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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하윽... 흑... 안에다 싸고 싶다며...싸기 전에... 빼서... 흑...."
무어라 더 말을 하려던 그녀는 점점 더 빨라지는 내 스피드에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전이라면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겠지만, 결국은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의 안에서 내 물건이 그대로 폭발했다.
"서... 선영...아... 끄윽..."
"하악...학... 뭐...뭐야... 이잉..."
말로는 날 타박하는 그녀였지만, 그 순간에도 그녀의 두 다리가 내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몸의 일부를 그녀의 중심에 꽂은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노라니 선영은 키스 대신 내 어깨를 살짝 깨문다.
"아, 아야."
그렇게까지 아프지 않은데도 일부러 비명을 질렀다. 선영은 내 귀를 살짝 잡아당기며 볼멘소리를 했다.
"싸지 말라고 했잖아... 싸면 어떻게 해."
"아, 그게..."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내심으로는 또 변명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선영은 너무도 사랑스러웠고 그 얼굴을 향해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느니, 나는 키스로 입을 막는 쪽을 택했다.
"웁- 우움..."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모두가 잠든 밤이지만 난 그녀를 재울 마음이 없었다. 그녀 역시 그저 나와 함께 자기 위해서만 그 먼 길을 달려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선영을 품에 안았고 그녀 역시 나를 안았다.
"사랑해..."
틈만 나면 그녀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마치 평상시에 못해준 그 말을 지금 몰아서 다 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러했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면서 계속해서 말해주었다.
"사랑해..."
난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 역시 날 사랑했다. 우린 함께 할 거라 믿으며 몸을 맞대고 살을 섞었다. 길고도 뜨거운 밤이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순식간에 지나고 마는 길고도 짧은 밤이었다.
"사랑해..."
결혼 후에도 그렇게 속삭였다.
"사랑해..."
아이를 낳고도 그렇게 속삭였다.
"사랑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선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뜬다.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전까지의 "꿈"을 어서 잊으라는 듯 몹시 아프게도 현실감이 날 파고든다.
몸을 일으켰다. 내 몸을 덮고 있던 두꺼운 이불이 흘러내린다. 침대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이불을 한쪽으로 당겼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아라의 몸 위로 이불을 잘 놓아둔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리모컨을 집어 들고 TV를 켰다.
".....현재까지의 여론조사 추이로는 대선을 불과 한 달 남은 이 시점 여당의 후보..."
지겨운 뉴스다. 조금 있으면 대통령 선거라고 뉴스만 틀면 온종일 저 이야기다. 지지율이 어떻고 검증이 어떻다느니.... 채널을 돌린다. EBS를 틀자 어린이용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아라가 늘 아침마다 보는 그 프로그램이다. 거기에 채널을 맞춰둔 채 리모컨을 내려놓는다. 침대에서 몸을 빼내어 욕실로 갔다. 어제 받아둔 일회용 칫솔을 꺼내어 양치질을 시작했다. 거울을 본다.
거기에는 서른세 살의 최한석이 비춰지고 있었다. 조금 전 꿈에서 보았던 스물다섯 살의 최한석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그녀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없듯이...
'선영아....'
아직도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남아있는 듯하다. 방금 꾼 꿈이 너무도 생생하여 도리어 가슴이 아팠다. 서둘러 입을 헹구고 세수까지 마쳤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방으로 돌아왔더니 아라가 일어나 있었다. 일어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침대에 우뚝 서서 TV에 나오는 체조를 따라 하고 있었다.
"다 같이 손을 뻗어! 하나! 둘!"
화면의 젊은 여자가 하는 구령을 따라 외치던 아라는 날 돌아보며 말했다.
"아빠도 같이 해. 얼른!"
누구 말씀이라고 감히 거역할까. 난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목에 두른 후 침대 옆 빈 공간에 섰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화면의 체조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아라는 내게 팔다리를 좀 더 힘차게 흔들라는 잔소리를 하며 외쳤다.
"우리는, 달려간다! 달려간다!"
.....동작은 열심히 따라 하기는 하지만 구령까지는 차마 못 따라 하겠더라. 참, 쉽지 않다. 그렇게 한바탕 아침 운동을 마치고 나서야 아라를 씻길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히고 모텔 방을 나선다.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는 아라가 앞장섰다. 녀석은 씩씩하게 모텔 복도를 따라 뛰어가며 외쳤다.
"엄마 보러 가자! 아빠 빨리!"
"넘어질라. 살살 뛰어."
기껏 잔소리해보지만, 말빨 좋은 저 녀석이 결코 한마디도 지는 법이 없다.
"난 잘 안 넘어져. 봐봐! 이렇게 뒤로도 뛸 수 있는 걸?"
아라는 앞으로 걷는 것뿐만 아니라, 뒤로도, 옆으로도 걸으며 폴짝폴짝 앞서 나갔다. 더 이상 잔소리 해보았자 원하는 대답을 듣기는 어렵기 때문에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도로 쪽으로 가지 말고 인도 가운데로 걸으라고 했다. 아라도 그건 수용해서 좀 더 안쪽에서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지방도였지만, 곧게 뻗은 데다가 차량 통행이 적어 가끔 지나가는 차들이 제법 달리고 있었다. 아침에 모텔을 나서며 택시를 잡으려 했는데, 택시가 그리 많이 다니질 않았다. 결국 그렇게까지 먼 것도 아니어서 운동 삼아 걷기로 했다.
"아빠, 저기 맞지? 저 가게."
