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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68화 (268/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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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나는 몸을 옆으로 좀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뭐... 이걸 가지고 도망을 간다거나... 돈을 다 빼서 쓴다거나...."

"그런 건 나쁜 마음이 아니죠. 그냥 욕심이지."

"그....그게 다른 가요?"

이야기를 하면 그냥 거기서 이야기를 할 것이지 이 아줌마는 왜 자꾸 붙는 거야. 얇디 얇은 어깨끈에 간신히 매달린 실크 원피스 너머 아주 둥글게 둥글게 자리 잡은 그녀의 유방이 내 팔에 쩍하니 들러붙는다.

"욕심은 사람이면 누구나 드는 자연스러운 마음이구요, 나쁜 마음은 하면 안 되는 걸 하고 싶어지는 마음이죠."

뭔 소리야, 대체! 그럼 내가 이 돈을 들고 튀는 건 자연스러운 마음이라는 소리냐! 유미의 말은 이어졌다.

"제가 선생님한테 통장을 맡긴 이상 선생님이 어떻게 하든지 그건 어디까지나 제 책임이죠. 설령 그걸 가지고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가신다고 해도 선생님의 잘못은 전혀 없어요. 사람을 잘못 보고 그 사람에게 맡긴 제 잘못이죠."

유미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내 코를 살짝 밀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의 숨결이 내 귀를 간지럽게 한다.

"근데 전 여태 한 번도 사람을 잘못 본 적이 없어요."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왜 귀를 핥는 건데?! 깜짝 놀란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유미는 살짝 아쉽다는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내려다보니 가슴에 깊이 파인 계곡이 더욱 적나라하게 보이는 터라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그러면 이건 장부에 적힌 대로 제가 지급 처리를 하겠습니다. 나중에 출납명세서랑 통장 가져다 드릴게요."

"흐음. 그러시든가요."

"그리고 선영이가 그러던데 아직 처리 안 된 전표는 지나라는 아가씨한테 맡겨 놨다고...."

"지나요? 그랬던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버리고 나자 유미는 뭔가 흥미를 잃은 사람처럼 대충대충 대답했다. 내가 지나를 만날 수 있냐고 묻자 그녀는 시큰둥하게 책상에 붙어있는 벨을 가리켰다. 내가 가서 그걸 누르자 잠시 후, 웨이터 한 명이 사무실로 왔다. 내가 지나를 불러 달라고 하자 웨이터는 알았다며 사무실을 나갔다.

"여기 오시면 꼭 저 말고 선영이나 지나 찾으시네요, 선생님?"

기분 탓인가. 어쩐지 비꼬는 말투로 들리는데.

"아뇨. 그게 전 볼 일이 있어서...."

황급히 변명을 해보지만, 유미의 말투는 여전했다.

"역시 애엄마는 별로겠죠? 아직 탱글탱글한 애들이 더 마음에 드시겠죠. 분명히."

"에엑? 유진이 어머님, 전 그냥..."

그러자 유미가 고개를 흔든다.

"또, 또! 여기서 절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렇게 부르면 자꾸 내가 애엄마 같잖아요."

당신 애엄마 맞잖아!

"그럼 뭐라고 부르나요?"

"그냥 편하게 유미라고 부르세요. 전 마담이라 불리는 것도 왠지 나이 들어 보여서 싫다구요."

"그...그러신가요."

거참, 쉬운 게 없군.

"한 번 불러봐요."

"넷? 지금요?"

지금은 부를 일이 없는데...

"그럼 언제 부르시게요? 내일?"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아... 저, 유미 씨?"

"네, 선생님."

뭔가 야리꼬리한 기분이 들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유미한테 그런 기분을 말하기도 애매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더니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았다.

"말 잘 들은 상이에요."

상이라. 상이라. 대개 이런 시츄에이션에서는 그냥 볼이나 이마에 쪽 해주고 마는 것 아니었습니까. 어째서 마우스 투 마우스의 딥키스죠?

"언니, 나 찾았다면.......서?"

"웁웁!!"

문을 열고 들어오던 지나가 우리 모습을 보고 우뚝 멈춰 선다. 문소리에 눈을 뜬 나는 유미를 떼어내려고 바둥거렸지만, 흡사 빨아들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그녀의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간신히 유미와 떨어져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고 있자니 지나가 날 보면서 고개를 갸웃한다.

"헤에~ 한석 씨 역시...."

"그런 거 아닙니다!"

손을 내저으며 부정해보지만, 저 눈빛은 이미 확정짓는 눈빛이다. 으아. 유미 씨. 그렇게 생글생글 웃고만 있지 말고 뭐라고 부정을 좀 해줘요! 네에?

*

"형, 먼저 들어가세요. 전 볼 일이 있어서요."

"뭔데?"

"은행에 좀..."

"그래, 갔다 와. 우린 먼저 간다."

다음 날, 태근이 형과 은애, 현아와 함께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나는 학교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손에 들린 파일에는 어제 컴퓨터로 정리한 대로 적어놓은 입출금 요청서가 담겨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사람이 좀 있었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동안 통장을 살핀다. 통장은 "진미자"라는 이름으로 되어있었다. 누구지, 이 사람은. 혹시 유미의 언니나 동생인가?

