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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글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딱히 종교에 관심도 없는 데다가 살아오면서 수녀를 마주칠 일도 크게 없었던 탓이다. 잠자코 선영의 설명을 기다렸다.
"머리카락은 여성의 정절을 상징한대. 그걸 가림으로써 자신의 순결을 온전히 신에게 바친다는 거야. 이미 신에게 순결을 바쳤으니 자신의 머리카락을 다른 이에게 함부로 보여줄 수 없는 거잖아."
"그렇구나. 몰랐어."
길거리만 나가봐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음껏 드러낸 여자가 넘쳐나는데, 그런 머리카락에 이런 의미가 부여된 줄 여태 몰랐다. 선영의 설명은 이어졌다.
"여기 있는 여자 중에 가장 순결하지 못한 사람은 그걸 볼 때마다 부끄러워. 정말 창피하고.... 난 저걸 쓰고 싶어도 아마 평생 쓰지 못할 거야."
가장 순결하지 못한 사람이라... 자신을 그렇게 지칭하다니. 의외였다.
"선영아...."
"잘 자, 자기야."
그녀는 먼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내고 곰곰이 생각한다. 선영의 태도는 확실히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설마 수녀라도 되겠다는 걸까.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어머니 산소를 다녀올 때까지 그녀는 한결같이 검은색의 옷차림이었다. 상복을 대신하던 그 복장은 그녀를 얽매는 일종의 장치였다. 그러나 지난번 보았던 그녀의 회색 수녀복은 결코 검은색이 아니었음에도 예전 검은 옷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여전히 불편한 지애와의 관계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놓고 나무라거나 탓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내가 저지른 사소한 실수에 꽤 엄하게 대했고 그럴 때마다 난 쩔쩔매야만 했다. 그 둔감하기 그지없는 태근이 형이 나에게 와서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니 사수가 저 지랄이냐는 질문을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하루는 현아가 내게 와서 괜찮냐고 위로해주었다. 괜찮다고 했더니 그녀는 몹시 망설이면서 지난번에 룸살롱 이야기를 지애에게 했는데 그 후로 별일 없었는지를 물었다. 순간 당황했지만, 그냥 별일 없었다고 둘러대고 말았다. 현아는 몹시 안도하며 자신 때문에 내가 곤란해질까 봐 걱정했다고 했다. 사실은 굉장히 곤란하지, 이년아!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냥 사람 좋은 웃음만 허허 흘리고 말았다.
금요일 날 점심시간에 우연히 유진과 마주쳤다. 교실에서야 보는 눈이 많아 녀석에게 말을 걸 기회가 없었지만,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마주친 지금은 달랐다. 녀석의 팔을 잡고 계단 뒤 후미진 곳으로 갔다. 녀석은 내 팔을 뿌리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볼 일이죠, 최. 한.석. 선.생.님.?"
"너 정말 이러기야?"
"내가 뭘요."
"그 투서 말야. 니가 써서 학교에 넣은 그 투서. 그거 땜에 내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
"투서요? 그게 뭔 소리에요?"
유진의 표정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 녀석, 연기력이 아주 제법인걸?
"인마, 너 내가 아무리 너한테... 그랬어도, 그러면 안 되지. 유미 씨 아니었으면 그대로 학교에서 짤렸다구."
"여기서 우리 엄마 이야기는 왜 나와요? 아저씨 우리 엄마랑 만났어요?"
가늘게 변하는 녀석의 눈초리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녀석의 성격이라면 "그래요, 내가 썼어요. 아직도 안 짤렸다니 용하네요." 이런 식으로 나오고도 남을 녀석인데. 뭔가 이상하다. 나도 모르게 주춤 했다.
"어? 니... 니가 아닌가?"
그러나 유진이 내게 한 발자국 다가서며 따지고 든다.
"대체 뭔 소리냐구요. 알아듣게 말을 해봐요."
"아니, 난 그게 그러니까..."
유진을 추궁하려던 게 오히려 내가 추궁을 당하게 생겼다. 여태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유진은 자기 엄마 이름이 나오고부터는 눈에 불을 켜고 날 쏘아본다. 눈빛만으로 내가 활활 불탈 지경이다. 뜨거운 불을 멀리하는 것은 모든 동물의 본능. 나도 본능에 따라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다.
"아니다. 내가 착각했나 봐. 그럼 공부 열심히 하렴."
"거기 안 서요? 사람을 이딴 곳에 끌고 와놓고 알아먹지도 못 할 소리만 하다가 어딜 가려구욧?!"
"으헉. 그게...."
유진이 내 허리띠를 잡고 확 잡아당기는 바람에 배가 눌려 이상한 숨소리가 튀어 나왔다. 아프다, 이것아!
"똑바로 말 안 해요? 제대로 설명 안 해주면 투서인지 뭔지 하는 걸 내가 직접 써다가 학교에 뿌려버릴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말야...."
