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71화 (27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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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지금 며칠째 연락도 안 되고 그러고 있다구요. 서울 와봤더니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혹시 자전거를...?"

이제야 생각이 난다. 빌라 입구에서 녀석의 자전거가 보이지 않은 지 꽤 되었다. 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마음 가득히 두려움과 슬픔... 외로움....을 담고 있으면서 아아. 대체 이 녀석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구요."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면서 녀석의 마음은 대체 어떻게 안다는 걸까?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던 리사가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본다. 여자의 표정에 둔한 나 같은 놈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눈빛에는 나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하다.

"오빠에게 정말 실망이에요. 적어도 마리에게 저처럼만 대해주셨어도....."

그녀의 말에 좀 놀랐다. 나에 대해 실망이라는 건 그렇다 치고 그 이유가 대체...

"너처럼 이라니. 그럼 내가 마리랑 .....라도 했었어야 했다는 말이야?"

섹!....이라는 글자로 시작하는 단어를 말할 뻔했다.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예린을 의식하고 그 단어를 얼버무렸다. 그러나 리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요! 오빠라면 적어도 실망은 시켜주지 않을 거라고 믿었어요. 제게 그랬듯이 마리도 애정으로 품어 주리라 믿었다구요!"

"하아. 난 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저도 오빠를 모르겠어요."

끝없는 한숨이 흘러나온다. 우리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실망하고 이해하지 못한 채로 마주 앉아있었다. 더 할 말이 없다면 일어나겠다고 했더니 리사가 마지막으로 묻는다.

"오늘.... 어디 다녀오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왜."

"혹시 마리를 찾아다니신 건가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묻는 리사의 질문에, 나는 그 기대를 저버리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다른 곳에 다녀왔어."

그러자 리사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알았어요."

그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보였다.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라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돌아온다. 선영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하기 그지없는데 거기에 마리와 리사의 일까지 겹쳐진다. 리사가 말하는 의도를 당최 알 수 없다. 분명 내가 마리를 대하기 어려웠던 건 그 녀석의 언니인 리사와 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일도 있고.... 아무래도 마리를 편한 마음으로 대하기는 곤란했다. 그런데 방금 들은 리사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없는 동안 내가 마리를 데리고 자기라도 했었어야 하는 건가 싶다. 그런 망상을 하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리사가 날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권하는 건 아니겠지 싶었다.

잠시 후, 앞집에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차에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예린과 리사가 어딘가 나가는 모양이었다. 굳이 나가보지 않았다.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리사의 얼굴이 생각나서 좀 우울해졌다.

다음 날부터 교생 실습 3주차가 시작되었다. 다음 주는 내가 수업을 직접 진행하는 주간이기 때문에 교안은 물론 수업 준비의 진행 정도에 대한 일을 담당에게 수시로 보고해야 했다. 틈틈이 써온 교안을 가지고 교무실로 갔다. 지애가 앉아있는 책상 옆에 현아가 서 있었다. 지애가 현아에게 뭔가 묻고 있었고 현아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가만히 대답하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잘 들리지 않지만, 어딘가 심각한 기색이 감돌았다. 내가 다가가니 현아가 날 보고 입을 다물었다.

"송 선생님. 보여드릴 게....."

"일단 거기 두세요."

지애의 태도는 어쩐지 차가웠다. 그녀는 현아에게 돌아가라고 말한 뒤 무언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내 날 올려다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최 선생. 내가 처음에 말했던 거 기억하죠?"

"네? 어떤... 말씀이요?"

갑작스럽게 물어보니 뭐에 대해 묻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지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는 학교에서는 물론 학교 바깥에서의 행동도 늘 보는 눈이 있다고. 그래서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이야기했었죠. 기억 안 나요?"

"납니다."

"지금 난 최 선생에게 주의를 주고 있는 거예요. 담당 사수로서. 또 선배 교사로서.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

"알겠습니다."

차갑고 딱딱하게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학교 바깥에서의 행동이라. 설마 ROSE에 드나들고 있는 걸 말하는 걸까. 퇴근할 때까지 지애는 그 점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현아에게 아까 지애와 무슨 이야기 중이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녀를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퇴근길에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갈까, 말까.

지금 내가 메고 있는 노트북 가방에는 ROSE의 지난주 실적 데이터가 정리된 디스켓이 들어있었다. 수기 장부는 물론 사무실에 있지만, 그걸 제대로 읽어내어 거래처에 정확한 금액을 송금할 사람은 드물었다. 내가 데이터베이스로 정리해놓은 파일에서 업체별로 출력해서 그것만 전해줘도 당분간은 ROSE에 갈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제 선영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가 내게 부탁한 일도 몇 가지 있었다. 낮에 있었던 지애의 경고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이번 한 번만 가고 당분간은 발길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나중에 내 교생 실습이 끝나거나 혹은 선영이 돌아올 때 까지만은 입출고 처리나 대금 지급은 좀 미루어두라고 이야기해 두어야겠다.

