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288화 (288/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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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냐. 그렇지 않아. 원망보다는... 그냥 엄마가 불쌍했어.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원망보다는 그저 궁금할 뿐이었어. 어떤 사람인가.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지금 살아는 있는 걸까, 아니면 어디서 다른 여자를 만나 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평범한 궁금증. 그게 다야."

"그럼 나중에 아버지를 찾을 거야?"

"뭐 하러 그래."

한쪽 팔에 안긴 선영을 끌어다가 목을 살짝 깨물었다. 알몸으로 엉켜 있을 때 난 그녀의 몸 곳곳을 깨물기를 즐겨했다. 선영은 자지러지는 웃음으로 그에 화답했고, 나 역시 그 반응을 즐겼다.

"그래도, 하아... 아버지잖아."

계속 깨물다가는 내가 식인습성에 눈뜰지도 모른다는 위험성 때문에 중간에 핥거나 빠는 걸로 전환하는 게 보통이다. 목을 타고 내려가 그녀의 쇄골과 가슴 계속을 따라 혀를 이동시키고 있자니 그녀가 달뜬 숨소리를 내면서 내게 물었다. 하얀 살결의 그녀 피부를 침으로 얼룩지게 만들며, 나는 되레 반문했다.

"확실히 선영이는 일렉트라 콤플렉스가 있는 거 아닐까?"

"일렉트... 뭐?"

이게 선영의 매력이라면 매력. 아무래도 정규 교과과정을 거치지 못한 그녀였던지라 조금만 어려운 말이 나오면 잘 알아듣지 못했다. 살짝 동그랗게 뜬 눈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워 그 위에 키스를 해주며 설명했다.

"아주 옛날, 먼 옛날에 일렉트라란 이름을 가진 여왕의 일에서 따온 이름인데, 말하자면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또한 아버지를 사랑하는 딸의 마음."

"증오...증오는 맞아도 사랑은 좀...."

그녀의 아버지가 들어있는 관이 땅으로 들어가기 시작할 때 세상 떠나갈 듯 통곡하던 선영의 모습을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는 나다. 그 점을 지적하며 이야기하자 얼굴을 살짝 붉혔다.

"몰라. 자꾸 이상한 말 하지 마."

"하핫. 알았어, 알았어."

이번에는 그녀가 내게 공격하기 시작했고 난 그 공격에 기꺼이 맞서서 창을 곧게 세우기 시작했다......

".......아빠! 내 말 듣고 있어?"

"어? 어?"

선영이 생각에 또 넋 놓고 있었는데, 옆모습이 선영을 꼭 닮은 여자아이가 내 맞은편에 앉아 호통을 치고 있다. 다시 한 번 깨닫지만 지금은 2007년이고, 선영은 더 이상 없다. 있다면 그건 내 머릿속,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따름이다.

"내 학용품도 샀냐고 물어보잖아, 지금."

"아? 아... 니 학용품 말야..."

마트에서 가져온 봉투를 뒤적거려 몇 가지 물품을 찾아냈다. 초등학교 1학년용 노트와 연필 한 다스. 지우개와 12색깔 색연필이다. 아라는 그중에서 색연필을 집어 들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집에서 가져온 짐 중에 색연필 쓰던 거 있었거든. 이건 안 사도 되겠어. 가서 환불하자."

"에? 환불? 귀찮은데..."

그렇지만 난 이내 카페에서 나와 색연필과 영수증을 들고 환불하러 가야만 했다. 아직 직장을 다니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월급 나오려면 멀었으니 그때까지 돈을 아껴야 한다는 불호령이 떨어진 탓이다. 선영이랑 살 때도 이 정도로 쥐어 살지 않았는데 어쩐지 서글펐다. 그런 식으로 아라에게 내내 잔소리를 들어가며 주말 동안 집안 정리와 청소에 몰두했다.

드디어 월요일이 되었다.

"인사 잘하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아빠. 알았지?"

"그래... 너나 잘하려무나. 어디 멀리 가지 말고 집 근처에서 놀아."

아라와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잔소리 섞인 당부를 하고 서로의 하루를 시작했다. 내년이면 초등학교 입학을 해야 하는 아라인지라 유치원을 알아볼까도 싶었지만, 지금처럼 애매한 시기에 유치원 입학하기도 어려웠다. 어차피 시골에서는 또래 친구가 별로 없어 혼자서 책도 곧잘 읽고 시골길 산책도 잘 하던 녀석이라 걱정은 크게 안 하지만 이곳이 도시라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연구소까지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차창 밖으로 휴대폰 매장이 보이기에 아라에게도 하나 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초등학생 1학년 정도라면 핸드폰을 들고 다녀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집에서 연구소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버스로 여섯 정거장. 오가는 길이 파악되면 자전거라도 한 대 사서 타고 다녀도 충분할 거리였다. 다만 오늘처럼 정장을 입고 다녀야 할 텐데 거기에 자전거가 어울릴 지는 의문이기도 하다. 버스정거장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니 도심에 비해 한적한 블록이 나타났다. 주거지역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아주 공단지역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그런 외곽이다. 한쪽으로는 커다란 하천이 흐르고 있고 반대편으로는 적당한 높이의 산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천의 상류 쪽에는 뭔가 수도 관련 시설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중고등학교 건물 절반 정도의 시설이 따로 있었다. 약도를 따라 걸어 올라가니 거기가 바로 연구소였다.

