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05화 (30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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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겨우 정신을 차린 난 복잡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다시 몸을 돌려 출장뷔페의 사람들과 이벤트 업체들의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시작했다. 열 시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일이 인사하기도 버거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다. 대략 삼백 명까지는 입장객을 체크한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포기했다. 몸 전체를 복잡하게 움직여가며 마음속 복잡함을 비워냈다.

열 시가 되었고 강당의 문이 닫혔다. 강당에는 80여 개의 원형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었고 그 위에 각종 음식들이 쌓여 있었다.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가운데 행사 진행 MC가 식의 시작을 알렸다. 모두의 시선이 앞에 놓인 연단으로 향했다. 그곳을 향해 가희가 올라갔다. 어깨 전체와 젖가슴 바로 위까지 듬뿍 파인 검은색 실크드레스를 입었다고는 하나 성숙미는 전혀 찾을 수 없다. 신발도 드레스에 맞추어 검은색 하이힐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저건 남의 신발을 빌려다 신은 것 같다. 그녀는 늘 헐렁한 티셔츠에 실험용 가운을 두르고 있는 게 일상이라 그런지 드레스, 특히나 검은색은 영 안 어울린다.

아무튼 우리 연구소의 마스코트이자 초특급 동안인 대표님이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섰다. 그녀의 손에는 삼화뷔페에서 납품한 전통주가 가득 담긴 글라스가 들려있었다.

"자, 그럼 부산 최고의 연구소. 휴먼오토엔지니어링랩의 2007년도 송년회를 시작합니다! 자, 건배!"

가희의 선언에 따라 모두의 잔이 허공을 향했다. 여기저기서 잔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가희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그녀는 짧은 키만큼이나 인사도 짧게 하곤 연단의 뒤로 물러났다. 그곳에는 중요 인사들을 위한 몇 개의 의자가 놓여있었다. 가희는 그중 하나에 앉았다.

가희의 뒤를 이어 나온 나 소장부터 시작하여 줄줄이 이어진 지역 유지들의 인사는 그다지 간결하지 않았다. 꽤 재미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초대 손님 중에는 구의원, 시의원뿐만 아니라 지역구 국회의원도 있었다. 상공회의소 회장, 무역협회 부산지부장 등 나름대로 지역 정, 재계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있다고 보면 되었다. 방명록을 들춰보니 직접 오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부인을 보내거나 비서를 보내오기도 했다. 우리 연구소가 지역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었다.

나와 희경은 진행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연단 옆, 약간 아래쪽으로 후미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음식이야 몇 접시 담아 와서 앞에 두고 있었지만, 분위기상 손도 못 대고 말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하품이 나올 것 같아서 옆에 서 있는 희경에게 살짝 물어보았다.

"우리 연구소가... 그렇게 유명한 곳이었습니까? 어째 으리으리한 분들이 꽤 오네요?"

"연구 성과로 유명...하다기보단 뭔가 다른 걸로 유명하다 그러죠. 그래서 이렇게 사람들도 많이 오구요."

"다른 거요? 그게 뭔데요?"

"자세히는 몰라요. 저도 확실히는. 그렇지만 저희 이사님들이 상당히 끗발 있는 분들이라는 소릴 들은 적이 있어요. 최 대리님도 보시면 알겠지만, 예산이나 시설이 지나치게 좋잖아요."

"그 이야기는 저도 들었지만... 이사가 누구인지는 한사코 알려주지 않더군요. 이사님들이 대체 누구기에 그러죠?"

한 명이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희경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상장된 회사도 아닌데 이사가 누구인지 꼭 밝힐 필요는 없잖아요. 나름 기업 비밀이라면 비밀이고."

"백 선배는 안 궁금해요?"

"별로요.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서 내 월급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누군지도 모르는 게 더 좋은 거 아니에요? 그런 높은 사람들이 우리 일에 하나하나 참견한다고 생각해봐요. 끔찍하지 않아요?"

