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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86화 (28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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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선영이와 결혼할 때 그녀는 별다른 혼수품을 준비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으니 그에 맞추어 식을 급하게 올린 탓도 있지만, 어차피 엄마가 사는 집에 들어와 얹혀 살기 시작하는 거라 세간살이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그녀는 자신이 여태 모아두었던 돈을 써서 엄마집 근처의 꽤 많은 논과 밭을 매입했다. 하루아침에 소작농에서 지주가 되어버린 엄마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명의로 된 땅문서를 선영이와 내가 엄마 앞에 내놓자 엄마가 한 소리는 대뜸 이랬다.

"이걸 다 직접 갈아불라면 허리 뽀사지겄네."

그 모습이 우스워 내가 웃자 엄마는 되레 역정을 냈었다.

"웃어, 이눔아? 니가 농사일이 을매나 힘든지 안 해봐가 모르지?"

엄마의 역정에 내가 곧바로 대응을 못 하고 있으니 선영이 거들었다.

"사람을 쓰시면 돼요, 어머님."

엄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선영을 살짝 흘겨보며 말했다.

"사람? 이 시골 바닥꺼정 들어와서 소작 부칠 사람이 그리 많당가?"

"일단은 이 사람이 잘할 거예요. 그런 다음 차차 제가 사람을 구해보도록 할게요."

선영이 가리킨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군대를 갓 제대하고 곧 애아빠가 될 예정이었던 난 그때까지만 해도 백수였다. 수중에 있는 거라고는 대학졸업장과 전역증뿐. 말 그대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졸지에 농사꾼(?)이 되어버린 게 못마땅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시골에서 내가 일할 만한 직장이 딱히 있지도 않았다. 그런 시골까지 내려가 살겠다고 한 건 선영의 고집이었고 난 그 고집을 꺾지 못했었다. 엄마는 죽는 소리를 해댔다.

"아들놈, 기껏 대학공부 4년 다 시켜놓았더니 농꾼으로밖에 못 써먹을 거면... 에휴."

"농사도 좋은 일이에요. 값진 일이구요."

"하기사 옛부터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했었지..."

"그럼요."

처음에는 고개를 흔들다가도 이제는 점차 고개를 끄덕이는 엄마와 맞장구를 치는 선영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정작 농사를 직접 짓게 될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두 여자의 의견 교환 속에서 난 이미 농사꾼으로 확정된 지 오래였다. 그렇게 나는 농사꾼이 되어서, 선영의 남편으로, 또 아들로, 아빠로 그렇게 7년여를 살았다.

그러나 그녀가 황망하게 떠나간 이후, 난 쟁기를 잡을 수 없었다. 어디 쟁기뿐이겠냐만은... 땅만 보고 있으면 그녀 생각이 났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내 등짝을 후려치던 엄마는 어느 날 내게 부산으로 가라고 했다.

"부산?"

난데없는 낯선 지명에 놀랐다. 엄마는 한숨을 푹푹 쉬며 말했다.

"그래. 엄마가 아는 사람이 부산에서 연구소를 하는데 거기서 사람을 구한다고 하드라. 니 대학에서 전자인가 뭐시기인가 배웠잖어. 그거면 된다하드라."

난데없는 취업제안에 놀랍기는 했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엄마가 부산에 아는 사람이 있었어?"

"왜 이눔아. 네 어미는 부산에 아는 사람 하나 있으면 안 되는겨? 남원에도 아는 사람 있고 서울에도 아는 사람 있어."

"아니, 뭐.... 그걸 딱히 지적하는 게 아니라 좀 의외라서. 갑자기 부산이라니..."

"여기서 농사일 해봐야 나오면 얼마나 나오겠니. 원래 네 어미 혼자서 소작 붙여먹고 있던 건데... 선영이가 해온 땅은 이제 다시 팔란다."

"땅....말이야? 그걸 판다고?"

그녀가 산 땅을 보고 있으면 괴로운 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막상 팔려고 하니 많이 아쉬웠다.

"그걸 다시 팔게? 그냥 소작 붙여서 냅두면 안 돼?"

"이눔아. 소작도 결국은 사람 관리해야 되고 힘들어. 그리고... 그걸 보고 있으면 자꾸 아라 에미 생각나서 나도 힘들다."

엄마의 짠한 말투를 듣고 있자니 나도 마음이 울적해졌다. 얼마 후, 엄마는 그 땅을 판 돈으로 부산 사상구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구해놓았다고 내게 말했다. 연구소에 이력서도 이미 보내놓았다고 했다. 엄마답지 않은 엄청난 행동력이다. 누군가 대신 해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밥 해주는 아줌마 하나 구해다가 아침저녁으로 밥 해먹고 댕겨. 어차피 좀 있으면 아라도 학교 들어가니 점심은 안 챙겨도 되긋제."

"밥해주는 아줌마라니? 엄마는 같이 안 가?"

"야야, 됐다. 내가 이 나이 먹고 넘의 도시에 가서 고생할 일 있어? 아님 나보고 너네 집에 부엌데기로 앉아있으란 말여? 그냥 살던 데서 사는 게 젤루 편해."