결국 난 유진의 기세에 눌려 지난번에 들어왔다던 투서의 내용을 말해야만 했다. 내 설명을 듣고 난 유진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했다.
"하, 그럼 뭐야. 아저씨가 선영이 언니 차 끌고 다니고 우리 엄마 가게 드나들고 그리고 나랑 그런 짓 한 게 찔려서 내가 그런걸 썼다고 생각했군요? 참나, 어이없어."
"너 아니라면 됐어."
나는 우물쭈물하며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유진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되긴 뭐가 돼요! 가만, 내가 왜 그런 좋은 생각을 못했지? 난 그냥 아저씨 실습 끝나고 얼굴 안보게 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 방법이 있을 줄이야...."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뜰 때는 정말 귀여운 얼굴이지만 가늘게 뜰 때는 이보다 더 무서울 수도 없다. 흡사 뱀 앞에 놓인 개구리 마냥 나는 마음으로 바싹 엎드렸다.
"유진아, 나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참아줘."
"됐어요. 내가 아저씨가 뭐가 이쁘다고 사정을 봐줘야 되죠? 그리고 아까 뭐랬어요. 우리 엄마 덕분에 뭐?"
"아, 아니... 그... 그건..... "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이야기가 흘러감에 따라 급속도로 당황하고 만다. 유진의 성격상 유미와 나 사이의 일을 듣고 그냥 한 번 더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건드려서는 안 되는 뇌관을 건드린 것이다! 이놈의 주둥아리! 이놈의 단순사고회로! 대체 누구 꺼냐, 이건!!
"그게, 어, 그러니까 내가 요새 ROSE일 많이 도와준다고..... 어머님이 사정을 좀 봐주셨어. 도움을 주셨다고....."
유진의 날카로운 시선을 감히 마주할 생각을 못 하고 벽을 보며 더듬더듬 말을 주워 삼킨다. 그러나 유진의 말은 언제나 내 예상 밖으로 날카롭다.
"딴 걸 준 게 아니라?"
"따... 딴 거라니!"
"당황하는 걸 보니 어느 정도 짐작은 가네요. 진짜 남자들이란...."
가볍게 혀를 차는 유진 앞에서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 말고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진은 날 한번 쏘아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협박 하나를 남기고 갔다.
"진짜 학교에서 짤리고 싶지 않으면 이따 끝나고 우리 집에 와요."
반박이나 반대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다. 날 두고 혼자 먼저 가버리는 유진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머릿속에서 어떤 노래가 들려온다. 조관우의 퇴폐적이고도 끈적한 목소리로, "늪에 빠진 거야~~~" 라고 말이다.
퇴근 시간이 이렇게 두려운 적이 없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 마음을 무심하게도 짓밟으며 초침과 분침은 돌아간다. 시침도 덩달아 돈다. 종례에는 굳이 내가 참석할 필요가 없는지라 교무실에서 지애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돌아오면 인사하고 퇴근하는 게 학교에서의 내 마지막 일과다. 잠시 후, 출석부와 일지를 들고 지애가 교무실로 돌아왔다. 그녀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노트북 가방을 둘러메는데 그녀가 날 불렀다.
"오늘 저녁 약속 있어요?"
"네? 약속이요?"
"저랑 술이나 한잔 하죠."
"저 사실은 약속이...."
가늘고 매섭게 뜬 유진의 눈이 뇌리를 스친다. 어디선가 그 눈이 날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자 지애 역시 불편한 표정을 짓는다. 특정 단어에 힘을 주어가며 또박또박 말한다.
"뭐야. 또 그 룸.싸.롱 가려구?"
"아뇨, 그건 아닙니다!"
"거짓말. 그 여자 만나러 가는 거지?"
"아뇨. 정말 아닙니다. 그냥 다른 아는 애...."
사실 다른 애라고 해봐야 방금 지애가 의심하는 유미의 딸내미, 유진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유진의 이름을 꺼낼 수는 없다. 유진이는 지애가 담임으로 있는 반의 반장이란 말이다.
"알아서 해요. 난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일지를 챙겨가지고 결재를 받으러 가버렸다. 어쩔까 하다가 결국은 그녀를 따르기로 했다. 유진이한테는 늦게라도 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 결재를 받고 돌아온 그녀는 내가 아직 가지 않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자 코웃음을 치고는 말도 없이 가방을 들고 먼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황급히 그녀를 따라 간다. 차에 올라타자 그녀는 어디 간다는 설명도 없이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방향을 보아 전에 갔던 수입 맥주점으로 가나 싶었는데 정작 차를 멈춘 곳은 술집도 음식점도 아니었다.
"저.... 송 선생님. 여긴....?"
"밖에서는 내가 뭐라 부르라고 했지, 한석?"
"누나요."
"누나 집이야.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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