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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76화 (27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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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이 층 양옥집이었고 그녀가 머무는 곳은 1층이었다. 2층은 주인집이란다. 살짝 반지하 삘이 나는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넓었다. 스물네 평이라고, 묻지도 않는 소리를 한다.

"거기 앉아요."

"네."

텔레비전과 침대, 오디오가 갖춰져 있고 한쪽 벽면에 책이 가득한 방 한편에 작은 테이블이 있어 거기 딸린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옷장에서 뭔가 꺼내더니 옆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돌아왔다. 짧은 반바지에 면 티셔츠. 편안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소주, 맥주, 양주. 뭐가 좋아?"

"저 그냥 맥주로...."

그러자 그녀는 소주를 꺼내와서 내 앞에 놓았다.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맥주 안주가 없어."

"그런가요. 그럼 소주 안주는요?"

"시키지 뭐. 족발 좋아해?"

"네에."

그럼 맥주 안주로 치킨 시켜도 되잖아! 라는 소리가 목구멍을 간지럽게 한다. 그렇지만 남의 영역에서 함부로 설치지 않는 게 오랫동안 무탈하게 사는 방법이다. 그녀는 무선전화기를 들고 족발을 시켰다. 그리고 잔을 꺼내와 내 앞에 앉았다.

"갑자기 이런 곳에 끌고 와서 미안해. 나도 여자 혼자 사는 곳에, 그것도 청소도 안 된 곳에 들이고 싶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게 가장 편할 것 같아서 말야."

"네에."

"일단 일잔 하지."

"예."

찰랑찰랑 채운 잔을 들어 그녀와 마주친다. 고개를 살짝 돌려 단숨에 잔을 비웠다. 빈속에 소주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첫 잔은 원 샷이라는 게 인지상정.

"내가 무슨 이야기 하자고 불렀을 거 같아?"

"네? 그거야...."

짐작 가는 게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직접 꺼내기는 민망한 이야기뿐이라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시 채워진 잔을 들어 그저 입술만 적실뿐이었다. 내가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자 지애가 입을 열었다.

"그 여자 말야."

"네? 누구...."

"그 술집 여자."

"아, 유미 씨요?"

내가 이름을 거론하자 그녀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름이 유미?"

"예."

"쳇, 분명히 가명일 거야. 본명은 엄청 촌스러운 이름이라 그런 거 쓰고 있겠지. 그 나잇대에서 그런 이름이 있을 것 같아?"

갑작스러운 험담으로 시작한다. 동조를 하기도 뭣하고 아니라고 말하기도 뭣해서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거긴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대체 얼마나 단골이면 사장이랑 그러고 있어?"

"아뇨. 단골은 아니구요...."

난 그제야 내가 그곳에 간 것은 술을 마시러 가거나 여자를 취하러 간 게 아니라는 변명을 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제가 아는 분이 거기서 일을 하는데 그분이 당분간 일이 있어가지고요. 제가 그분에게 신세 진 게 많아서 대신 들어가 도움을 드리고 있던 거예요. 결코 송 선생님이... 아니, 누나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로 가 있던 게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지애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젓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말했다.

"뭘 믿어 달라는 거지? 사장이랑 떡 치는 사이라는 걸? 그거야 내 눈으로 봤으니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지."

"누나, 그건 정말이지..... 어쩌다가....."

"남녀 사이에 어쩌다가 라는 건 없어."

그녀는 딱 잘라 말하고 자기 앞에 놓인 잔을 단번에 비웠다. 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그녀는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남자는 늘 준비되어 있겠지만, 여자는 아니란 말야. 남자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이 했다는 건 십중팔구 여자가 노리고 노린 경우에나 그게 되는 거야."

"그...그런 건가요?"

어쩐지 그녀가 아까보다 내게 더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족발이 배달되었다. 지애가 나가서 족발을 받아왔다. 테이블에 펴놓는 것을 돕는다. 젓가락을 들고 몇 점 집어먹었다. 대화의 맥이 잠깐 끊겼다. 쫄깃한 식감의 족발을 씹으면서 방금 들은 지애의 말을 곱씹어본다.

