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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69화 (26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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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굉장히 부담이 되었지만, 그래도 유미의 말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에게 통장과 도장, 그리고 아가씨들 월급봉투를 건네주었다. 유미는 자기랑 술이라도 한 잔 하고 가라고 권했지만, 그건 정중히 사양하기로 하고 먼저 일어났다.

일단 과사로 돌아가 노트북에 필요한 유틸이랑 실험데이터 등을 옮겨 담았다. 혹시나 싶어서 액세스랑 엑셀도 깔아두었다. 지나가던 진호 선배가 웬 거냐고 묻기에 착한 일 하고 선물로 받은 거라고 했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 한다. 선영에게 호출이 들어와 전화를 건다. 전표 처리한 이야기를 전하고 그녀에게서 가게에 물건 입고되는 거랑 새로 아가씨 뽑는 문제 등에 대해 전달받았다. 어째 점점 업무지시처럼 변하는 느낌이긴 하지만 선영이 지내고 있는 곳의 생활도 편한 것은 아니기에 군소리 없이 선영의 지시를 받아 적었다.

그렇게 낮에는 학교에서 교생실습, 밤에는 ROSE에서 선영의 업무를 대행하는 일이 주욱 이어졌다. 그렇게 한 주가 정신없이 흐르고 마침내 토요일이 되었다. 퇴근하면서 바로 충남으로 내려갈 생각에 선영의 차를 가지고 출근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내리는데 마침 차를 가지고 온 지애와 마주쳤다. 주차장에서 본관까지 같이 걸어갔다. 주차장에 놓인 내 차,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영의 차를 힐끔 돌아본 그녀가 묻는다.

"차도 있었어? 한석... 아니, 최 선생?"

학교 밖에서는 누나 동생으로 지내기로 했지만, 여긴 학교다.

"제 차는 아니구요. 당분간 맡아둔 거예요."

"혹시 아버지 차?"

검은색의 중형 세단이라 어쩐지 좀 나이 들어 보이는 분들이 몰고 다니면 딱 어울릴 차이긴 하다.

"아뇨. 그냥 아는 분인데요."

내 말을 들은 지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흐음. 운전하는 사람들은 어지간해서 자기 차를 남에게 잘 안 맡기는데...  굉장히 친밀한 사이인가 보네."

"그런가요."

친밀하긴 친밀하지. 몸이야 이미 여러 번 섞었고 그녀의 아버지에게는 사위라고 소개된 사이인데, 친밀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뭐, 교생이라고 해서 차를 가지고 오란 법은 없지만, 좀 의외여서 말야."

"아,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아뇨. 그런 지적을 한 건 아니었어요. 가져와도 괜찮아요."

토요일은 오전 수업뿐이라 일찍 끝났다. 여전히 싸늘한 유진의 눈빛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한시 바삐 충남으로 내려갈 생각에 서둘러 학교를 나섰다. 태근이 형이 지난번처럼 다 같이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꼬셨지만 다음에 다시 보자고 하고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쩐지 형에게는 요새 공수표만 남발하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토요일 오후에 서울을 빠져나가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요금소를 빠져나가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린 것 같다. 그나마 좀 트인 고속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린다. 전에 한번 갔던 길이라 눈에 익은 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다행히도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돌봄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서 와. 많이 피곤하지?"

차에서 내리던 나는 마중 나온 선영의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랐다.

"한선영 수녀님?"

"놀리지 마."

여기 계신 수녀님들이 입고 있는 옷과 같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머리에 두건은 두르지 않고 있었지만, 한데 모아 틀어 올렸기에 꽤나 단정해 보였다.

"내가 준비해온 옷이 따로 없어서 얻어서 입고 있었어. 근데 너무 안 어울리지?"

"아냐, 잘 어울려."

일주일 만에 보는 거라 반가운 마음에 안아주려고 했지만, 선영이 슬쩍 몸을 뒤로 뺀다.

"에스더 수녀님한테 인사부터 드려."

"그... 그럴까?"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기에 사무실에 모여 있는 수녀님들 모두에게 인사를 드렸다. 인사를 받은 수녀님들은 선영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영 "자매님"의 봉사가 모두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는 말에 선영 쪽을 쳐다보았다. 다소 부끄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이질적이다. 난 준비해 간 간식거리와 선영이 사오라고 부탁했던 생활용품 등을 건넸다. 만성적인 물자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이들이라 큰 감사를 표하며 받아주었다.

