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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다음 날 새벽, 선영이 날 깨웠다. 내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던 유진이도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장례식장 직원들이 와서 이미 발인준비를 대부분 끝내두었다.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워 버스에 올라타게 한다. 장의 차량에 실리는 관을 선영과 함께 지켜보았다. 선영의 눈은 피곤에 젖어 있었지만,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나와 선영도 버스에 올라탔다. 장지까지의 거리는 제법 멀었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아침식사를 한 것을 제하고는 계속 달려서 벽제에 도착했다. 식당 하나를 정해 다 같이 식사를 했다. 다들 식당에 있는 동안 선영과 내가 관리사무소에 가서 절차를 밟았다. 등록이 모두 끝나고 인부들까지 준비되고 나서야 산에 올랐다.
예전에 저녁에 온 적이 있었지만, 이런 대낮에 오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인부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관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 손을 잡고 서 있던 선영이 순간 휘청한다. 깜짝 놀란 내가 그녀를 부축한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선영아...."
멍한 표정의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내 손가락이 그녀의 눈가를 훔치자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입관이 끝나고 흙으로 채워지는 구덩이를 보면서 그녀는 흐느꼈다.
"아빠.... 아빠......."
살아 있을 때는 부르지도 못했던 호칭이 그제야 터져 나왔다. 슬픔은 전염된다. 나 역시 눈물이 흘렀다. 유진이도 울고 유미는 고개를 돌렸다. 여태 곡소리 한번 없던 장례가 선영의 울음이 터져 나온 이후로 울음바다가 된다. 인부들은 묵묵히 흙을 덮고 봉분을 만들뿐이었다.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 시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후였다. 중간에 운전기사와 인부들 수고비 정산하느라 실랑이가 한 차례 있기는 했지만, 유미가 도와줘서 잘 해결되었다. 아가씨들을 데리고 돌아가려는 유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자 그녀는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어때요, 시간 나면 또 ROSE에 놀러 오겠어요?"
"아뇨. 유미 씨 전...."
선영 쪽을 돌아보는 날 향해 유미는 웃음을 던졌다.
"토요일 황금 영업일을 공친 건 별로 아깝지 않은데 한석 씨 뺏기는 건 좀 뼈아픈 걸?"
"네? 아, 저는..."
"됐어요. 선영이나 잘 부탁해요."
그러고는 내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내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서자 그녀는 윙크를 날렸다. 누가 이 모습을 봤을까 싶어 주위를 돌아보다가 유진이와 눈을 딱 마주쳤다. 선영은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유진은 굳은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팔을 뻗어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딱 한 대만 때릴 테니 고개 좀 숙여 봐요."
"거짓말. 한 대가 아니라 두 대...."
"아, 진짜. 한 대만 때릴 거라니까요."
기왕 맞을 매라면 빨리 맞는 게 낫겠다 싶어 허리를 굽히자 내 뺨에 강렬한 입술이...... 어라?
"선영이 언니, 잘 해줘요."
한쪽 볼을 감싸고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 유진은 몸을 돌려 제 어미에게 달려갔다. 나를 쫄게 해서 꼼짝도 못하게 하고는 그 사이에 입을 맞춘 유진은 이쪽을 돌아보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혀를 낼름 내밀었다. 허, 녀석, 참나.
그렇게 모두 돌아가고 나와 선영만 남았다. 우리는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몇 주 동안 주인 없이 비어 있던 방은 싸늘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나를 찾았다. 정확히는 내 몸을 찾았다. 검은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살색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 둘은 격렬하게 섹스를 나누었다.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고 산 사람을 맞이하는 의식을 우리는 그렇게 치렀다.
한바탕 정사가 끝난 후, 여전히 알몸인 채로 선영은 내 팔 하나를 베고 누워있었다.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야 실감이 들어."
"어떤 실감?"
"이 세상에 오직 나뿐이라는 거 말야.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도 그런 느낌이 들긴 했지만... 내심 그런 꼴 뵈기 싫은 사람이라도 내 혈육 하나가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이제 그 사람... 아니, 아빠까지 그렇게 가고 나니까 이제 정말 이 세상에는 나 하나뿐이구나 하는 생각뿐이야."
