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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90화 (29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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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솔직히 웃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렇지만 잠시 후, 그녀는 약간 미묘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뭔가 불안했다.

"흐음... 그래도 예전에 배운 걸 까먹었다는 건 좀 그런데... 그렇다면 말이죠. 제가 요즘 연구하는 것 중에서 기억을 잘 떠올리게 하는 약물이 있는데... 어디 한번 맞아볼래요?"

불안감의 정체는 이거였나! 두 손을 내저으며 극구 사양했다. 난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몸이다.

"아뇨, 사양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아직 부작용율도 그리 크지 않거든요. 대략 20% 정도랄까..."

"아니요. 대표님 말씀을 들으니 그때 했던 프로젝트들도 막 생각나고 그래요, 지금."

"그래요? 잘 되었네요. 이 주사를 맞으면 아마도 더 확실해질 거예요."

내게 점점 몸을 들이미는 가희와 한사코 거부하는 나. 바로 그때, 삐익- 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에 놓인 인터폰이 울렸다. 위기에 처한 나를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희경의 목소리였다.

"소장님과 총무팀장님이 지금  출근하셨습니다. 바로 대표님 사무실로 내려가신답니다."

내게 몸을 들이대다 못해 이제 테이블에 막 올라탈 기세였던 가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쳇-"이라고 중얼거리곤 인터폰에 다가가 대답했다.

"그러도록 하세요. 기다리겠습니다."

그러곤 주머니에 들린 주사기를 뒷주머니에 넣었다. 아니, 대체 저런 언제 꺼냈는지도 모르겠거니와 주머니에서 주사기가 나오다니. 그렇다면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단 소리 아닌가. 아까 아침에 희경이 다짜고짜 부려 먹어서 그다지 이미지가 좋지 않았는데, 이 사무실에 들어오기 전에 분명한 경고도 해주었고 조금 전 인터폰으로 날 구제해준 걸로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대번에 좋아졌다. 다음에 술이라도 한 잔 사야하지 싶었다.

"들으셨다시피 소장님과 총무팀장이 지금 내려온다고 하니 업무 배치를 받을 수 있겠군요."

"아, 예..."

천만다행입니다...라고 말하려던 걸 애써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대신 아까부터 궁금하던 걸 물어보았다.

"그런데 대표님, 한 가지만 질문을 해도..."

"네, 얼마든지요."

"대개 이런 연구소는 대학부설이거나 기업부설이 대부분인데 여기는 들어오는 입구에 그런 표시가 전혀 없어서요. 따로 수익모델이 있는 겁니까?"

"아, 그거요? 저희야 뭐 이사님들이 자비로 세운 거라... 일종의 개인연구소라고 할 수 있죠."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어째 오늘은 아침부터 놀라는 일만 계속이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 앞으로도 계속 놀라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 이정도 규모와 설비를 갖췄는데 개인연구소라니..."

"원래는 저 혼자 연구하던 곳이었는데... 우리 이사님들이 돈이 좀 많아요. 그래서 직원을 더 채용하기 위해 시설을 늘리고 연구과제도 늘렸죠."

"직원을 더 채용하기 위해 시설을 늘렸다고요?"

"뭐... 결과적으로는요?"

아까 내 채용을 결정한 사람들도 이사들이라고 했다. 가희에게 물어보아도 이사가 누구인지는 결코 알려주지 않았다. 날 채용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다니. 꽤 답답한 심정이다. 그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가희는 고개를 들고 들어오라고 말했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두 명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지혜야..."

"한석?"

근 십 년 만에 만난 그녀. 그녀가 거기에 이었다.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지으며 우뚝 서 있었다. 얼굴은 살짝 나이 들었지만... 가슴은 여전했다.

아니, 이럴 때 가슴을 보고 있으면 안 되지....  싶기는 하지만 워낙 지혜는 다른 모든 부위보다도 그게 한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혼자 해본다.

"한석? 정말 한석이야?"

