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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아, 미안해요. 선미 씨. 일찍 오려고 했는데 일도 많고 길도 막히고 해서..."
"괜찮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일이 많으셨나 봅니다."
"아아, 좀 있으면 연구소에서 큰 행사가 있어서 그걸 준비하느라고요."
"그런가요? 수고하셨습니다."
선미는 현관에 서서 나와 지혜의 가방을 받아주었다. 코트까지 벗겨주려 하기에 내가 사양했다. 그녀의 서비스는 뭐랄까. 전혀 생각지도 못 한 곳까지 알아서 해주려는 경향이 강해서 어떨 때는 부담스럽기도 했다. 지혜는 겉옷을 벗어 거실 소파에 올려두며 선미에게 물었다.
"애들은 자나 보네요?"
"네. 아홉 시부터 재웠습니다. 붉은 용을 좋아하는 왕자님의 이야기를 읽어주니 듣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수영이는 아홉 시 십 분에, 아라는 아홉 시 십오 분에 잠들었습니다."
선미의 보고는 이렇듯 늘 구체적이다. 시계를 보니 아홉 시 반이었다. 원래 퇴근 시간이 다섯 시였으니... 지혜와 난 참 어지간히도 해댔구나...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옷을 벗고 부엌으로 가려고 하니 뒤에서 선미가 내게 물었다.
"식사는 하셨나요? 아직 안 하셨다면..."
"아뇨. 간단히 먹고 왔어요. 따로 챙기지 않으셔도 돼요."
"그런가요..."
선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가방과 코트를 들고 방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걸음걸이가 독특했다. 걷는 모양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걸을 때 소리가 전혀 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사뿐사뿐 걷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말이다. 보고 있으면 좀 신기했다. 그러자 자켓을 벗던 지혜가 내 곁으로 다가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뭘 그렇게 쳐다봐?"
"어? 어. 선미 씨 좀."
"선미 씨를 왜?"
은근한 목소리로 꼬치꼬치 묻는 지혜를 보곤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녀를 돌아보고 살짝 실눈으로 보며 물었다.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거야?"
그러자 지혜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질투는 무슨..."
"그냥 걸음걸이가 독특해서 쳐다봤을 뿐이야. 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내가 생각하긴 뭘... 내가 뭘 생각하는 지 네가 알아?"
지혜는 가볍게 툴툴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의 방은... 원래 빈방이었는데 워낙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된 지혜가 자기 옷가지와 몇 가지 물건을 가져다 놓은 방을 말한다. 물론 지혜는 그 방에서 잠드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그 방을 보고 있노라니 지난 한 달간 그녀가 확실히 우리 집에 자주 왔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러는 사이 선미가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녀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내게 공손히 물었다.
"목욕 준비할까요? 아니면 간단한 간식이라도 준비할까요?"
지금이야 별로 놀랍지 않지만, 처음에 선미가 이런 식으로 물어볼 때는 참 놀랍고 적응이 안 되었다. 목욕이든 간식이든 뭐든지 다 내가 알아서 하던 것들이었고 내가 아라의 준비를 해주면 해주었지 남이 나를 준비해준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날 준비해주던 사람이 있다면... 그건 선영이었다. 늘 검은색 옷을 위아래로 입고 있는 선미를 볼 때면 안 그래도 선영이 생각나곤 했다. 머릿속에서 정신적으로 고개를 흔든 후 선영의 생각을 빨리 털어냈다.
"안 그래도 오면서 치킨 시켰거든요. 어때요, 선미 씨도 같이 맥주 한잔 하겠어요?"
"그래요. 선미 씨도 한 잔해요. 늘 먼저 들어가 자지 말고."
머리를 풀어 뒤로 한 번 묶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지혜가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오늘도 자고 갈 모양이다. 하긴 오늘은 금요일이니 문제없다. 그 날 이후, 주말은 지혜와 수영이가 자고 가는 걸로 아주 예약이 된 모양이다. 내 입장에서는 새벽에 지혜와 보낼 시간을 생각해보면 전혀 싫지 않다. 새벽 행위에 대해 생각이 미치니 이미 회사에서 그렇게 해댔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다리 사이에 다시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선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다리를 조금 꼬았다.
"많이는 안 할 거고 맥주 한 잔씩만 할 건데. 어때요?'
지혜도 선미에게 맥주를 권했다. 평소 선미는 열 시가 되기도 전에 아이들 방에 들어가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곤 했다. 아침이 될 때까지 방에서 결코 나오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그런 행동들을 보며, 은연중에 나와 지혜가 나누는 행위를 이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대놓고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헐렁한 티셔츠와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은 지혜는 마치 자기 집처럼 자유로이 활보하고 있었다. 싱크대를 정리하고 냉장고로 스윽 다가가 캔맥주와 땅콩을 꺼내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릇과 젓가락 등을 챙겨오는 지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한 잔만... 하겠습니다."
"어? 웬일이에요, 선미 씨?"
