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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92화 (29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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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정신없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내 몫으로 나온 책상 정리부터 시작하나 싶더니 곧 총무팀 창고 정리와 비품 관리가 내 몫으로 떨어졌다. 연구소에 온 첫날 날랐던 박스는 연구소에서 소요되는 각종 사무용품과 전산소모품들, 실험재료와 기자재 등을 담고 있었다. 이런 박스가 하루에도 네댓 번 배달되어 온다. 모든 물품의 입출납 명부를 작성하고 태그를 붙여 일일이 분류, 저장, 필요한 곳에 가져다주는 게 일단 내 주요 역할이다.

그러는 동시에 연구소 시설 전체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해서 연구원의 이름과 얼굴을 외우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담당 사수인 희경으로부터 업무인수인계를 받으면서 업무 내용을 모두 적어놓았다. 이 나이 먹어 처음 시작하는 사회생활, 허투루 볼 게 하나도 없었다. 모든 일이 눈이 팽팽 돌아가는 일의 연속이었다. 총무팀에 일이 많다는 지혜의 이야기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여태껏 나 없이 여자 둘이서 이걸 어떻게 전부 해내었나 신기할 정도다.

연구소의 출근 시간은 아침 열 시, 그리고 퇴근 시간은 오후 다섯 시였다. 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많은 것에 비해 근무 시간이 너무 짧은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 짧은 업무시간은 연구소의 전통이라고 했다. 물론 한 번 붙잡은 일에서 쉽게 손을 못 떼는 연구원들은 퇴근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고, 지각퇴근생의 선두주자는 단연 대표인 윤가희였다. 그녀는 정말 자기 연구실에 틀어박혀서는 나올 줄을 몰랐다. 사나흘에 한 번꼴로 그녀에게 배달되는 물품을 가지고 내려갈 때마다 주사 한 번 맞아보지 않겠냐는 권유 아닌 권유에 시달리곤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능숙하게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뭘 하며 보냈는지도 몰랐는데 시간이 어느새 3주나 흘러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이 월급날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났다는 걸 겨우 깨달았다.

"그럼... 내일은 안 나와도 되나요?"

금요일 저녁 다섯 시에 연구소를 나서며 희경에게 물었더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차피 우리는 연구수당이 없기 때문에 휴일에 나온다 해도 소용없어요. 그 사람들은 자기 일도 일이지만 나와 있는 만큼 실적급으로 수당을 받거든요."

"그렇군요...그런데 팀장님이 아직 퇴근 안 하셨는데..."

"월요일이 월급날이잖아요. 수당 정산 다 하시고 나면 퇴근하실 거예요. 우린 월요일 아침에 그거 최종검토하고 그에 맞춰서 은행 다녀오면 끝이에요."

주차장에 세워진 희경의 흰색 마티즈에 함께 올라탔다. 출근은 버스로 하고 있지만, 퇴근할 때는 그녀가 태워주곤 했다. 그녀의 퇴근길 중간에 우리 집이 있었다. 주차장 앞쪽에 지혜의 차가 세워 있는 게 보였다. 몇 가지 잔무가 남아 그녀는 아직 퇴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시간 동안 그녀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시간은 정말이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나마 시간이 있을까 싶을 때는 다른 사람의 눈치가 보여 함부로 말을 걸 엄두가 나질 않았다. 희경은 차에 시동을 걸고 기어를 넣으며 물었다.

"어때요, 다른 분들하고 이제 좀 친해졌어요?"

"아... 친해졌다고 해야 할까요. 영제 씨나 대범 씨하고는 다음 주에 술 한잔 하기로 했습니다."

이영제는 APT의 막내였고, 김대범은 바로 위의 연구원이었다. 나보다 나이는 어린 친구들이지만 오며 가며 그나마 대화의 물꼬가 트인 사람들이다. 내가 말한 이름을 들은 희경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영제 오빠랑 대범이 오빠요? 후훗. 잘 되었네요. 저도 끼워주는 거죠?"

희경은 아직 미혼인 그들을 오빠라고 불렀다. 나도 오빠라고 불러주면 좋겠다만... 애아빠가 바라기에는 과도한 소망이다. 게다가 난 그녀를 항상 깍듯하게 불렀다. 이렇게,

"물론입죠, 선배님."

하고 말이다. 선배라고 부르면 희경은 종종 까르르 웃었다. 여태까지 연구소 막내로 지내온 터라 아무도 그녀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몹시 싹싹한 성격으로 연구소의 거의 모든 사람과 친했다. 가히 얼굴마담이라 할 정도로 대내, 대외적으로 활달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사실 나 역시 그녀를 통해 연구소의 젊은 사람들과 꽤 많이 친해질 수 있었기에 꽤 고마워하고 있었다.

"다른 분들하고는... 아직 좀 그렇죠?"

좀 그렇다는 말...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다.

"아, 예에. 그렇죠. 뭐."