"아버님은 어때? 많이 좋아지셨어?"

사무실을 나와 병동 쪽으로 가면서 선영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가만히 흔들었다.

"자기야. 여긴 병원이 아냐. 닥쳐온 죽음을 피하려거나 맞서려고 하는 곳이 아냐. 치료보다는 마음의 평안을 우선으로 하고 있어."

"그러면?"

"몸은 계속 안 좋아지고 계시지만 마음은.... 모르겠어. 조금 편하게 이야기하게 되었을지도."

선영을 따라 그녀의 아버지가 누워있는 병실로 다가갔다. 맞은편 침대에 있던 다른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왜 보이지 않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인기척을 느낀 노인이 내 쪽을 바라본다.

"자넨가."

"예, 어르신."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그는 애써 몸을 일으키려고 했고 난 얼른 그런 그를 부축했다. 선영의 아버지라면 그렇게 나이가 들은 편도 아닐 텐데 어떤 고생을 했는지 그의 몸은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아닙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매일매일 천주님께 가까워지고 있지. 허. 전에는 언제라도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눈에 밟히는 게 있어서 그게 쉽지 않네."

전보다 기침은 더 잦았고 가래가 많이 끓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 하는 것도 그에게는 꽤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다만 입을 여는 게 쉽지 않아 대화는 좀 오래 걸리고 더뎠다.

"식사 하세요."

"먹기 싫은데..."

"입 벌리고 억지도 넣기 전에 협조 좀 해봐요."

어느 샌가 선영이 그릇을 들고 옆에 와 있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가 거기에 대신 앉았다. 의자를 침대 쪽에 바짝 끌어다 놓고 숟가락으로 옅은 죽 같은 것을 떠서 조금씩 제 아버지에게 먹이고 있었다. 애처럼 흘리지 말고 잘 좀 받아먹으라며 탓하는 말을 계속 하는 입은 비록 험했지만, 그 손길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흘린 죽을 닦아주는 손길도, 떨리는 입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는 숟가락도 그녀가 감추고 있는 본심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나와 차에서 짐을 마저 내렸다. 수녀님 한 분께 여쭈어 숙소 한편에 선영의 짐을 옮겨다 두었다. 마당으로 나와 어두워져 가는 산속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당 반대쪽에서 수녀님 두 분이 사다리와 의자를 놓고 무언가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도와드릴까요?"

가만히 있기도 뭐해서 다가가 물어보니 흔쾌히 수락한다.

"어머, 좀 그래 주시겠어요?"

"키가 큰 분이라 좋겠다."

젊은 수녀 두 분이서 조명을 이어 달고 있었다. 산속이라 빨리 어두워지는 통에 저녁만 되어도 마당을 다니기 힘들단다. 전선의 피복을 벗기고 소켓을 연결한 다음 못을 쳐서 각 병동 기둥에 하나씩 조명을 달았다. 하나를 겨우 끝내고 나니 수녀님 한 분이 다른 기둥을 가리켰다. 혹시나 싶어서 바닥에 놓인 전등을 보니 무려 다섯 개나 더 남아있었다. 괜히 도와드린다고 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하나를 해보고 나니 의외로 손에 익어서 금방금방 해 나간다. 전등 설치를 다 마치고 났더니 다른 한 분이 오셔서 가스통 좀 옮겨 달란다. 시키는 대로 가스통을 옮기고 났더니 이번에는 뒷마당에서 하고 있던 평상 만들기에 투입된다. 손에 망치와 못, 그리고 톱이 쥐어진다. 얼추 다 만들어지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어떤 분이 불러서 병동에 있는 침대와 환자 옮기기에 동원되었다. 그렇게 팔자에도 없는 육체노동에 한참 시달리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났더니 어느새 별이 보이고 있었다.

"수고했어."

선영이 가지고 온 대접에 담긴 물을 단숨에 들이킨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내가 앉아있던 긴 의자 옆에 나란히 앉은 선영이 수건 하나를 꺼내 내 얼굴을 닦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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