식탁을 정리하던 지혜가 선미를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나도 솔직히 좀 의아했다. 예의상 권하기는 했지만, 늘 그렇듯이 그냥 들어갈 줄 알았기 때문이다. 선미는 부엌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가끔은 저도 술을 마신답니다."
"그래요? 전혀 몰랐는데?"
선미는 냉장고 야채 칸을 열더니 과일 몇 개를 꺼냈다. 칼을 가져와 껍질을 까더니 잘 잘라 접시에 담아왔다. 그걸 보던 난 의문이 생겼다.
"우리 집에 과일도 있었어요?"
"낮에 아이들을 데리고 마트에 갔더니 아라가 먹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몇 종류 사다 놓았습니다. 이 밖에도 약간의 채소와 유제품을 좀 채워두었습니다."
이제 선미는 우리 집 냉장고 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난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런... 미안해요. 나중에 제가 돈을 줄게요. 얼마 들었는지 말해주세요."
"괜찮습니다. 활동비는 이미 지급 받고 있으니까요."
"활동비?"
그때 마침 배달원이 치킨을 가지고 도착했기에 선미에게 물을 타이밍을 놓쳤다. 이로써 안주가 풍성하게 갖춰졌고 다 같이 둘러앉았다. 맥주 캔을 들어 올린 우리는 가볍게 건배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꿀꺽- 꿀꺽- 꿀꺽-
"캬아-"
차가운 맥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짜릿한 느낌. 이보다 시원한 게 세상에 있을까 싶었다. 퇴근 후 지금까지 격한 중노동을 해온 터라 목 넘김이 더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단숨에 반 캔 이상을 비워낸 듯하다.
"이걸 좀 드시죠."
"아, 고마워요."
어느새 선미는 치킨 살점을 발라내어 놓은 후다. 그녀는 살코기를 찍은 포크를 나와 지혜에게 각각 내밀었다. 그걸 받아든 지혜는 살짝 웃었다.
"선미 씨. 우린 애들이 아니에요. 이 정도는 직접 먹을 수 있다고요."
"아... 이런 게 몸에 배어서요. 꼭 아이들 때문만은 아니에요."
아... 그 순간, 가슴 속이 살짝 철렁했다. 물론 선미가 그런 걸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순간적으로 선영이 ROSE에서 일하던 때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직 날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던 고집스러운 선영이었을 때, 그녀는 내 옆에 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안주를 내 입에 넣어주곤 했었다. 그게 그녀의 몸에 밴 행동이었기 때문에... 내가 목이 메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동안 지혜가 선미와 대화를 나누었다.
"낮에 애들 보느라 많이 힘들죠?"
"괜찮습니다. 다들 착한 아이들이라 그다지 힘들지 않아요."
"어휴. 난 내 아들인데도 다루기 여간 힘든 게 아닌데.... 선미 씨는 참 대단한 것 같아."
"과찬이십니다."
아무래도 대화의 주제는 주로 애들이었다. 그렇게 선미를 두고 지혜의 칭찬 릴레이가 이어졌다. 선미는 두 손으로 맥주캔을 꼭 잡은 채 지혜의 이야기에 짤막한 대답을 하며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술을 별로 마시지 않았다. 맥주캔을 비우는 건 주로 나와 지혜였다. 네 캔째에 이르렀을까. 지혜는 테이블에 상체를 비스듬히 기댔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커다란 두 가슴을 테이블에 "얹어놓곤" 했다. 그냥 보기에도 꽤 무거워 보이는 것이니... 그럴 만도 하다. 지혜는 포크로 닭 뼈를 쿡쿡 찌르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선미 씨가 우리와 함께 한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런 자리는 처음이네. 나와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것도 처음이죠? 그쵸, 선미 씨?"
"그건 제가 대화에 그다지 익숙지 않아서..."
"아니에요. 선미 씨를 탓하려는 게 아냐. 내가... 내가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그랬어요. 선미 씨가 고맙기도 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부담스럽다고 느낀 것도 사실이야. 명색이 내 아들인데 수영이가 나보다 선미 씨를 더 따르는 것도 샘나고. 그렇지만 이젠 정말 진심으로 말할 수 있어. 고마워요. 진짜로."
"별말씀을요. 그리고 수영이는 지혜 님을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늘 엄마 이야기를 하곤 해요."
지혜는 옅은 슬픔이 담긴 얼굴로 웃었다. 그녀가 과거를 잊고 쓸쓸함을 덜기 위해 나와 몸을 섞는 걸 택했다고는 하나 수영이 문제는 그녀에게 아직도 풀리지 않는, 당면한 문제였다.
"생각하면 뭐해요... 표현을 안 하는데... 날 보면 아무 이야기도 안 하는데... 그래서 난 더 가슴 아프고... 가슴 아프니까 수영이랑 눈을 못 마주치겠어. 그 아이의 눈을 볼 때마다 날 비난하는 것 같아서."
"수영이도 조금씩 밝아지고, 또 나아지고 있어요. 지혜 님도 곧 그걸 아시게 될 겁니다."
선미의 어조는 지극히 차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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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어쩌다 보니 300화네요.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400, 500화까지 달려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