"그것도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그 지겨운 인사말의 릴레이가 드디어 끝났다. 그 뒤로 각 부서의 연구 성과 발표가 이어졌다. 솔직히 말해서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게 절반 이상이었다. 프레젠테이션 발표 자료의 대부분은 영어로 되어 있었다. 그것도 일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전문적인 단어들 말이다. 게다가 해외 연구소나 외국 대학에서 초청되어 온 사람들은 발표까지 영어로 했다. 배도 고프고 정신도 혼미하여 선 채로 기절할 지경이었다. 공대생 출신으로 이런 소리를 하면 안 되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 이르고 나니 연구직으로 들어가지 않고 총무팀으로 들어온 게 백 번 양보해도 다행이지 싶었다. 나 소장은 이런 걸 염려해서 날 연구직으로 받는 걸 거부한 걸까... 그런 걸까...

"한석 씨. 한석 씨."

희경이 내 옆구리를 찌르는 바람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일순간 졸았던 모양이다. 다행히 침을 흘리지는 않았다. 머리를 살짝 흔들어 남은 잠기운을 떨쳐내고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러시죠?"

"저기 저 사람들... 누구죠?"

"누구....어라?"

희경이 가리킨 방향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강당 문이 열려 있었다. 입장할 사람은 어지간히 다 입장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일단의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은 뭐랄까. 보통 분위기가 아니었다. 물론 오늘의 드레스코드가 정장인지라 남자들은 전부 양복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런 양복은 아니었다. 저 사람들의 양복은 마치 꼭...

"조폭 같은데요?"

희경의 목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폭들이다. 깡패들이란 말이다. 게다가 숫자도 하나, 둘, 셋... 아니, 둘, 넷, 여섯, 여덟... 암튼 많다. 적어도 스무 명 이상이다. 저런 사람들이 여기 왜 온 거지? 설마 우리 연구소를 노리는 건가? 우리 연구소에 나도 모르는 뭔가 이권이 걸려있다거나 하는 걸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연단 위에 의자를 놓고 앉아있는 가희를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도망친다고 하지만 가희는 다리가 짧아서 힘들 지도 모른다. 척 보기에는 절대 익숙지 않은 하이힐을 신고 있는 그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가희가 손을 번쩍 들더니 마구 흔들기 시작한다. 저건 무슨 사인일까. 도망가라는 신호는 아닌 것 같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군가와 만나서 반가울 때 손을 흔드는 모양새랑 꽤 비슷한데 말이다....급기야 가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리사 씨! 어서 와요!"

가희가 부르는 소리에 강당에 있던 사람들 전부가 뒤를 돌아보았다. 연단에서 신개념 소재에 대해 말하던 발표자도 말을 멈추었다. 강당에 전체에 순간적인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정적의 부피만큼이나 내 가슴도 덜컥 내려앉았다.

가희가 방금 부른 이름, 몹시 반갑게 부른 그 이름.

난 알고 있다. 절대 모를 리 없는 이름이었다. 동명이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흔치 않은 이름이다. 연단을 보고 있던 난 고개를 홱 돌려서 강당의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근 십 년 가까이 보지 못했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리사..."

그녀는 아직 날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일종의 벽을 만들어 리사가 걸어갈 길을 확보한다. 사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강당에 가득 찬 사람들 전부가 알아서 비켜 그녀의 길을 만들고 있었다. 몹시 온화한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묵례를 전하며 리사는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언제나 그랬듯 검은 선글라스를 번뜩이는 예린이 서 있었다. 아니, 예린 뿐만이 아니었다. 리사의 왼쪽 뒤편에 내가 아는 또 다른 얼굴이 보였다. 리사를 따라 함께 걷고 있는 저 아이의 이름을 난 알고 있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지만...

"유진이...? 유진이가 여긴 왜....?"

내가 아직 잠이 덜 깬 걸까. 이건 꿈일까, 생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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