"어. 그래."
지방도로에서 묘지공원 쪽으로 접어 들어가는 길목에는 작은 슈퍼가 하나 있었다. 거기에 들러 꽃 한 다발과 소주 한 병을 샀다. 상에 올리기 편하게 잘 담아있는 제수 과자가 한 박스 있기에 같이 샀다. 아라는 그걸 보고 무척 좋아했다.
"그거 과자 맞지? 나 먹어도 돼?"
"아니. 아직은 안 되고... 이따 엄마가 먹고 나서."
그러자 아라가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엄마도 먹는다고? 엄마가 먹을 수 있어?"
"제사상에 차려놓는 건, 일단 그분들이 먹고 가는 거라고 할머니가 그랬잖아. 생각 안 나?"
"설날 때랑 추석 때? 응. 기억나."
아라는 금방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부터는 차도와 인도가 구별되지 않는 시골길이라 녀석의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가게를 나와 십여 분 정도 더 걸으니 공원관리소가 나왔다. 관리소는 비어있었다. 하긴 평일 아침부터 묘지를 찾는 사람이 그리 흔한 편은 아닐 것이다. 휴대폰을 꺼내어 관리소 입구에 붙어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관리할아버지는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곧 온다는 그의 말에 먼저 올라가보기로 했다.
"아라야. 우리 올라가자."
"응."
다시 아라의 손을 잡고 언덕을 따라 올라간다. 몇 개의 구릉과 다른 이들의 묘지를 몇 개 지나고 나니 선영의 묘지가 보였다. 지난번 추석 때 와서 벌초를 했던 터라 풀은 깔끔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묘지 옆에 나란히 놓인 선영의 묘지는 이제 만든 지 겨우 일 년이 넘었는데도 벌써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배경과 어울리게 놓여있었다.
"이거 여기다 놓으면 돼?"
"응."
아라가 꽃다발을 항아리에 꽂았다. 그러는 동안 난 소주와 과자를 화강암으로 만든 상 위에 두었다. 그걸 빤히 바라보던 아라가 묻는다.
"아빠, 잔은?"
"잔은... 안 샀는데."
"에휴. 술 샀으면 잔도 가져왔어야지. 정신 좀 차려."
일곱 살짜리 딸내미에게 정신 차리라는 소리를 너무 자주 듣고 사는 게 아닐까 반성해본다. 오늘만 들은 소리가 아닌지라 이젠 화를 낼 기력도 없고 부끄러워할 체면도 없다. 겨울에 접어들면서 푸르름을 잃어가는 풀밭 위에 앉아 선영을 마주본다. 아라를 불러 절을 하도록 시켰다. 예전에 배운 대로 두 번 절하고 한 번 반절하는 아라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녀석의 옆얼굴은 놀랍도록 선영을 닮아있었다. 아라를 옆에서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련해졌다. 제 엄마의 묘지를 바라보던 아라가 날 돌아보며 물었다.
"아빠는 절 안 해?"
"너만 해도 돼. 아빠는 그냥 엄마랑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고 있어."
"이야기? 아빠는 엄마 목소리가 들려?"
"응. 마음으로 들으면 들려."
나름대로 재치 있게 대답했다고 생각했지만,
"피이. 소리는 귀로 듣는 거야. 마음은 실제로 있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고."
....라고 답하는 딸내미. 너무도 과학적으로 정확한 말에 애써 잡은 폼도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 녀석은 대체 어디서 이런 말을 주워듣는 걸까. 가장 첫 번째로 의심되는 사람은 우리 엄마다.
"아무래도 넌 할머니랑 너무 오래 같이 있었나 보다. 말투가 딱 니 할머니랑 똑같아."
"할머니는 나보고 엄마 말투라던데?"
"...그래, 니 엄마가 할머니랑 죽이 잘 맞기도 했지. 그러니 두 사람의 말투가 비슷하다는 게 맞을 거다."
정말 빈 말이 아니라 선영이는 우리 엄마와 죽이 잘 맞았다. 덜컥 들어앉은 며느리가 불편할 법도 했는데 우리 엄마는 정말 딸 대하듯이 그녀를 대했고, 그녀 역시 친엄마 모시듯 그렇게 지냈다. 딸처럼 대한다는 것은 그저 잘해준다는 것 이상의 의미다. 잘 지낼 때도 있었지만, 때론 그들끼리 의견 충돌로 싸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전혀 모르는 멍청한 남편이자 아들이 어버버버하고 있는 동안 둘이서 그걸 알아서 풀어내곤 했다.
밤에 되면 아들이자 남편인 나를 사이에 두고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대작하던 일이 엊그제 같다. 저녁에 반주 삼아 시작한 술자리가 애들 다 재우고 나까지 잠 들어도 이어졌다고 한다. 새벽에 가끔 일어나면 마루에 걸터앉아 달빛을 배경으로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주당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그 모습조차 아련하다. 떠올리려 애쓸수록 부질없고 한스럽다.
"술병 좀 줘봐."
"아빠 마시게?"
"아니. 엄마 주게. 좋아했잖아."
아라가 건네주는 술병을 따서 묘지에 부었다. 다 붓기 전에 나도 조금 마셨다. 장인어른과 장모님 묘지를 향해서 아라와 함께 절했다. 상에 놓여있던 제수 과자는 아라에게 주었다. 아라는 신이 나서 오도독오도독 소리를 내며 과자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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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선영은 죽었습니다. 더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석의 마음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