곧 내 차례가 되어 계좌이체할 것과 돈 찾을 것을 모두 마쳤다. 아가씨들에게 주어야 하는 돈은 각각 봉투에 담아 따로 안주머니에 넣어두고 출납명세서와 통장은 챙겨 파일에 다시 넣어둔다. ROSE에서 일하는 아가씨는 대략 오십 명. 그들에게 주어야 하는 페이가 내 안주머니에 들어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어제 정리하면서 계산한 대로라면 지금 내 안주머니 들어있는 금액만 해도 내 4년치 등록금보다도 훨씬 많았다. 이만한 금액을 가지고 다녀본 적이 없어서 자못 긴장이 되었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게 사람 심리라고 하던데 돈 생기면 대체 뭐가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어제 내 귓가에 대고 너무도 촉촉하게 말했던 유미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자신은 사람을 잘못 본 적이 없다는 그 말. 고개를 흔들어 이상한 생각은 털어버리고 학교로 곧장 향했다. 평소와 같이 수업과 잔심부름을 마치고 퇴근을 서둘렀다. 태근이 형이 한 잔 하러 가자고 꼬드겼지만 안주머니에 그만한 돈을 넣어둔 채로 술 먹으러 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다음에 같이 가자는 약속을 하고 먼저 나와 바로 ROSE로 향했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유미가 반색하며 맞이한다.

"선생님, 잘 오셨어요. 이것 좀 봐주세요."

"네? 뭔데.... 그러죠?"

사무실 책상에 못 본 게 하나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날 끌고 책상 앞에 앉혔다.

"어제 선생님이 컴퓨터로 장부 적어오셨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아까 낮에 가서 하나 사와 봤어요. 근데 이게 안 켜지네요?"

일본 대기업 로고가 박힌 노트북이었다. 이걸 대뜸 가서 하나 사왔다 이거지. 무슨 과자 사오는 것도 아니고....

"아까까지는 켜졌는데, 지금은 눌러도 안 켜져요. 비싸게 돈 주고 새 거 사온 건데 왜 안 될까요? 고장났나?"

책상 옆을 보니 노트북 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서 어댑터와 전원케이블을 꺼내어 콘센트에 놓고 노트북에 전원을 연결시켰다.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켜지면서 윈도우95 로고가 나타났다. 유미가 깜짝 놀란다.

"어머나. 벌써 고치신 거예요? 역시 대단하네~"

"아뇨. 그게 아니라 전원을 연결 안 하셔서 그런 건데요."

"응? 노트북이면 들고 다니면서 쓸 수 있다고 하길래 사온 거였는데, 코드 꽂아 쓰는 거면 못 들고 다니잖아요."

"그건 배터리가 충전되어 있을 때구요, 아마도 아까는 배터리가 다 방전 돼서 안 켜진 게 아닐까 싶은데요."

"헤에. 대단하네요."

그나저나 이 자세는 참 고맙기도 한데 부담스럽기도 하고... 뭐랄까.... 의자에 앉아있는 내 등 뒤에서 유미가 바짝 붙어서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터라 그녀의 얇은 옷 너머 풍만한 무언가가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압박하고 있었다. 내 어깨너머 팔을 뻗어 키보드까지 만지고 있으니 거의 등 뒤에서 나를 포옹한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몸에서 가득 풍겨오는 몸내음에 취할 지경이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물어본다.

"근데 컴퓨터는 왜 갑자기 사신 거예요? 뭐에 쓰실 건데요?"

"요새 정보화 시대니 뭐니 하잖아요. 그래서 그냥 우리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사봤어요."

룸살롱이 정보화해서 대체 뭐할 건데! 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대충 사양을 확인해보니 결코 나쁘지 않은 성능이다. 펜티엄MMX에 시디롬은 물론 모뎀까지 다 달려있는 최신형 사양이었다.

"이 정도면 꽤 비쌀 텐데 뭐 하실려고요? 유미 씨도 컴퓨터 쓰세요?"

"제가요? 제가 왜요?"

무슨 소리냐며 유미가 반문한다. 난 좀 기가 막혔다.

"쓰실려고 산 거 아니었어요?"

"아아, 선생님 쓰시라고 사놓은 거죠. 이 정도면 쓰실만 해요?"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다.

"에엑? 저요?"

"왜요? 마음에 안 드세요?"

"마음에 안 든다기보단..... 갑자기 이런 걸...."

컴퓨터를 하나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비싼 가격에 선뜻 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 다니면서야 전산실에서 쓰는 걸로 괜찮긴 한데 막상 급할 때 레포트나 시뮬레이션 등을 돌릴 때는 전산실에 자리가 쉽게 나지 않아 연구실에 기웃거리며 데이터를 들고 다니는 불편함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저희 유진이도 잘 보살펴 주시고 선영이도 도와주시고 무엇보다 저희 가게도 도와주시는데 이 정도는 해드려도 괜찮지 싶어요. 선영이 이야기를 들어 보니 당분간 여기 못 올 거 같던데 지금은 걔 하던 일을 선생님이 대신해주고 계시기도 하잖아요."

"그래도 이건 너무 부담되는데요."

이 정도 성능의 노트북이라면 못해도 이삼백만 원은 충분히 나가고 남았다. 게다가 국내 제품도 아니고 외국꺼라 더 하면 더했지 결코 값싼 물건이 아니다.

"전 물건 마다 다 주인이 있고 그 쓰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걸 여기 두고 가봐야 아무도 제대로 쓰지 못할 고철에 불과하죠. 그렇지만 선생님이라면 가져가서 잘 쓰시리라 믿어요."

언제나 변함없는 얼굴로 생긋 웃으며 유미가 말했다. 거절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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