입구에 경비실은 있지만, 비어있었다. 그냥 들어가도 싶어 조금 망설였지만, 이력서가 받아들여지고 출근이 허락된 이상 나도 이 회사의 직원이라면 직원이다. 엄마가 준 메모에 의하면 우선 대표를 만나라고 했다.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운동장과 주차장은 텅 비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건물로 가서 정문을 들어서도 인적이 없었다. 시계를 보았다. 이제 여덟 시... 어지간한 회사라면 그래도 누구 하나쯤은 출근했어야 정상인 시간 아닌가? 5층까지 있는 건물을 끝까지 올라갔다 내려왔지만, 그래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사무실은 잠겨있었고 하다못해 대표라는 사람의 사무실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정말 이상한 유령회사에 덜컥 들어와 버린 건 아닐까. 5층에는 직원용 휴게실이 있었다. 거기에 앉아 음료수 하나를 빼먹으면서 - 공짜였다. -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대체 누가 엄마에게 이런 정체불명의 연구소를 알려준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전화기를 꺼내어 엄마에게 전화를 걸까 싶다가도 괜한 욕만 먹을 것 같아서 꾹 참았다. 그렇게 걸터앉아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데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창을 통해 내다보니 웬 택배차량이 건물 앞에 도달해 있었다. 서둘러 1층까지 내려가 보았다. 다시 들리는 차 소리. 현관 로비로 가 보니 박스가 몇 개 쌓여있었고 이미 택배 차는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주차장 쪽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그걸 총무팀으로 올려주세요!"

"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직원 주차장에 경차가 한 대 세워져 있었고 거기서 내린 여자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제 한 스물네댓 살 쯤 되었을까. 어려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강단 있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총무팀 뒤에 창고 있거든요. 거기로 옮기시면 돼요."

"아, 네."

엉겁결에 박스를 챙겨 들고 그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총무팀은 2층에 있었다. 무거운 박스를 들고 낑낑거리며 올라가서 여자가 지시한 곳에 박스를 내려놓았다. 박스는 하나가 아니었기에 몇 번 더 왔다 갔다 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사무실의 창문을 열고 난방기를 틀었다.

"아, 수고하셨어요. 전에 택배 아저씨는 그냥 놓고만 가서 애먹었는데 오늘은 사무실까지 올려주시네요."

"아니, 저 그게..."

아무래도 그녀는 날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를 닦아내며 말했다.

"전 택배회사 사람이 아니고요, 오늘부터 여기 출근하기로 한 사람인데요."

"네? 어머나.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여자는 호들갑을 떨며 내게 차를 가져다주었다. 정장을 입고 택배일을 뛰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그렇게 소파에 앉아 녹차를 마시고 있노라니 쟁반을 품에 안은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오늘부터 출근이시라고요? 총무팀장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던데요."

"그래요? 전 오늘부터 여기로 가고... 아, 맞다. 대표님을 먼저 만나라고 하던데요."

"대표님이요?"

여자의 눈이 아주 동그랗게 되었다. 대표를 만나라는 말이 왜 그렇게 놀라운 걸까.

"혹시 대표님이 지금 안 계신가요?"

"아니, 저... 그거야, 계시기는 분명 계실 텐데..."

여자는 내게서 조금 뒷걸음치더니 책상 위에 있는 인터폰을 조작했다. 삐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기계 너머에서 굉장히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스피커폰이라 내게도 잘 들렸는데 방금 들린 목소리는 분명 여자 목소리였다.

"네에~ 가희입니다. 무슨 일이죠?"

뜻밖이었다. 이런 규모의 연구소 대표라고 하면 뭔가 되게 나이 많은 노인네는 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냥 젊은 사람 목소리만 들려와도 이상했을 텐데 지금 들려오는 저 목소리나 말투는 흡사 어린아이 같았다. 여자는 인터폰에 대고 말했다.

"저기, 대표님. 오늘도 계셨네요?"

"에헤헤. 또 밤 샜어요. 포자 분리가 생각처럼 잘 안 되어서 말이죠... 아, 무슨 일이죠, 희경 씨?"

두 여자의 이름을 알았다. 성은 모르겠지만, 일단 대표의 이름은 가희였고 날 부려 먹은 여자의 이름은 희경이었다. 희경은 내 쪽을 힐끔 보곤 말했다.

"여기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대표님을 만나러 오셨다고.... 아참, 내 정신 좀 봐. 성함이...?"

"최한석입니다."

"최한석 씨라는데요."

인터폰 너머에서 가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한석?"

그리고 이내 손뼉 치는 소리가 나더니,

"아! 맞다! 그게 오늘이구나! 그래요. 얼른 이쪽으로 오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희경은 인터폰의 버튼을 눌러 통화를 끊었다. 그녀는 날 보곤 따라오라며 사무실을 나섰다. 날 쳐다보는 표정이 굉장히 뭐랄까... 굉장히 신경 쓰이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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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경 (27세, 여성) 휴먼오토엔지니어링 총무팀 소속. 경리 및 회계 담당.

가희가 누구인지는 알 사람은 알 테니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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