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307화 (307/471)

0307 / 0471 ----------------------------------------------

Route 5

───────────────────────────

한석은 모른다.

───────────────────────────

"당신이 여길 어떻게..."

"당신?"

나 소장은 유진이가 가리킨 사람이 리사라는 걸 깨닫고 살짝 당황했다.

"진 박사. 김 이사랑 아는 사이였어?"

이번에는 유진이 당황할 차례였다.

"이사라고요? 이 아줌마가?"

그러자 리사는 살포시 웃으면서 유진에게 다가와 손을 덥석 잡았다.

"그래요. 제가 이 연구소의 이사인 김리사입니다. 그때 서울에서 보고 몇 년 만이죠? 이게? 정말 반갑네요."

"....뭐, 저도 대충은 그래요. 반갑다고 해두죠."

유진은 리사와 마주쳤던 기억을 떠올렸고, 그때의 긴장감을 상기했다. 그렇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리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 소장님이 저에게 유진 씨를 추천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세상이 이렇게 좁을 수도 있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죠. 그리고 한 번 더 놀랬어요. 유진 씨가 이 정도로 대단한 분인 줄 몰랐거든요. 나 소장님이 어지간해서는 칭찬을 잘 안 하는 분인데 유진 씨에 대해서는 정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 하시더라구요."

"허허, 제가 뭘요. 그게 다 진 박사가 대단한 거지 제가 공치사를 하는 건 아닙니다."

리사는 유진의 손을 잡고 소파로 이끌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아, 가희 언니. 유진 씨 차도 한 잔 더 타주세요."

유진이 고개를 돌려 사무실의 안쪽을 보았다. 싱크대 쪽에 서 있던 가희가 유진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유진은 가희를 이곳에서 차나 타는 여자 정도로 생각했다. 나이도 자신과 비슷한 정도로 생각했다. 그때, 나 소장이 그녀에 대해 소개했다.

"저분은 우리 연구소의 대표인 윤가희 박사라고 하네. 앞으로 유진 자네와 함께할 인재이지."

유진은 깜짝 놀라며 나 소장 쪽을 쳐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나자 조금 토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맡겠다고 한 적 없습니다만."

"에헤이, 이 사람 또 이러네."

유진의 대답에 나 소장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리사는 살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벌써 설득이 다 끝난 게 아니었나 보죠? 저는 당연히 두 분이서 이야기가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아, 그게 말입니다. 진 박사가 워낙 자리 욕심이 없는 친구라 미국 대학에서도 교수자리를 주겠다는 걸 마다하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본인이 연구하는데 번거롭다나 어쨌다나. 그러나 제가 계속 설득 중입니다. 이봐, 유진 양. 어차피 우리 연구소에서는 그렇게 번거로울 것 없이 자네 하고 싶은 연구만 계속 하면 되네. 설비나 자료에 대한 지원까지 알아서 해주니 자네로서도 좋은 기회 아닌가."

"그렇기는 하지만...."

"난 자네가 한국에 들어온다기에 내 제안을 완전히 수락하는 걸로 생각하고 이사장님께 제청까지 드려놓은 상태야. 자네가 맡지 않겠다고 하면 당장에 이 연구소 소장 자리는 공석이 되고 말어. 아니, 그러게 안 맡을 거면 한국에 오겠다는 소리를 하지 말던가 말이야. 난 또 자네가 미국 생활 접고 온다기에..."

"제가 한국에 오기로 한 이유는...."

"찾을 사람이 있어서?"

유진은 고개를 홱 쳐들어 갑자기 끼어든 리사를 쳐다보았다. 리사는 유진의 시선을 받고도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유진의 눈빛이 꽤 쎈 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점에서 밀릴 리사가 아니었다.

"아니, 그냥 한 번 말씀 드려 본 거예요. 미국에 가 있는 동안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연락은 하고 살았나 싶어서요."

"연락은 무슨...  공부에 방해될까봐 전화 한 통화 나눠본 적이 없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왠지 유진 씨가 찾고 싶어 하는 사람의 연락처는 알고 있죠. 혹시 필요하세요?"

