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06화 (30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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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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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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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제는 김해 공항 승객 출구 앞에서 초조해하고 있었다. 분명 알림판에 그가 기다리는 비행기의 도착 시그널은 들어와 있는데 정작 기다리는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역시 판때기를 하나 만들었어야 하나.'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출구에서 "어디어디서 오신 누구씨"라는 식으로 대문짝만하게 써서 머리 위로 들고 있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 주변에서는 그러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괜히 자기 혼자 그런 거 들고 있으면 쪽 팔릴 것 같아서 주저하고 있었다.

'나 소장 이 인간은 가는 날까지 사람을 이렇게 부려 먹냐.'

나윤호 소장은 원래 국내 유수 대학의 학과장이었다. 연구소에 초빙되어 2년간 있었던 그는 이제 퇴임하여 학교로 돌아간다. 오늘 저녁에 있을 송년의 밤에서 그의 퇴임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그런 그가 오후 나절에 영제를 부르더니 심부름을 시켰다.

"영제 군. 연구소 차 가지고 김해 좀 다녀오게나."

"김해요? 거긴 왜요?"

"나 가고 나서 새로 소장할 사람이 오늘 입국한다는군. 자네가 공항에 좀 나가줬음 하네. 외국 대학에서 있던 사람이라 부산 지리는 잘 모를 테니."

다른 사람들은 행사 준비한다고 정신없이 바쁠 때였다. 혼자 몸을 빼는 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소장이 시킨 일을 마다할 순 없었다. 게다가 새로 오는 소장님이라니. 당연히 잘 보이도록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영제는 연구소 업무용 차인 대형 세단을 몰고 붐비는 시내를 벗어난다. 낙동강을 건너 김해공항에 도착해서 시간을 확인하고는 출국장에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마중해야 되는 사람의 이름이나 얼굴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러니까 맨날 욕을 먹지....'

소장이 일을 시키는 방식도 엉성하지만 자기 자신의 부주의함도 어쩔 수 없다. 결국 그는 공항 한쪽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라면 박스 하나를 얻어왔다. 매직을 하나 사서 잘 펼친 박스에다가 이렇게 큼지막하게 적었다.

[휴먼오토엔지니어링 연구소

새로 오신 소장님 환영]

성도 이름도 모른다. 성별도 모르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영제가 알고 있는 건 딱 하나 외국에서 오는 새 소장이라는 것뿐... 그러다가 영제의 생각은 이 사람이 외국에서 오는 사람이라는 것에 미쳤다.

'으아... 외국 놈이면 우짜지...'

웰컴이라고 해야 하나 하우아유로 시작해야 되나 엄청 고민했다. 그러는 동안 출국장에서는 이미 나올 사람은 거의 다 나왔는지 더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나온 사람들은 다들 각자의 길을 향해 떠나고 난 터라 소장 같은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떤 귀엽게 생긴 아가씨 한 명이 커다란 트렁크를 옆에 세워두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오오... 죽이네....'

영제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그 아가씨에게 집중했다. 소장은 나중에 찾아도 되겠지. 하는 생각에 여자를 위아래로 주욱 훑어본다. 나이는 이제 스무 살 초중반쯤 되었을까.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차림새가 무척 단정하여 야하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옅은 물빛의 블라우스나 화장기 없는 얼굴도 수수하다기보단 자연스럽고 환한 느낌이었다. 은테 안경만 없다면 그 미모가 더 빛날 텐데, 하고 영제는 생각하고 있었다. 영제는 개인적으로 안경 쓴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봐요."

".........네?"

몰래 훔쳐보고 있는 걸 들킨 걸까. 영제는 그 아가씨가 이쪽을 바라보며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다른 사람은 없었기에 쭈뼛거리면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라도?"

"그거, 당신이 쓴 거예요?"

여자가 가리킨 것은 영제가 들고 있는 급조 팻말이었다. 영제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요. 당신. 이 연구소랑 무슨 사이죠?"

"에? 에..... 이 연구소에서 일하는데요?"