듣고 보니 리사도, 선영도, 유미도..... 그랬던 것 같다. 물론 그녀들에게 호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데에는 그녀들의 준비해놓은 듯한 어떤 페이스에 휘말린 덕분이었다. 역시 여자는 다르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한 "여자"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게 기억났다. 그럼 그 녀석도... 어떤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건가? 어헉.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조금 무섭기까지 하다.

"유미라고 했던가?"

"네? 네."

지애는 한참 뭔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재수 없는 여자인데 어쩐지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어. 그냥 술집 여자 같지 않아."

"그...그런가요?"

예전에 선영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사람의 장래를 본다는 유미. 그녀가 보았다는 내 장래. 그런 그녀이니 보통 사람과 눈빛이 조금 다를 수도 있겠다. 난 잘 모르겠지만... 지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사실 난 그 자리에서 도망친 거였어. 유미라는 그 여자가 던진 말에 놀라서....."

"도망....이라뇨?"

"아니. 이런 이야기까지는 필요 없겠지."

테이블에 놓인 내 손 위로 지애의 손이 겹쳐진다. 깜짝 놀란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촉촉한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난 어쩌면 그 여자가 부러웠는지도 몰라. 솔직하게 ...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솔직하게 요구하고 가질 수 있는 그 여자를 말이야."

"누.... 누나."

그녀가 점점 내게 가까워진다. 바싹 다가선 얼굴을 외면할 수 없다. 입술이 겹쳐졌다.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키스는 깊고도 길었다. 한참 만에 떨어진 그녀는 다소 붉어진 얼굴을 돌리더니 이내 몸을 뒤로 물린다. 그녀는 날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난 분명 한석이한테 주의를 주려고....."

"누나."

"하아. 미안. 내가 지금 좀 열이 올랐나 보다.... 또 실수할 수는 없는데."

그녀는 몸을 바로 하더니 술 한 잔을 따라 홀짝 마셔버렸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족발을 계속 먹고 있기도 뭣하고 해서 일어나기로 했다. 그녀는 현관으로 따라 나오며 말했다.

"그냥 자고 가."

에엑? 그랬다간... 잠만 잘 것 같지가 않은데?

"아뇨. 저.... 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

"아까 약속 있다던 그거?"

"네."

"이렇게 늦었는데?"

시계를 보니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별다르게 한 일도 없는데도 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렸을 줄이야. 유진이에게 또 혼나려나.

"늦게라도 꼭 가야 되어서요."

"여자구나?"

지애가 단정 지으며 말한다. 난 조금 당황했다.

"네? 아.... 네에."

"참나. 쉽게도 대답하네. 방금 나랑 그래 놓고 그 여자랑 또 만나는 거야?"

당신이랑 내가 대체 뭘 했다고!!

"아, 아아뇨. 그 녀석이랑은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아까도 말했지. 남자는 그런 생각이 없어도 여자가 마음먹고 있으면 넘어갈 수밖에 없어."

"안 넘어갈 거예요. 게다가 그 녀석한테는 넘어가지 않도록 다른 사람이랑 약속을 해놔서...."

"그건 또 무슨 소리래?"

지애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설명하긴 곤란하지만... 암튼 그런 게 있어요."

"치잇.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아야야. 누나, 아파요."

그녀가 내 귀를 한번 잡아당기더니 씨익 웃는다. 아까까지는 다소 어색한 분위기이긴 했지만, 귀를 잡아당기는 그녀의 친숙한 행동 이후 그녀와 난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현관에 선 채로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그녀는 주로 남자의 몸가짐에 대해 훈계했고 난 누나의 잔소리를 경청했다. 잠시 후 집을 나와 큰길로 나갔다. 택시를 하나 잡아타고 유진이네로 향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벌써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앞에서 내린 나는 막상 들어가기가 겁이 났다. 유진이가 무서운 건 아니다. 자신의 몸을 줘가며 다짐을 받았던 선영과의 약속을 깨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한번 유진이를 바람맞힌 적이 있었기에 녀석과의 약속을 또 저버리기도 미안했다. 심호흡을 하고 유진이네 집 벨을 누른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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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애를 공략하는 건 별도의 외전에서 하게 됩니다. 나중에 기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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