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8 / 0471 ----------------------------------------------
Route 5
그 큰집에 녀석 혼자 두고 가는 게 내심 내키지 않기도 하고 이 늦은 시각에 여자랑 단둘이 있는 게 설레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평소라면 선영의 호출이 오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없었다. 마지막 통화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이야기만 반복할 따름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워서도 계속 선영을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없는 동안 다른 여자에게 휘말리고 다니는 주제에 이제야 선영에 대해 생각하는 게 조금 찔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 머릿속에서는 늘 그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침대에 모로 누워 전화기를 바라본다. 어쩐지.... 어쩐지..... 저 전화가 울릴 것 같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곳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전화벨 소리. 날 부르고 있다. 아직 받지도 않았지만, 난 직감했다. 저건 선영의 전화였다. 그녀가 날 부르고 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구르듯 전화로 다가갔다. 받아들었지만, 선영의 목소리를 들리지 않았다. 대신 울음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날 부르는 울음소리에 나는 주저 없이 전화를 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차에 시동을 걸고 새벽의 도로를 달린다.
서울에서 충남까지.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단숨에 달려간다. 새벽 어스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돌봄의 집에 도착했다. 수녀 한 분이 나오시더니 시내의 병원 한곳의 이름을 이야기해 주었다. 다시 차를 돌려 시내로 들어선다.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해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찾던 곳을 발견하여 들어간다. 차를 세워두고 장례식장의 장소를 물어 한 달음에 달려갔다.
"자기야...."
"선영아."
텅 빈 빈소에 혼자 앉아있던 선영이 나에게 안겨왔다. 울고 있지는 않았으나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를 안고 토닥여 준다. 그런 후에 향을 올리고 절을 드린다. 선영과 맞절을 마치고 그녀의 곁에 앉았다. 파르르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어떻게.... "
"그냥 뭐. 항상 그렇듯이 골골하다가... 잠들었어."
"그러셨구나. 다시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젊었을 적 찍은 사진임이 분명한 그분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삼십 대 정도에 찍은 사진이었는데 꽤나 미남이었다.
"그러게. 그 사람도 자기 보고 싶다고 했었어."
"부르지 그랬어."
"주말이면 온다고 했는데 일하는 사람을 뭐 하러 따로 불러."
선영의 표정은 담담했다. 검은 상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얼굴에서는 예전의 표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기, 오늘 출근해야 되는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연락만 하면 돼."
"얼른 연락해 봐. 정말 미안해."
"미안해하지 마. 괜찮으니까."
선영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공중전화로 찾으러 나왔다. 우선 학교에 전화를 걸어 지애에게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이야기하자 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알았노라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다시 동전을 넣었다. 유진의 집 전화번호를 누른다. 예상대로 유미가 받았다.
"접니다, 한석."
"하암... 한석 씨.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다들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시각이지만 그녀에게는 이제 막 잠든 시각이겠지. 난 조심스럽게 서두를 꺼냈다.
"저 사실은 선영이가...."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싶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구나. 아... 맞다."
반쯤 졸고 있던 유미의 목소리가 갑자기 생생해진다.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그녀가 묻는다.
"그래서 지금 어디죠?"
도시와 병원 이름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빈소로 돌아갔다. 장례식장은 두어 개의 빈소가 더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그곳들을 보고 있노라니 선영의 빈소가 더욱더 초라해 보였다. 바닥에 앉아 한쪽 무릎을 세워 거기에 턱을 얹은 채 영정사진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선영의 곁에 앉았다.
"수녀님들은... 안 오셔?"
"맨 처음에 여기 올 때.... 그때 다 같이 오셔서 기도해주고 돌아가셨어. 돌봐야 할 분은 아직 산 위에 많이 계시니까."
"그런가."
유미에게 연락했다고 했더니 선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혹시 더 연락할 곳은 없어? 친척이라든가....."
"없어. 그런 건."
"그래...?"