"그래도 아라가 할머니 보고 싶어 할 텐데..."

"내가 가끔 심심하면 일 삼아 갈 테니 너무 그지꼴로 하고 살지 말어."

그렇게 떠밀리듯 난 내당리를 나와야만 했다. 직장과 집이 정해졌다고 하는데 안 갈 수가 없었다. 멀리 가기 전 선영이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아라와 함께 벽제로 갔다. 화순에서 벽제까지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하기에 꼬박 하루가 걸렸다. 벽제 시내에서 1박을 하고 나서야 그녀의 묘지에 다녀올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또 하루를 꼬박 써서 부산까지 내려갔다. 메모지에 적힌 주소대로 새 집까지 도착하고 나니 깜깜한 한밤중이었다. 짐이 제대로 도착했나 확인할 여유도 없이 아라와 난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겨우 짐정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포장 이사를 시킨 터라 크게 정리할 게 없기는 했지만, 당장 먹을 쌀이랑 반찬이 없었다. 아라와 난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로 갔다. 카트 하나에 햇반과 참치통조림, 그리고 3분 요리 등이 가득 담긴다. 아라가 똑똑하고 말도 야무지게 하지만 요리는 아직까지 무리다. 가스불 사용하는 것을 아직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

"밥 해주는 아줌마 빨리 구해야겠다. 다음 주부터는 아빠도 회사 가야 되거든."

"회사는 어디야? 여기서 멀어?"

"아니, 저기 바로 앞이라는데... 아직 안 가봐서 모르겠어."

"다음 주부터 출근이라면서? 근데도 아직 안 가봤단 말야?"

"그.. 그러게 말이다. 연락이 없네."

어찌 된 일인지 그쪽 회사에서는 전혀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회사다. 내가 들어갈 회사를 나쁘게 말하는 게 좀 이상하다만... 어떻게 사람을 뽑아 쓴다고 하면서 이력서 하나만 달랑 받고 합격을 통보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연락도 오지 않았다. 인터넷을 찾아봐도  "휴먼오토엔지니어링 연구소"라는 곳에 대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이쯤 되면 유령회사가 아닐까 싶어 의심되기도 하지만 엄마가 가보라고 한곳이니 마다할 수도 없다.

이런 식이니... 대뜸 이쪽에서 불쑥 찾아가기도 민망했다. 나이는 서른이 넘었지만, 직장 생활이라고는 한 번도 안 해본 터라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게 사실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나는 산뜻한 결론을 내렸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아빠는 그렇게 적당적당히 하면 혼나. 좀 똑바로 해야 한다고."

산뜻한 결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나쁜 딸내미 같으니. 카트에다가 감자 칩을 살짝 집어넣고 있는 꼬맹이한테 이런 소리 듣는 게 못내 서글펐지만 반박할 수 없다는 게 더 슬펐다. 그렇게 식품 쇼핑을 마치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실내놀이터와 서점, 카페 등이 있었다. 시골에만 있다가 이런 도시 쪽으로 나오니 확실히 이런 시설이 잘 되어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아라는 놀이터 쪽을 보며 감탄하고 있다가 서점 쪽을 쳐다보고 있는 내 생각을 눈치 챈 모양이다.

"아빠, 책 사게?"

"응. 요새 안 간지 좀 되었잖아."

"그럼 갖다와. 난 저기 놀이터에서 놀고 있을 테니까.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돼. 알았지?"

여전히 뭔가 거꾸로 된 거 같은 부녀사이지만 이젠 일일이 태클을 걸 기력도 없다. 삼십 분 후에 이곳에서 보기로 하고 난 서점으로, 아라는 놀이터로 향했다. 서점에 들어가 근래의 산업동향을 다룬 전문잡지 몇 권을 들춰보았다. 확실히 몇 년간 관심을 멀리하고 살았던 티가 팍팍 났다. 모르는 말과 모르는 이야기 투성이다. 서서 한참을 읽어보았다. 고심 끝에 세 권 정도 골라내 계산했다. 그런 다음 아라를 데리러 갔다. 약속한 장소에 서서 사온 책을 보면서 기다리는데 아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응. 그래...? 어?"

그러나 아라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라의 뒤에 한 꼬마가 숨어있었다. 제 딴에는 숨는다고 숨었지만, 둘의 키가 비슷했기에 그 모습이 다 가려질 정도는 아니었다. 긴 머리 끝에 알록달록한 방울이 달려있었고 동화책에서 공주님이 입고 나올법한 프릴이 잔뜩 달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동그랗고 하얀 얼굴은 무척 귀여웠지만,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얘. 넌 누구니?"

물어보았지만, 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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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1:

새로 나온 꼬맹이는 앞서 나온 누군가의 자식입니다.

사족2:

한석의 성이 어머니 성과 같은 이유에 대해서는 차후 설명이 나옵니다.

또한, 다른 루트에서의 주요 설정이기도 합니다. (작가가 스포일러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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