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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누구세요?"
"나야."
지체 없이 문이 열렸다. 어깨가 훤히 드러난 끈 달린 원피스 형태의 잠옷을 입고 있는 유진이가 현관에 서 있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저건 호랑이다! 호랑이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왜 왔어요?"
"왜....라니. 아까 니가 오라고 했잖아."
"내가 이야기한 건 학교 끝나고 바로 오란 이야기였지, 이런 시간에 오란 이야기는 아니었는데요."
"니가 딱히 시간은 이야기 안 했잖아."
"뭐라구요?"
유진의 얇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난 속으로 몹시 찔렸지만,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기로 했다. 유진은 날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묻는다.
"그래서 지금까지 어디 있다가 오는 건데요? 설마 우리 가게에 갔다 온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 다른..... 니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잖아."
"하. 그러네요. 내가 아저씨 마누라도 아니고. 근데 우리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죠? 일단 들어오세요."
"저... 저기 말야. 난 저기 그러니까...."
내가 현관에 서서 들어가기를 주저하자 녀석이 의아해 했다.
"왜요? 맨날 잘 들어오다가."
"아니, 난 너랑 그러니까 음... 그럴 생각 없거든. 그래서 오늘도 결코......"
내가 손을 휘저으며 횡설수설하자 유진이가 천장을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푸하. 아, 진짜 뭐래? 아저씨 무슨 이상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나도 나 싫다는 사람한테 그렇게 거부당하고도 또 들이댈 생각은 없거든요? 자기가 뭐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아."
"그....그런 거냐?"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들어오기나 하세요."
몹시 뻘쭘해진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유진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예의 그 자리에 앉아 유진이 주는 주스 잔을 받아들었다.
"그러면 왜 오라고 한 거야?"
"아저씨한테 투서가 들어왔다면서요. 그런 거 들어오면 짤리는 거 아니에요? 그걸 그냥 한 번 둬요?"
"가만 안 있으면?"
"무슨 조치라도 취해야죠. 윗선에다가 끈을 대어서 안 잘리게 하든가 투서를 넣은 인간을 밝혀내서 손목을 비틀든가."
"허."
신이시여. 정녕 이게 올해 열일곱,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짜리 여고생이 할 소리입니까. 게다가 녀석이 말한 것 중에 하나는 이미 행해진 일이었다. 물론 유진이가 한 건 아니고 녀석의 엄마인 유미의 작품이렷다.
"저... 윗선이라고까지는 모르겠지만, 유미 씨가 교장 선생님이랑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야. 이번에 있었던 건 그 덕분에 넘어갔어."
"엄마가요?"
"응."
유진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째려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 이름을 엄청 친근하게 부르네요? 아까 낮에도 그렇고. 대체 둘이서 뭐 한 거예요?"
"아까 말했잖아. 요새 선영이 대신해서 ROSE일 도와드리고 있다고....여기 이 노트북도 일 도와드리고 받은 거야."
"정말, 일만?"
"........."
입을 열면 또 내 특유의 정제되지 못한 헛소리가 나올까 봐 아예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나 나보다 더 영리하고 남녀 문제에 있어서는 훨씬 더 예민한 레이더를 가지고 있는 이 녀석은 나오지도 않은 대답을 모두 캐치한 모양이다. 녀석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진짜 선영이 언니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했는데 엄마까지..... 됐어요, 됐어. 난 이제 정말 아저씨한테 이제 아무런 생각 없으니까 이제 앞으로 마음대로 하고 다니세요."
"미안하다, 유진아."
"됐다니까요. 뭐가 미안해요? 아저씨랑 나랑 언제 뭐 무슨 사이라도 됐어요? 기껏해야 그냥 아는 사이지."
유진은 살짝 짜증을 부리긴 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래도 그냥 아는 사이인 분이 곤란하다고 하니 아까 그 투서 문제나 빨리 해결 해봐요. 아저씨는 그런 일이 있는데도 그냥 생각 없이 다니고 있었단 말이에요? 안 찜찜해요?"
"찜찜하긴 한데.... 내가 뭐 어떻게 하겠어. 일단 ROSE는 발을 끊었고 학교에 차는 안 가져가려고. 학생이랑 그런 건...."
나도 모르게 유진을 쳐다보자 녀석은 얼굴을 일부러 일그러뜨리며 어흥-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호랑이 맞네.
"뭐, 아무 문제없으니까. 괜찮지 않겠어?"
"아저씨는 그게 문제에요. 증말 아무 생각 없는 게."
"에에."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는데도 여자 꼬이는 걸 보면 정말 신기하긴 한데 그건 논외로 치고... 학교 내에서 아저씨에게 적대감을 품을만한 사람은 또 생각나는 사람 없어요?"