그러자 여자의 눈이 아주 가늘게 변하며 영제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이면 연구원? 근데 뭐 이렇게 얼빵하게 생겼어?"

"네? 에엑?"

난데없는 독설에 영제는 어안이 벙벙했다. 영제는 얼빵하게 생겼다는 소리가 몹시 억울하여 변명했다.

"무슨 소립니까? 이래봬도 석사라고요."

"겨우 석사? 난 박사 학위만 세 개인데? 석사가 뭐 어쨌다고."

영제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학력이 여자의 코웃음 앞에서 산산조각 나고 만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박사 학위가 세 개라니.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거짓말 같은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여자의 태도나 말투는 전혀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영제가 추가로 반박할 타이밍도 주지 않는 여자는 이어 한숨을 푹푹 쉬더니,

"뭐야. 간신히 여기까지 왔더니 이런 얼빵한 놈이나 보내고... 다시 칼텍으로 가버릴까보다."

하며 투덜거렸다. 그러다가 영문을 몰라 멍 때리고 있던 영제를 보더니 말했다.

"차 가져왔죠?"

"아, 예."

"가요."

여자가 영제에게 자신의 트렁크를 턱 맡기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키는 쪼끄만한 주제에 발걸음은 무척 빨랐다. 영제는 황급히 바퀴 달린 여행용 가방을 끌고 그 뒤를 따라붙으며 물었다.

"저기, 근데... 누구세요?"

그러자 여자의 걸음이 딱 멈췄다. 뒤를 돌아본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나 마중 온 사람 아니었어요?"

"에? 전 우리 연구소에 새로 오신 소장님을 모시러..."

그러자 여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키더니 이렇게 말한다. 그리 큰 가슴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굴곡은 있었다. 고 짧은 시간, 영제는 그걸 파악해내고 있었다. 거기에 시선이 뺏긴 그의 귀에 엄청난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게 나라구요. 칼텍에서 온 닥터 진. 바로 저 진유진이라구요. 나 교수님이 저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던가요?"

"나 교수님...? 나윤호 소장님 말씀인가요?"

"그래요. 나 교수님. 저한테 연구하기 좋은 자리 있으니 한국 오라고 살살 꼬시더니만 이런 한심한 인간이나 일하는 랩이잖아. 짜증 나."

영제가 뜨악해있는 동안 유진은 다시 몸을 홱 돌려 주차장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영제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 뒤를 따라붙었다.

"기다리세요. 소장님! 같이 가요!"

영제는 간신히 유진을 따라잡아 주차장까지 모시고 갔다. 연구소 차의 뒷자리에 그녀를 태우고 운전석에 앉아 차를 출발시켰다. 리어미러를 통해 언뜻언뜻 비춰지는 유진의 모습을 훔쳐본다. 유진은 오른쪽 뒷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영제는 아직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소장이라고 하면 으레 나 소장 같은 백발이 성성한 노 교수를 상상하고 있던 그의 앞에 너무도 젊은, 그리고 너무도 어여쁜 처자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러던 그는 어떤 생각에 미치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하긴... 대표님만 해도....그렇지.'

연구소의 대표인 윤가희 생각이 나자 영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연구소에 처음 와서 근무를 시작할 때, 가희가 와서 자신을 대표라고 소개하는 걸 보고 영제는 이게 일반인을 상대로 한 몰래카메라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가희는 약학 분야에 있어서 엄청난 실력을 가진 수재였고 그녀의 실력을 알게 된 연구소 사람들은 그녀를 대표로 인정했다.

'그럼 저 여자... 아니, 새 소장도 그런 류인가? 천재거나 하는?'

영제의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연구소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영제는 나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착했음을 알리자 그는 지금 대표실에 있다며 지하로 바로 오라고 말했다. 영제는 알았다고 대답한 후 뒷자리를 돌아보았다. 유진은 이미 차에서 내린 후였다. 영제는 얼른 창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진은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영제는 유진을 어떻게 부를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말을 건넸다.

"저기... 진 소장님. 지금 나 소장님이 대표실로 오시라고..."