대화는 길어지지 않았다. 예전에 얼핏 듣기로 그녀의 부모님들도 천애고아였다고 했다. 원래 형제, 자매, 친척도 없는 선영은 이제 천애고아가 된 셈이다. 그녀는 다시 영정사진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식장 직원이 와서 발인을 언제 할 거냐고 물었다. 토요일 새벽에 졸 하셨으니 삼일장이면 월요일 아침에 해야 되나 생각하고 있었다. 선영에게 묻자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일 아침에 할 거예요."
"내일? 삼일장도 안 치르고?"
"본인이 그렇게 해 달라고 했어. 세상에 민폐를 하도 많이 끼쳐서 오래 머무를 생각도 없다고."
세상에 민폐라....
"선영아, 그래도...."
"엄마 옆에 빨리 가고 싶데. 본인이 그러고 싶다는데 해줘야지."
2일장이라니. 장례를 많이 겪어 본 것은 아니지만, 이런 건 처음 본다. 직원에게 가능하냐고 묻자 그런 경우도 아예 없는 건 아니란다. 절차 같은 것을 의논한 다음 선영에게 다시 돌아왔다. 아침 식사를 권했더니 생각이 없단다.
"자기라도 먹어. 여기 말하면 음식 가져다줄 거야."
"같이 먹자. 조금이라도 들어."
"몰라. 그냥 입맛이 없어."
"너 안 먹으면 나도 별로 생각 없어."
선영은 한숨을 내쉬더니 음식 하는 아줌마한테 국 두 그릇과 밥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일회용 접시에 담긴 반찬과 떡, 편육이 올라간 상이 한 상 차려졌다. 선영은 국을 몇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이내 내려놓는다. 그러면서 나보고는 꼭 다 먹으라고 권하면서 다시 영정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억지로 그릇을 비워 상을 물리고 그녀 곁에 가서 앉았다. 곡도 하는 사람도 없고 찾아오는 이도 없이 적막함 그 자체의 빈소에서 우리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렇게 꼭 붙어 앉아있었다. 어느새 그녀가 손을 뻗어와 내 손을 쥔다. 나 역시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저녁이 다 되었을 무렵, 한 무리의 아가씨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다들 검은 옷을 입고 오긴 했지만, 어쩐지 몸매가 너무 드러나는 차림새가 이곳과는 살짝 안 어울리기도 했다. 그래도 와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가웠다. 요 근래 ROSE에 다니면서 눈에 익은 얼굴들이 많이 있었다. 그녀들은 선영을 위로하고 차례로 향을 올렸다.
그중에는 유미와 유진 모녀도 끼어있었다. 유미는 선영을 안아주었고 선영은 유진이를 안아주었다. 산속 절간 분위기였던 빈소는 단숨에 시끌벅적하게 바뀌어 버렸다. 예전에는 장례식장에서 어른들이 왜 그렇게 떠들썩하게 있는지 이해를 못했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직원을 불러 음식을 준비하고 화투짝을 가져오고 술을 추가하는 일들을 하다 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슬픔에 젖을 시간이 없도록 만드는 것. 그게 문상객의 일인 듯싶다.
밤이 늦어서 유미와 선영, 나 이렇게 셋이 한 상을 두고 둘러앉았다. 유진이는 안쪽에 있는 쪽방에 들어가 내가 덮어준 담요를 두른 채 자고 있었다. 대부분의 아가씨들은 자고 있었고 몇몇 아가씨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고 있거나 화투를 치고 있었다. 유미가 한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나! 너무 판돈 올려서 치지 마. 너 지난번처럼 희지한테 또 월급 통째로 압류되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해!"
"알았어요, 언니. 왕언니는 안 쳐요?"
선영이 메마른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 앞에 놓인 잔을 유미가 채워주었다. 병을 내려놓은 유미가 묻는다.
"내일 발인한다고?"
"응. 이제 더 올 사람도 없어."
"그래도 삼일장은 하지 않아?"
"뭐 하러."
선영은 잔을 단숨에 비웠다. 유미가 계속 물었다.
"장지는 어디야?"