학교 앞 복사 집에 들러 내역을 출력한다. 미수금 항목과 지급 내역을 꼼꼼하게 분류했다. 이걸 집행할 사람이 유미라고 생각하니 더욱더 신중해진다. 호치키스로 각각의 문서를 찍어놓은 다음 빨간 색 펜으로 겉면에 주의할 사항을 자세히 적어두었다. 과연 제대로 읽고 이대로 해내줄까. 아무리 꼼꼼하게 챙겨도 결코 걱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아. 예전에 선영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도 같다. 그녀는 자신을 사납게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그랬다고 했지만, 내 생각에 아마 여기서 유미 밑에서 일하다 보니 자신이 신경 써야 할 항목이 너무 많아 저절로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ROSE는 아직 개장 전이라 한가했다. 요 근래 자주 드나들었더니 날 알아본 아가씨들이나 웨이터들이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다. 마주 인사하면서 저 사람들은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잠깐 고민했다. 전에 지나는 나보고 유미랑 사귀는 거냐고 묻기도 했었다. 으으.... 다른 건 몰라도 유미와 그런 키스를 하고 있는 걸 들켰으니 지나가 그렇게 묻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사무실로 들어가니 유미가 혼자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날 환대한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예, 안녕하세요?"

인사를 마치자마자 준비해온 문서를 꺼내 들고 유미에게 설명했다. 급하게 처리해야 되는 것과 천천히 처리해도 되는 것을 나누어서 설명한다. 선영이 지시했던 사항도 전한다. 그러나 늘 그렇듯, 유미는 전혀 안 듣고 있었다.

"오늘은 꽤 터프하게 차려 입으셨네요?"

"네?"

"단추 말이에요. 단추."

걸어오는 동안 날이 더워서 남방 위쪽 단추를 좀 열어둔 것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며 유미가 다가온다. 벌려진 옷깃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내 맨살을 쿡 찔러보더니 뭐가 그리 좋은지 혼자 까르르 웃는다.

"단추를 끝까지 채우면 샌님이구요, 하나를 풀면 멋쟁이, 두 개를 풀면 짐승이라고 하던데 지금 선생님은 짐승이네요? 오호호호호."

"아, 예에.... 유미 씨 근데 지금 제 설명은..."

"어머나. 이렇게 방안에 짐승이랑 단둘이 있어도 되는가 몰라. 후후."

어흥! 이라고 외치고 귀에다 "내 말을 좀 들어!"라고 외쳐줄까. 짐승처럼.

"전 사람인데요."

"원래 남자는 다 짐승이에요. 짐승. 사실 저희가 하는 일은 짐승들 상대하는 조련사랍니다. 호호호."

비유만 놓고 보자면 아예 틀린 말이 아니겠지.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유미 씨, 제 설명 좀 들어주세요. 안 그래도 저 오늘 이후로는 당분간 못 올 것 같아서 지금 말씀드리는 거 다 이해해주셔야 되요."

"어머, 왜요? 여긴 못 오신다니?"

유미는 꽤 크게 놀란 듯 보였다. 이유를 설명하기 좀 난감해서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지금 교생실습 하는 동안이라서요. 아무래도 여기에 드나드는 건 좋지 않다는 생각에....."

"저런. 여기가 어때서요? 다들 즐겁게 아가씨 끼고 술 먹고 노는 곳인데?"

"그래서 그게 그러니까 아무래도 세간의 시선이라는 게...."

"시선?"

유미의 얼굴에서 웃음이 점차 사라졌다. 유진이가 잘 짓는 그 무표정하고도 공허한 표정이 어디서 나왔는지 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제 알 것 같다.

"역시 선생님도 여기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다 더럽다고 보는군요. 그렇죠?"

"아뇨.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됐어요. 제가 늘 웃고 있고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이야기에 상처도 받는다구요."

"유미 씨...."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한발 물러났다.

"돌아가세요.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사실 선영이나 선생님 한 분 안 계시다고 여기 안 돌아갈 만큼 그렇게 허술한 곳은 또 아니니까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유미 씨. 제 말을 너무 서운하게 듣지 마세요. 전 그저....."

내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그저 뭐요. 사실 그간 여기 오시는 동안에도 술파는 곳에서 술도 제대로 안 마시고, 아가씨 있는 곳에서 아가씨랑 놀지도 않으셨으니 솔직히 꿀릴 것도 없잖아요. 하실 일만 하고 딱딱 돌아가시니 얼마나 모범생이신가요. 설령 여기 다니는 거 걸리셔도 걱정은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해드릴 테니."

유미는 대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사정을 이야기하면 흔쾌히 받아 주리라 생각했던 난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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