"제가 누굴 찾으려는 줄 알고요?"

"모르긴 몰라도 저와도 관련 있는 사람일 것 같은데요. 아닌가요?"

리사의 천연덕스러운 반응에 유진은 살짝 고민에 빠졌다. 리사의 태도에 발끈하는 식으로 대응해보았자 말려들기만 할 뿐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낀 유진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그래요."

"흐음. 그냥 드리긴 그렇고... 어때요. 만약 소장 자리를 승낙하면 연락처를 드리죠."

"왠지 내가 손해 보는 기분인데요."

"싫으면 할 수 없구요. 나 소장님이 추천하신 인재에다가 세계적인 대학에서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인재를 우리 연구소에 모시지 못해 안타깝기는 하지만,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잖아요? 저도 딱히 계속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리사와 유진의 밀고 당기기를 흥미롭게 보고 있던 나 소장은 한 팔 걷어붙여 돕고 나섰다.

"어휴, 이사님. 이 친구는 아까운 인재입니다."

"본인이 싫다잖습니까."

딱 잘라 말하는 리사를 보며 유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하겠어요. 그러니 당신이 가진 정보를 줘요."

"남에게 부탁할 때는 공손하게 해야 하지 않겠어요. 진 소장님."

유진은 몹시 티 나게 한숨을 푹푹 더 내쉬었다.

"....부탁드립니다."

"후후. 어디 보자....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그럼 다 같이 나가시죠. 행사 시작할 시간이군요."

리사의 제안에 모두들 사무실에서 나가려 하자 유진이 발끈했다.

"이봐요. 아줌마. 약속했잖아요. 연락처 준다면서요."

"지금 바로 드린다고 한 기억은 없는데요. 일단 절 따라오시면 직접 만나게 해드리죠."

"....직접? 여기 있단 말이에요?"

"어머, 제가 그 말씀을 안 드렸구나. 그래요. 오빠는 여기서 근무하고 있어요. 지금 강당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어머나. 표정이 왜 그러시죠? 뭔가 속았다는 표정인데요?"

"속았으니까요. 제가 찾으려던 사람은 오빠가 아니에요."

"후후. 너무 그러지 말고 표정 펴세요. 우리 연구소 신임 소장님. 아참, 그러고 보니... 이런 복장으로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소장님과 우리 연구소 사람들의 첫 상견례인데 말이죠."

유진의 차림이 아주 캐주얼하다 보긴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아주 격식을 차린 정장도 아니었다. 리사는 나 소장과 가희에게 일러 먼저 올라가라고 한 후 예린을 불러 준비한 것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준비한 것?"

"유진 씨의 취향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준비해두었어요. 사이즈가 맞을지 모르겠네요."

"내 사이즈를 어떻게 알고?"

리사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이윽고 예린이 옷을 가져왔는데 혼자서는 입기 어려운 옷이었다. 유진은 혼자 입으려고 했지만, 리사가 자청해서 돕겠다고 하는 통에 별수 없이 리사 앞에서 옷을 벗어야만 했다.

".....브래지어도 벗으라고요?"

"네. 이건 앞에 캡이 달린 거고 등파임도 U자형이란 말이죠."

유진은 뭔가 낚인 기분이 심하게 들었지만, 속으로 투덜거리며 브래지어를 벗었다. 그러자 리사가 지적했다.

"팬티도 벗으세요. 노라인 팬티가 아니면 이 옷의 핏이 안 살거든요."

한 팔로 가슴을 가리고 있던 유진은 리사를 쏘아보았다.

"대체 어떤 옷을 준비한 거예요?"

"입어보면 아시겠죠?"

이십 년 정도는 옷가게에서 일한 것 같은 느낌의 리사에게 유진은 이길 수 없었다. 결국은 팬티까지 리사가 내어주는 걸로 갈아입고 드레스를 입기 시작했다.

───────────────────────────

한석은 모른다.

───────────────────────────

0