"엄마 있는 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그런 이야기는 다 해놓고 갔어. 삼일장 안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그럴 거면 빈소를 서울 쪽에 잡지 그랬어."
"경황이 없어서... 한석이한테도 연락 겨우 했어. 그것도 병원도 못 알려주고 그랬는 걸?"
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유미가 빙긋 웃는다.
"둘이 사이좋네?"
"왜, 좋으면 안 돼?"
"아니, 부러워서."
기분 탓이려나. 선영과 유미 사이에 묘한 견제와 알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괜히 입을 열었다간 분란이 생길 것 같아 잔을 들어 입을 가렸다.
"나 없는 동안 한석이가 가게 잘 봐줬다면서?"
"응. 그래서 나도 한석 씨 좀 잘 보살펴 줬어. 그쵸, 한석 씨?"
유미의 손이 내 허벅지 위에 얹힌 걸 본 선영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난 유미의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내고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전 눈 좀... 붙이겠습니다."
두 여자는 서로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어서 내가 뭐라고 하든 신경을 쓰지 않았다. 쪽방으로 가니 남는 담요가 하나 있었다. 그걸 대충 두르고 유진이 옆에 앉았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
*
*
──────────────────────────
"전부 언니가 말했던 대로네. 날 괴롭게 하는 사람이 곧 나타날 거라고, 그리고 금방 떠날 거라고."
"마셔."
유미는 선영 앞에 놓인 잔을 채웠다. 선영은 종이컵에 찰랑거리는 맑은 소주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젠 이 세상에 나와 관련된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았어. 뭐랄까. 텅 빈 밤하늘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풍선 같아. 그런 거 있잖아. 유원지 가면 안에다 가스 넣어서 파는 거. 아이들이 손에 잡고 있으면 저절로 뜨는 풍선. 근데 이제는 아무도 잡지 않아서 멀리멀리 날아가 버린 풍선."
유미는 자기 잔을 혼자 채운 다음, 홀짝 마셔버렸다.
"아직 그 풍선 끈을 잡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선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한석을 바라보았다. 벽 쪽에 유진과 나란히 기대어 앉은 채 자고 있는 한석은 코까지 골고 있었다. 유미는 선영의 시선을 확인하고 살짝 웃었다.
"저 사람은 널 놓지 않아."
"대체 왜..."
"글쎄. 그야 나도 모르지. 내 나름대로 열심히 인사도 해봤는데, 통 먹히질 않네."
말을 마친 유미는 혼자 까르르 웃어버렸지만, 선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같은 일을 하는 여자이기에 그녀가 말하는 "인사"라는 게 뭔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떠나면?"
자신을 풍선에 비유하던 선영은 유미에게 풍선이 어디 멀리 날아가 버리면 어쩌겠냐고 물어보았다. 유미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럼 넌 살아. 하지만, 영원히 저 사람을 볼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게 조건이지."
내심 수녀의 길을 염두에 두고 있던 선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것은 금남의 길이다. 속세를 피하는 피정의 길이다. 유미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낸 적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웃으면서도 한 번씩 묘한 소리를 던지는 언니의 말투는 소름 끼치도록 늘 정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유미라면 선영의 속내를 이미 오래 전에 보았는지도 몰랐다.
"함께 한다면?"
"넌 죽어."
유미는 마치 내일 날씨라도 이야기하듯 쉽게 이야기했다. 듣고 있던 선영이 그 무게감을 느낄 시간도 채 주지 않을 정도였다. 뒤늦게 알아차린 선영은 쓰게 웃었다. 한 번도 자신의 목숨을 무겁게 생각한 적 없는 그녀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가벼움은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였다. 여전히 선영 앞의 잔은 그대로였다. 선영은 손을 뻗어 그걸 단숨에 마셔버린다. 그리고 언니에게 물었다. 비록 술을 마신 후였지만, 그래도 질문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만약... 내가... 혹시... 저 사람과...둘 사이에..."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
*
한석은 이 대화를 듣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