그러나 유진은 영제의 말을 무참히 씹고는 주차장에서 뛰어다니고 있는 한 아이에게 다가갔다. 어깨에 닿을 정도로 찰랑거리는 머리를 흩날리고 있는 여자아이였다.

"얘."

유진이가 부르자 여자아이는 뛰던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 특유의 경계감이 서린 눈으로 유진을 올려다본다. 유진은 두 손으로 스커트 뒤를 쓸어내리며 쭈그리고 앉았다. 그렇게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귀엽게 생겼구나. 너 이름이 뭐니?"

아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자신의 좌측에 서 있는 한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다리에 난 혹처럼 다른 여자아이를 매달고 있는 이십 대 여자였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유진이가 말을 건 여자아이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라예요. 최아라."

"그래... 네가 아라구나. 귀엽네.. 정말 귀엽네..."

다른 사람들은 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아라의 옆에 서 있던 여자는 유진의 목소리에 물기가 살짝 서려있음을 눈치 챘다. 그녀의 이름은 선미였고, 선미는 그녀의 독특한 직업 덕분에 다른 사람의 심경이나 말투를 알아차리는 일에 꽤 훈련이 되어있었다. 그렇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아라를 쳐다보는 유진의 눈길이 꽤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선미는 앞에 있는 여자가 특별히 아라에게 해코지할 사람으론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혹시 엄마 이름이 뭐니?"

"엄마요?"

아라는 이번에 옆에 있는 다른 여자아이를 돌아보았다. 선미의 다리에 매달린 아이는 수영이였다. 물론 수영이가 여자아이는 아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도 여자아이스러운 남자아이였다. 아라는 수영이와 눈을 마주치더니 살짝 웃으며 유진에게 답했다.

"저희 엄마 이름은 지혜인데요. 김지혜."

그러자 유진은 크게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아이가 말한 이름을 곱씹었다.

"지혜라고... ?"

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아라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곤 선미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표했다. 그런 다음 몸을 돌려 영제에게 돌아갔다. 아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유진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상한 언니야다. 그치, 선미 이모?"

"글쎄에."

"나보다 수영이가 훨씬 귀여운데, 그쵸?"

"너도 귀엽게 생겼어. 아라야."

선미는 아라와 수영의 손을 잡고 건물로 향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은 잠시 후, 고개를 돌렸다. 잠깐 심호흡을 했다. 옆에 있던 영제는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진 소장님. 아까 나 소장님이랑 통화했는데요. 대표실로 바로...."

"들었어요. 안내하세요."

유진은 그제야 건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영제의 안내를 받아 로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대표실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갔다. 지하의 좁은 복도를 지나 가희의 사무실에 도착한다. 영제가 문에 대고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몹시도 명랑한 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영제가 문을 열었고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임에도 전혀 퀴퀴하지 않고 넓기까지한 공간이 그녀를 맞이했다. 공간뿐이 아니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도 유진을 맞이했다. 그중 하나인 나 소장은 껄껄 웃었다. 소파에 앉아있던 그는 벌떡 일어나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어서 오게나. 유진 양.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네. 이게 얼마만이야. 한 오 년만인가 그렇지?"

나 소장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유진의 표정은 전혀 펴지지 않았다. 유진의 시선은 소파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유진의 커다란 눈이 더욱 동그랗게 되었다.

"당신은... 그..."

찻잔을 들어 조용히 마시고 있던 여자는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내리깔고 있던 눈을 뜨고 유진의 이름을 부른다.

"어서 오세요. 진유진 박사님. 나 소장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마치 베트남 여성 전통의상을 연상시키는 하얗고 몸에 착 달라붙는 롱드레스가 그녀의 매끈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저는 이 연구소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리사라고 합니다. 나 소장님이 적극 추천하신 진유진 박사님을 저희 연구소의 소장직으로 초빙하려고 하는데, 어떠십니까?"

그녀의 이름은 리사.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리사. 그러나 그녀를 보고 있는 유진은 결코 웃을 수 없었다. 유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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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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