정말 뜻밖이었다. 아니, 뜻밖이라는 말로는 제대로 표현조차 못할 생경함이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한때 좋아했던, 그리고 나와 밤을 함께 보낸 첫 번째 여자. 그렇지만 내 눈앞에서 떠나보낸 바로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면사포를 쓰고 행복한 표정으로 있던, 신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단정한 회색빛 슈트에 감싸인 커리어 우먼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코 위에 얹어진 검은색 안경테가 무척이나 가늘었다. 전보다 살이 좀 빠진 걸까. 얼굴이 약간 해쓱하다. 그러나 가슴만큼은... 아아, 자꾸 가슴으로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무던하게 애를 써야만 했다. 지금이야 흰색 블라우스와 그 위에 회색 자켓으로 가려져 있지만, 한때 저 가슴에 내 얼굴을 파묻고 질식사할 뻔한 경험이 있었지...

그녀와의 지난 만남을 떠올려본다. 첫 번째 만남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이루어졌다. 소개팅을 하러 나갔다가 상대를 착각해서 그녀를 만났다. 마침 가슴 아픈 이별을 겪은 터였던 그녀는 자기 자신의 하룻밤 위로를 위해 내 몸을 탐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가 새 출발을 위해 이사한 집이 하필 내 바로 옆집이었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두 번 만났다. 두 번 모두 약속되지 않은 만남이었고 지금의 만남, 이 세 번째 만남도 그러했다. 그녀와 나는 대체 어떤 인연이기에...

"여긴... 네가 어떻게?"

지혜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옛 생각에 잠겨있던 난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나야말로 묻고 싶어. 너 원래 부산이 집이었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지혜와 나, 서로 놀라고 있다가 옆에서 더 놀라고 있는 사람들의 기색을 알아차렸다. 가희는 그저 멀뚱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고 지혜 옆에 서 있던 초로의 남자는 꽤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황급히 사적인 대화를 종료했다. 가희가 나서서 남자와 지혜를 내게 소개했다. 남자는 이 연구소의 소장인 나윤호였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오늘 새로 온다는 분이 이 분이셨군요. 그런데 총무팀장과도 원래 아는 사이셨어요, 두 분이?"

그녀와 내 사이를 뭐라고 해야 하나. 사귄 적은 없지만, 몸은 섞었던... 그런 사이인데, 마땅히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우물거리고 말았다. 그러나 지혜는 달랐다. 그녀는 살짝 미소까지 지어가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서울에 살 때, 잠시 알던 분이에요. 옆집에 살았거든요. 제 결혼식에도 와주셨던 분이죠. 그 후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가 여기서 이렇게 신기하게도 보네요. 그래서 좀 놀랐어요."

그녀의 말에서 "결혼식"에 강세가 놓여있는 것 같았다.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가 어떤 벽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알았다. 그렇다. 그녀는 유부녀다. 이미 결혼해서 상대가 있는 사람이다. 결혼 전에 알던 남자와의 관계 때문에 괜히 곤란한 일을 겪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게다가 여기서 팀장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일하고 있다. 한순간 놀랬던 마음을 애써 추스르고, 나 역시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아, 뭐.... 예. 제가 대학 때 서울에서 지낼 때 옆집에 살던 사람이 지혜.... 아니, 여기 팀장님이었어요."

"아아. 그러시구나... 세상 참 좁네요."

"그렇죠?"

가희와 지혜가 나란히 앉고, 나 소장과 내가 나란히 앉았다. 간단한 자기소개가 오가고 가희가 새로 끓인 차도 한 순배 돌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난 지혜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김 이사님에게 새로 인원을 뽑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떤 분이라는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오후에 오실 줄 알았고, 놀랍게도 제가 아는 분이라서 조금 갑작스러웠습니다. 안 그래도 평소 인력이 충분한 편이 아니었으니 각 팀과 의논해서 최한석 씨의 배치를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다르다. 확실히 전과는 다르다. 지금 그녀의 말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조금 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향해 "한석?"이라고 부르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있었다. 그녀의 말투에서 어떤 의지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되긴 했지만, 그녀는 유부녀고, 게다가 회사에서 내 윗사람이기도 하다. 분명 어떤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게 맞다. 그녀의 생각에 마음속 깊이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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