"시간이 지나면 안 그러실 거예요. 그리고 꼭 그런 게 아니래도 여기 사람들이 텃세가 좀 있어요. 다들 원년 멤버들이다보니 따로 누군가를 채용하는 건 영제 오빠 이후 처음이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나 소장의 지적은 옳았다. 내가 아무리 둔감한 녀석이라고는 하나 연구소의 몇몇 사람들은 나에 대해 꽤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덜 그렇지만 몇몇 팀장은 아예 대놓고 날 싫어했다. 그들에게 딱히 호의를 얻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건 무척이나 신경 쓰이는 일이다. 피곤하기도 했다. 그저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믿으며 기다릴 뿐이다.

희경과 업무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부산 토박이 아가씨인 희경의 사투리 안 쓰는 척하는 사투리가 섞인 목소리를 들어가며 퇴근길을 달렸다. 잠시 후,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까지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면서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럼 주말 잘 보내세요."

"네, 한석 씨도요. 들어가세요."

희경은 아파트 단지 앞에 날 내려주고 차를 출발시켰다. 단지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데 놀이터 쪽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아라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모래 장난을 하고 있던 아라가 벌떡 일어나 내 쪽을 향해 뛰어 오고 있었다. 두 팔을 벌린 채 달려 내 앞까지 단숨에 도착한 녀석을 두 팔로 번쩍 들었다 내려놓아 주었다. 높이 올라간 지점에서 아라는 까르르 웃었다.

"뭐 하고 있었어? 모래 놀이?"

"응. 지금 수영이랑 놀고 있었어."

"수영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조금 전 아라가 놀고 있던 곳에 쭈뼛거리며 서 있는 수영이가 보였다. 지난번 보았을 때보다도 더 화려하기 짝이 없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처음 수영이를 본 이래로 녀석을 볼 때마다 드레스의 화려함이 업그레이드 되는 것 같다. 저런 드레스를 입고도 용케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모래 놀이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살살 좀 놀지. 여긴 시골이 아냐, 아라야."

"그래도 재미있는 걸 뭐. 애들은 원래 이렇게 노는 거야."

"....그래, 그러겠지. 그런데 선미 씨는 안 보이네?"

"응. 오늘은 없어."

"너희 둘이 놀고 있었던 거야?"

"응."

아라에게 조금만 더 놀고 들어오라고 했다. 먼저 집에 들어온 나는 서둘러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식사 준비라고 해봐야 햇반을 데우고 엄마가 고속도로 수화물로 보내준 반찬통에서 반찬 몇 개를 꺼내놓는 정도다. 혹시나 싶어 계란후라이를 몇 개 부쳤다.

"다녀왔습니다!"

타이밍 좋게도 식사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라의 기운찬 목소리가 들렸다. 거실로 나가 보니 아라 혼자 들어온 게 아니었다. 수영이도 함께였다. 녀석은 여전히 아라 등 뒤에 숨어 내 시선의 직격을 피하고 있었다.

"수영이는 집에 안 가니?"

수영이가 우리 집까지 들어온 경우는 처음이었다. 녀석은 항상 아라와 밖에서 놀고 나서 선미와 함께 돌아가곤 했다. 그렇지만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고.... 아니나 다를까. 대변인이 대신 답하신다.

"오늘은 선미 이모가 서울 가야 돼서, 이따가 수영이 엄마가 직접 데리러 온대. 그때까지 내가 데리고 있기로 했어."

"....니가 데리고 있겠다고...? 알았다. 알았어."

아라는 수영이가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수영이와 처음 만나고 이틀 후인가 사흘째 되던 날인가. 내가 아라에게 핸드폰을 사주자 녀석은 내 핸드폰에서 선미의 전화번호를 찾아내더니 수영이랑 놀고 싶다고 자기 스스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옆 동네에 살고 있던 수영이가 선미를 대동하고 진짜로 아라를 만나러 왔다. 선미는 아무래도 수영이의 밀착보호자인 모양이었다. 하긴 저렇게 인형처럼 귀엽고, 예쁘게 생겼고 귀티가 나면 누가 납치해갈 위험이 있기도 하다만... 아무리 그래도 좀 과보호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두 아이가 함께 뛰어노는 동안은 선미가 두 아이를 봐주는 게 되어, 내가 마음 놓고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똑똑한 녀석이라고는 하나 아무도 없는 집에 아라를 혼자 두고 가는 게 늘 마음에 걸렸던지라 수영이가 놀러 온다고 하면 으레 마음이 놓이곤 했다.

오늘은 그 선미가 없다. 그래서 이 두 녀석이 정말 마음 놓고 뛰어 놀은 모양이다. 만약 선미가 있었다면 적절히 제재를 걸어 이 지경까지 놀 수 있게 두진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두 녀석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두 아이가 입은 옷은 다르지만, 두 사람 다 한결같이 흙투성이였다. 신발을 벗고 거실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날 정도였다. 골치가 아파진 난 살짝 언성을 높였다.

"둘 다 당장 욕실로 들어가!"

참다못해 소리를 빽 질렀더니 아라는 이내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찍소리 없이 욕실로 후다닥 들어갔다. 그런데 수영이가 몹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녀석은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뭐해? 안 들어가고."

"저어...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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