야 하잖아. 근데 내 일까지 떠맡기는 거라...."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거기서 아버님이나 잘 보살펴 드려."
"휴우. 알았어. 정말 고마워."
전화를 끊고 선영의 집을 나와 학교로 갔다. 공대 전산실로 가서 액세스를 켜고 필드를 구성한 다음 레코드 별로 장부의 숫자들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거래처의 목록, 대금, 납기일, 물품 재고 현황 등이 빼곡하게 입력된다. 아가씨마다 TC의 합계와 비율도 산정한다. 처음에는 쉽게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이게 슬슬 쌓이기 시작하니 어지간한 수치제어 리포트보다도 훨씬 빡세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전산실 조교가 와서 이제 문 닫아야 한다고 할 때까지도 다 끝내지 못했다. 그냥 장부에서 직접 계산할 걸 괜히 전산화 시킨다고 한 게 아닐까 싶은 후회가 들었다.
디스켓에 데이터를 담아 좀 더 늦게까지 운영하는 도서관 전산실로 자리를 옮긴다. 도서관 전산실이 문 닫기 전에 가까스로 필드 구성과 데이터 입력을 완료했다. 공용 프린터에서 거래처와 아가씨 개개의 금액 지급 내역서를 뽑아냈다. 깔끔하게 계산되어서 나온 출력물을 보니 나름대로 뿌듯했다.
시계를 보았다. 조금 늦은 시각이긴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세계이고 다른 세계인 ROSE는 이제 한창인 시각이리라. 버스를 타고 가게로 향했다. 취객들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 ROSE에 도착한다. 좀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괜히 온 것도 아니기에 당당하게 들어간다. 날 룸으로 안내하려는 웨이터에게 선영이 시킨 일 때문에 왔다고 말하고 사무실로 향했다.
"어머, 선생님. 요새는 자주 오시네요?"
유미가 혼자 있었다. 여전히 부담스러운 노출도의 옷을 자랑하며 반갑게 날 맞이한다. 그녀의 깊은 계곡을 보며 아주 잠깐, 정말 잠깐 생각했다. 유진이가 특정 부위에 있어서 자기 엄마를 좀만 더 닮았다면 정말 완벽했을 텐데.
머릿속에 떠오른 황망한 생각을 후딱 지워버리고 유미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만들어온 지불 내역서를 유미에게 보여준다. 선영에게 들었던 내용과 내가 정리한 내용을 한참 설명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깨닫게 되었다. 유미가 전혀 못 알아듣고 있다는 걸 말이다.
"저, 그러니까. 유진이 어머님. 여기 적힌 대로 입금을 해야 한다는데요. 선영이 말에 따르면 이번 주 안으로 입금을..."
"근데 요새 과외는 안 하신다면서요?"
"네?"
사람이 설명을 하고 있으면 좀 들어!
"지난주인가? 유진이한테 물어보니 요새는 과외 안 하신다면서요? 유진이가 별로 마음에 안 드세요?"
무슨 애엄마가 자기 딸이 하던 과외 안 하는 걸 이제 알았냐는 별개의 문제로 치더라도 안 하는 이유가 자기 딸이 마음에 안 들어서라니. 뭐 이런 엄마가 다 있나.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 지금 교생실습을 나가서 말이죠. 아무래도 유진이 학교이다 보니 과외를 계속 하기는..."
"어머, 아니라는 말씀은 여전히 유진이가 마음에 든다는 말씀이죠?"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에 집중을 좀 해!!! 내가 지금 과외 왜 안 하는지 설명하고 있잖아! 정말이지 아까부터 유미랑 이야기하면서 이 여자의 목을 쥐고 흔들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선영이는 대체 이런 여자 밑에서 몇 년씩이나 어떻게 일한 거야?
"아뇨. 그게 아니라요, 어머님. 유진이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 중요한 게 아니라 제가 교생으로 나가야 되다 보니 당분간은 과외를 하기 어렵다는 거예요."
교생이 끝나고 나서도 다시 과외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긴 하다. 어제 나에게 가버리라고 소리치던 유진의 모습이 언뜻 떠올라 스쳐 지나간다.
"흐음. 교생이라... 그럼 앞으로 진짜 선생님 되시게요?"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제 겨우 실습 나가는 정도구요, 나중에 임용고시도 봐야 하고, 그 전에 군대도 다녀와야 되고...."
"어머, 복잡하기도 해라. 뭐 간단한 게 없네요."
간단한 게 없는 게 아니라 본인이 생각을 길게 하기 싫어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난 다시 장부 이야기로 돌아가 지급내역서를 설명하려 했다. 그러자 유미는 손을 내줬더니 서랍에서 뭔가 꺼내어 내게 건네준다.
"아무리 설명하셔도 저는 잘 모르겠으니까요, 그냥 선생님이 다 처리해주세요. 비밀번호는 1234에요."
이걸 그렇게 대충 맡겨도 되는 물건이냐!
"에에? 그래도 이걸 저한테....."
"왜요? 은행 갈 시간 없으세요?"
"그야 점심시간에 가면 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간이 되신다니 다행이네요. 부탁 좀 드릴게요."
뭐라고 표현해야 되나, 이런 기분을. 유미의 생각 없는 거야 내가 몇 번 보아온 일들과 선영의 설명에 의해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여자는 내 예상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는 레벨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 손에 들린 통장과 도장을 내려다보며 어처구니없다는 게 정말 무언지 확실히 깨달았다.
"저, 유진이 어머님. 그게 말입니다."
"네? 무슨 문제라도?"
"아뇨. 문제는 제가 아니라 이... 이런 걸 남한테 막 턱턱 맡겨도 괜찮은 겁니까? 정말로?"
혹시나 싶어서 열어본 그 통장에는 잔액만으로도 내가 과외로 버는 한 달 수익의 100배 정도는 가볍게 넘는 금액이 찍혀있었다. 유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뭐 어때요."
"아무리 아는 사이라도 그렇죠."
이 여자는 아는 사이라면 자기 집 열쇠도 맡길 여자로다.
"어차피 매일 장사 끝나면 김 군 시켜서 입금하는 통장인데요, 뭘."
"그건 입금이고 제가 하는 건 출금이란 말입니다."
"그게 그렇게 다른 일인가요?"
"완전 다르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다 보니 머릿골이 띵하다. 서서 말하는 것도 피곤할 지경이라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말했다.
"제가 이걸 가지고 나쁜 마음이라도 먹는다면 그땐 어떡하시려구요?"
"나쁜 마음이라, 후후. 그게 뭔데요?"
내 옆에 나란히 앉은 유미는 내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말했다. 진한 화장품 냄새에 섞인 성인 여성의 내음이 진하게 내게 풍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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