"선영아..."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꽉 끌어안는다.
"그런 슬픈 말은 하지 마. 너한테는...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
"자기가?"
"그래. 내가 네 곁에 있어줄게. 언제까지나."
선영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의 진심 어린 말에 감동한 것일까. 한참 만에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가 꺼낸 말은 내 예상 밖이었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
내가 언제 웃겼다고. 난 나름대로 감동 어린 말이라고 생각하고 한 것인데...
"웃기다니."
"자긴 지금 날 동정하는 거야. 부모 잃고 아무것도 없는 여자 하나를 조롱하는 거라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렇잖아. 난 부모형제도 없고 집도 절도 없는 고작 흔한 술집 계집일 뿐이야. 그런데 자기는 아직 앞길이 창창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이런 여자 옆에 있겠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믿을 것 같아?"
여태 선영은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굳이 비슷한 경우를 찾으라면 예전에 유진의 과외를 그만두라고 소리 쳤을 때와 비슷했다.
"날 못 믿어? 내가 여태껏 널 위해서 얼마나..."
"알아. 내가 자기에게 얼마나 기대왔고 위로를 받았는지를. 그렇지만 남자들은... 자지 달린 것들은 다 똑같아. 결국은 떠나고 말거라고."
"왜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날 생각부터 하는 거야? "
"난 이 일을 해오면서 그런 경우를 너무 많이 봤어. 다른 언니들이 몸도 주고 마음도 주고 어떻게 만신창이가 되는지 똑똑히 봤었다고."
"그건 다른 사람 경우지."
선영은 고개를 저었다.
"자긴 얼마나 다를 것 같아?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다 알고 있는 사람이 언제까지 날 아끼고 사랑해줄 것 같아? 그럴 일은 아마 없을 테지만... 정말 만약에, 내가 어떤 남자에게 정착을 한다면 그건 내 과거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일 거야. 자긴 결코 아니라고.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자긴.... 안 돼. 그럴 수 없어."
"선영아. 난 결코 네가 무슨 일을 하든..."
그녀는 손을 뻗어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우리 관계가.... 어떤 약속으로 시작했는지 알고는 있어?"
알고 있다, 모를 리가 없다. 애정이라고는 끼어들 틈이 없는 몸 대 몸의 계약관계. 그게 그녀와 나의 시작이었다.
"난 두려워. 자기와 나 사이가 유진이에게 들키면... 그러면 어쩔까 늘 두렵다고. 그 아이가 날 어떤 눈으로 볼까 두려워...."
그녀는 내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 서럽게 우는 그녀를 달래는 방법을 난 잘 알지 못한다. 유진이가 이미 그녀와 내 사이를 눈치 챈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나? 아니면 유미에게도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나?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울고 있는 그녀를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도 전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남자의 몸이란, 그래, 자지 달린 것들이란 똑같다. 알몸의 여자가 몸에 안겨 있다면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 이어질 따름이다. 선영은 울면서 나를 거부했다. 나를 거부하면서 나를 찾았다.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을 찾아 헤매고 그녀의 다리가 내게 감겨진다. 내 몸에 올라타 날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전혀 추하지 않았다.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는 물건을 소중하게 어루만지더니 자신의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내 것을 받아들이며 그녀는 울음 섞인 신음을 토해냈다.
"난 단지 자기한테 이것만을 원했어. 정말이야. 자기가 날 소중하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난 더 비참해진다고. 그거 알아?"
"몰라. 하지만 네 생각은 틀렸어. 지금 니가 맘이 많이 괴롭고 어지러워서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는 거야."
그녀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마치 내 몸만을 원한다는 그녀의 말이 진실인 양 그녀는 전에 없이 나를 탐했다. 내 몸 위에서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그녀는 마치 죽으려는 사람 같았다. 그렇게 내 품에서 울고 웃고 하던 그녀였지만, 아침이 되자 그녀는 나를 내보냈다.
"난 더 이상 너에게 기대고 싶지 않아."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침대에서 먼저 나와 옷장 속에 있는 검은 옷을 꺼내 입은 그녀는 내게 찾아오지 말라고 부탁했다. 내가 나서고 문이 닫히고 난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울고 있을 것이 분명한 그녀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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