"적대감? 글쎄에.... 적대감을 품게 할 만큼 오래 한 것도 아니잖아. 이제 겨우 3주차가 끝나 가는데..."
천하의 나처럼 적이 없는 사람이 또 있을라구.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호랑이 너만 빼고 말이다.
"그거야 모를 일이죠.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잖아요."
"여자? 그 투서를 넣은 게 여자야?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남자라면 투서고 나발이고 술 한번 마시고 깽판 치면서 멱살 한 번 잡았겠죠. 그런 치졸한 짓은 여자가 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만약 남자가 넣었다면 정말 가운데 다리 달고 다닐 자격도 없을 정도로 속 좁은 놈이라던가."
뭔가 남녀 성역할 내지는 남녀의 행동양식에 대한 편견이 물씬물씬 담겨 있는 듯한 발언이었지만, 여기에 반박한다고 해도 딱히 이득이 없기에 조용히 있었다. 유진은 뭔가 좀 더 생각하는 눈치더니 손을 내저었다..
"잠깐, 근데 그 투서가 정말 아저씨를 노린 게 맞아요?"
"어? 아마도....?"
"아니죠. 이름 같은 게 쓰여 있지는 않았잖아요. 안 그래요?"
"그건... 그렇지. 교생 하는 모 군이라고 했단 말야. 모 군이라면 당연히 남자인데 남자라고는 나......."
아니다. 또 있구나.
"설마 태근이 형인가?"
"그 무식하게 생긴 체육 선생님이요?"
지능적이었는데, 그분은.
"어? 어... 그러고 보니 그 형도 차가 꽤 비싼 차였지."
"아저씨가 괜히 찔리는 짓 하고 다니니까 지레짐작으로 자기 노린다고 생각하고 혼자 겁먹은 걸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평소에 행실을 바르게 하고 다녀야죠."
"아, 예."
고개를 조아린다. 평소에 행실을 바르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교생하고 다니면서 뭐 특별히 있었던 일 같은 거 있어요? 기억나는 대로 다 말해 봐요."
"다?"
"뭔가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다요. 단서가 될지도 몰라요."
결국 나는 교생을 시작하고 나서 있었던 대부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 빼고 전부 정신을 잃어 어쩔 수 없이 ROSE에 전부 갔었던 첫 회식부터 시작해서 태근이 형이 사줬던 레스토랑 이야기, 현아랑 떡볶이 먹은 이야기, 실습 동안 오고가며 형이나 은애, 현아랑 했던 이야기, 형이랑 농구했던 이야기 등을 모두 털어놓았다. 때론 얼굴을 찡그렸다가, 때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듣고 있던 유진이 말을 보탠다.
"아, 그 피자 이야기는 저도 들었어요. 저희 반에 농구부인 애들이 있는데 걔네들이 지난주부터 이야기하더라구요."
"음. 애들이랑도 허물없이 잘 지내고... 선생들 사이에서 평도 나쁘지 않고, 형이라면 딱히 적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짐작이 가요."
"누구?"
"그 여자 교생 두 명 있다고 했죠? 체육쌤이 좋아하는 여자 선생님이 현아라는 수학 선생님이라고 했던가요? 그 쪼그마한?"
"어? 어. 형은 나름대로 잘해주려고 애쓰는 모양이던데."
"그리고 그 국어 선생님. 이름이 뭐랬더라?"
"박은애."
"그래요. 그 선생님은 아무래도 물 먹은 것 같고...."
"물 먹다니?"
사람이 좀 알아듣게 설명해줘.
"아저씨 말만 듣고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내 느낌이 그래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 은애라는 선생님을 지켜봐요."
"은애를?"
"그리고 그 정도로 혐의가 있진 않지만...그 체육쌤이 너무 과도하게 들이대는 거면 수학선생님이 짜증나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털어내려고."
투서를 쓰고 있을 현아를 상상해본다. 영 안 어울리는데?
"햄아가 그럴 애로 보이진 않던데...."
"어쭈. 지금 감히 내 추리를 의심하고 그 선생을 감싸는 거예요?"
"감싼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보기에 걔 성격이 그럴 애로 안 보인다는 거지."
그러자 유진이가 팔짱을 턱 끼더니 날 위아래로 훑어본다.
"아저씨가 여자 볼 줄 알긴 알아요?"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시계를 보니 열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유진에게 어서 자라고 이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으로 향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왕 늦었는데 자고 가도 돼요."
오늘따라 나보고 자고 가라는 여자들이 왜 이렇게 많지.
"나한테 손 떼겠다며?"
"누가 뭐 하자 했어요? 말 그대로 자고 가라는데 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진짜."
뾰로통한 유진의 반응이 이제야 예전 같다. 손을 들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고는 집을 나왔다. 아까보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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